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인 플라톤과 함께 2천여 년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위인이다. 1998년 저명한 현대 철학자들이 뽑은 “서양철학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최고의 목적”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에 북부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왕의 주치의였다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릴 때 죽었다. 그가 17살 때 어머니마저 죽은 뒤 후견인인 프록세노스에 의해 아테나이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로 보내졌고, 거기에서 20년간 머물렀다.
기원전 347년에 플라톤...
스승인 플라톤과 함께 2천여 년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위인이다. 1998년 저명한 현대 철학자들이 뽑은 “서양철학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최고의 목적”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에 북부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왕의 주치의였다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릴 때 죽었다. 그가 17살 때 어머니마저 죽은 뒤 후견인인 프록세노스에 의해 아테나이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로 보내졌고, 거기에서 20년간 머물렀다.
기원전 347년에 플라톤이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를 플라톤의 조카인 스페우시포스에게 맡기고, 철학의 후원자였던 소아시아 아소스의 왕 헤르메이아스에게 갔다. 거기서 그는 헤르메이아스의 조카인 피티아스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기원전 345년에 헤르메이아스가 페르시아인들에게 살해되자, 그는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로 갔고, 거기에서 수제자이자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된 테오프라스토스를 만났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된 왕세자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기원전 335년에 그는 다시 아테나이로 돌아와서, 자신의 독자적인 교육기관인 리케이온을 세웠고, 이것이 소요학파의 기원이 된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가 쓴 책들과 글들 다수는 이 기간에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지성과 폭과 깊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가 다룬 분야들은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미학, 동물학, 식물학, 자연학, 철학사, 정치사 등으로 아주 폭이 넓었다. 그의 대표적 저서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형이상학』, 『자연학』, 『정치학』, 『범주론』, 『명제론』, 『수사학』, 『시학』 등이 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아테나이에서는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강해지고 그는 불경죄로 고발된다. 그렇게 해서 그는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떠났고, 그 다음 해 6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63년에 전남곡성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청소년기에 빛고을 광주로 유학하여 1979년 10.26과 1980년 5월 광주일고 교정에서 겪었다. 시대적 고통은 수학과 과학 분야에 흥미를 가졌던 그에게 그가 가진 재능중 언어에 대한 재능이 가장 떨어짐에도 불고하고 인문학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강요했다. 이후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활동태와 완전태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푸른 꿈을 안고 독일 유학길에 올랐지만, 뮌스터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몰두하던 중 IM...
1963년에 전남곡성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청소년기에 빛고을 광주로 유학하여 1979년 10.26과 1980년 5월 광주일고 교정에서 겪었다. 시대적 고통은 수학과 과학 분야에 흥미를 가졌던 그에게 그가 가진 재능중 언어에 대한 재능이 가장 떨어짐에도 불고하고 인문학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강요했다. 이후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활동태와 완전태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푸른 꿈을 안고 독일 유학길에 올랐지만, 뮌스터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몰두하던 중 IMF 사태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꿈을 접어야 했고, 오그라든 삶속에 이제는 죽을 때까지 외롭지 않을 친구인 당뇨병을 얻었다. 산산조각이 된 삶에서 고통은 계속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문제는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리하여 겨우 마음을 잡고 2004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있음'(혹은 '있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있음의 형이상학'에 전념하고자 한다. 우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관한 2차 문헌 몇 권을 우리말로 옮기고,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옮기는 작어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는 힘이 닿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관한 해설서를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