[작가] 이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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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이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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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碧笑) 이영민(李榮珉, 1882∼1964)은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꾸준하게 한시를 창작했던 문인이자 농민 운동에 투신해 소작 쟁의를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희수(熙守)다. 일찍이 한학(漢學)과 서예를 익혔으며, 취산(醉山)과 벽소(碧笑) 그리고 ‘옥류정 주인(玉流亭主人)’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와, 야학을 개설해(1902) 후학들을 위한 교육 운동을 벌였다. 이후 황전면 출신의 지주인 박승휘(朴勝徽)와 함께 순천남학당(현 순천남초등학교)을 공립으로 인가받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교원으로 재직했다. 일제의 탄압 정책이 거세지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교원을 사직했으며, 이듬해인 1917년부터 약 3년간 중국으로 가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중국을 떠나 1919년에 귀국한 이영민은 이듬해인 1920년부터 순천에서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부터 《동아일보》 순천 분국의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소작 총회에 참석하는 등 순천농민연합회 등에도 소속되어 본격적인 농민 운동에 뛰어들었다. 순천농민연합회가 창립된 직후부터 순천의 각 면은 물론이고 광양과 구례 등 인근 지역에도 농민회가 속속 창립되는데, 이영민은 농민회가 창립되는 현장에 참석해 소작농의 현실을 알리고 농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당시 거세게 전개되었던 소작 쟁의의 현장에 소작농을 대표해 교섭위원으로 참여해, 지주들로부터 소작료의 감세를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일제의 정책에 야합해 소작료를 올리거나 소작권을 빼앗는 등 지주들의 부당한 횡포로 생존의 위험에 노출되었던 소작농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들을 위해 이영민은 적극적으로 소작 투쟁에 동참했다.

이와 함께 지역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순천 연학회(硏學會)’를 창립해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노동 운동에도 뛰어들어 ‘순천노동대회’를 창립하고 노동자의 교육을 위해 노동 야학을 설립해 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또한 기자로서 인근 지역 기자들과의 연대 활동도 펼치며 농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기사로 작성하고, 일제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경찰이나 단체장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 자신이 창작한 한시를 투고하는 등 문인으로서의 활동도 꾸준히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는 한시를 수록하는 고정란을 두기도 했는데, 《조선일보》의 〈사조(詞藻)〉와 《동아일보》의 〈금고시총(今古詩叢)〉 등이 확인되고 있다. 1922년 12월부터 1923년 12월까지 약 1년 동안 《조선일보》의 〈사조〉란에 ‘취산(醉山) 이영민’이란 작자명으로 26수(24제)의 한시가 게재되었으며, 《동아일보》의 〈금고시총〉에는 1924년 9월과 10월에 ‘벽소(碧笑)’란 호로 이영민의 한시 4수가 수록되었음이 확인된다.

당시 순천과 인근 지역에서 소작 쟁의를 주도했던 이영민은 일찍부터 일제에 의해 문제 인물로 주목되어, 가택 수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농민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면서 그는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사회주의 잡지를 발행하려고 설립한 ‘화화사(火花社)’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도 그 일환이라고 파악된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관련 인사를 체포하면서 전개되었던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대표적인 악법인 ‘치안유지법’으로 1년 6개월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영민은 1928년 12월에 만기 출소 후 인터뷰를 통해, 감옥에서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출소 이후에도 이영민은 한동안 순천농민 조합의 위원으로 농민 운동에 투신했으며, 집이 없는 세입자들을 위해 ‘차가인(借家人) 동맹’을 결성해 임대료를 낮추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1932년 모종의 비밀결사 혐의로 체포되면서, 이영민의 대외적인 사회 활동은 신문 기사에서 한동안 발견되지 않는다.

이후 신문 기사에서 보이지 않던 이영민의 행적은 1940년 무렵 서예가로서 서도전(書道展)에 입선했다는 내용으로 다시 등장하는데, 아마도 이 기간에는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지역에서의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문화 예술 활동에 종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에 이영민은 김종익(金鍾翊, 1886∼1937) 등 지역의 유지들과 함께 판소리 창자를 비롯한 예술인을 후원하는 등 문화 활동에 뛰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순천을 방문했던 예술인들에게 한시를 지어 주고 사진을 찍어 남겼으며, 이렇게 남겨진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전통 예술인들의 예술 세계와 활동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듯 자신의 한시를 전통 예술인에게 지어 주는 등 이영민은 서예가이자 문인으로 순천과 인근 지역의 문인 및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 활동을 펼쳤다. 그는 당시 ‘추사체(秋史體)계의 거두’로 평가되었으며, 이영민의 서체는 호를 따서 ‘벽소서체’라고 불리고 있다. 아울러 문인으로서 한시 창작에 매진하고 그 결과물로 《벽소시고》라는 시집을 엮어 낼 수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서예 학원 등을 운영하다가 1964년 광주에서 생을 마쳤다.

이영민의 생애와 활동 양상에 대해서는, 그의 유족들이 국가보훈처에 항일독립운동가로 지정받기 위해 작성한 ‘독립운동가 포상 신청서’(2007년 8월)와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당시의 신문 기사를 활용해 재구했다. 이영민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포상은 2008년 2월에 한 차례 반려되었다가, ‘보완신청서’(2008년 12월)를 다시 제출했으나 결국 지정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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