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 류두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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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渡舟
랴오닝성(遼寧) 잉커우(營口)시 사람이다. 16세에 정식으로 스승을 모시고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7년 만에 배움을 마친 뒤 다롄(大連)에서 의원을 열었으며, 1945년에는 베이징으로 옮겨 첸량후통(錢糧胡同)에서 진료를 하였다. 1950년에 위생부 중의진수학교(中醫進修學校)에 입학하여 서양의학의 기초와 임상과정을 수학하였다. 1956년에는 신설된 베이징중의학원(北京中醫學院, 현 베이징중의약대학)으로 가서, 상한연구실의 부주임과 주임, 고전의저(古典醫著)연구실 주임, 금궤연구실 주임, 중의기초부 책임자, 『베이징중의약대학학보』의 주편과 명예주편, 베이징중의약대학 학술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저자는 근 반세기 동안 중의학 교육에 종사하여 풍부한 경험을 갖춘 걸출한 중의학 교육자이다.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최초로 인준한 중의학 교수이자 중국 최초의 중의학 석사연구생·박사연구생 지도교수로서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 보조금을 받기도 하였다. 여러 단계에 걸쳐 중의학 인재를 많이 길러내어, 석사 24명과 박사 12명, 그리고 여러 명의 출중한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교육과 임상 외에 저술에도 힘써서 출판한 학술저작이 30여 권이고 발표한 논문이 110여 편이다. 저자가 주도한 국가위생부 과제인 “상한론 정리연구”는 국가중의약관리국의 과학기술진보상을 받았다. 학술교류 방면에서도 다년간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전국중경학술전업위원회를 설립하고 주관함으로써 중경 학술의 계승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 여러 차례 일본에서 초청강연을 했으며, 싱가포르와 호주, 홍콩 등을 방문하여 교류함으로써 중의약학을 널리 알렸다.
그는 학자이자 교육자인 동시에 명의이기도 했다. 교육계에 투신한 후에도 임상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위로는 기황(岐黃)의 도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제가(齊家)의 학설을 섭렵하였으며, 중경(仲景)의 학문을 주창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장점을 널리 받아들여 학식과 경험이 모두 풍부했으며, 독특한 학술사상과 의학적 기풍을 형성하였다. 내과, 부인과, 소아과 질병의 치료에 두루 탁월하였으며, 특히 각종 간병, 심장병, 신장병, 비위병, 위증(?證), 비증(痺證), 현훈, 실면 등의 변증논치(辨證論治)에 독자적인 견해와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팔순에 접어들었을 때는 필생의 심혈이 깃든 간병치료의 연구성과를 베이징중의약대학에 기증하였다.
저자는 근 반세기 동안 중의학 교육에 종사하여 풍부한 경험을 갖춘 걸출한 중의학 교육자이다.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최초로 인준한 중의학 교수이자 중국 최초의 중의학 석사연구생·박사연구생 지도교수로서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 보조금을 받기도 하였다. 여러 단계에 걸쳐 중의학 인재를 많이 길러내어, 석사 24명과 박사 12명, 그리고 여러 명의 출중한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교육과 임상 외에 저술에도 힘써서 출판한 학술저작이 30여 권이고 발표한 논문이 110여 편이다. 저자가 주도한 국가위생부 과제인 “상한론 정리연구”는 국가중의약관리국의 과학기술진보상을 받았다. 학술교류 방면에서도 다년간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전국중경학술전업위원회를 설립하고 주관함으로써 중경 학술의 계승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 여러 차례 일본에서 초청강연을 했으며, 싱가포르와 호주, 홍콩 등을 방문하여 교류함으로써 중의약학을 널리 알렸다.
그는 학자이자 교육자인 동시에 명의이기도 했다. 교육계에 투신한 후에도 임상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위로는 기황(岐黃)의 도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제가(齊家)의 학설을 섭렵하였으며, 중경(仲景)의 학문을 주창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장점을 널리 받아들여 학식과 경험이 모두 풍부했으며, 독특한 학술사상과 의학적 기풍을 형성하였다. 내과, 부인과, 소아과 질병의 치료에 두루 탁월하였으며, 특히 각종 간병, 심장병, 신장병, 비위병, 위증(?證), 비증(痺證), 현훈, 실면 등의 변증논치(辨證論治)에 독자적인 견해와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팔순에 접어들었을 때는 필생의 심혈이 깃든 간병치료의 연구성과를 베이징중의약대학에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