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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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로버트 리 프로스트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로버트 리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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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Lee Frost
미국의 시인이다. 뉴햄프셔의 농장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그는, 그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을 맑고 쉬운 언어로 표현하였다. 그는 자연 속에서 인생의 깊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 시인이었으며, 20세기 미국 최고의 국민 시인으로, 전후 4회에 걸쳐 퓰리처상을 받았다(New Hampshire (1923), Frost’s Collected Poems (1930) A Further Range (1936) A Witness Tree (1942)로 4회 수상). 작품으로 시 「가지 않은 길」, 「소년의 의지」, 시집 『보스턴의 북쪽』, 『시 모음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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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에밀리 디킨슨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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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Dickinson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소설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칼뱅주의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다. 평생 살며 1800편의 시를 남겼다. 자신의 시를 직접 출판하거나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자연을 사랑했으며 동물, 식물, 계절의 변화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말년에는 은둔생활을 했으며 시작 활동을 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매우 높은 지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뛰어난 유머 감각도 보여준다. 운율이나 문법에서 파격성이 있어서 19세기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20세기에는 형이상학적인 시가 유행하면서 더불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40여 편씩 시를 직접 필사하고 편집한 손제본 형태의 파시클fascicle 40권에 보관했고 더러는 편지봉투를 뜯어 그 안에 적어두기도 했다. 주변의 일상과 자연을 시에 담아 사랑, 죽음, 상실, 영원함, 아름다움, 글쓰기와 읽기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인은 당시 청교도의 엄숙함이나 가부장적 질서, 물질주의 생활양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리듬과 형식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했다. 현재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국 시인 가운데 한 명이며, 많은 후배 시인들과 비평가는 물론 음악가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페미니스트 뮤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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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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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Hemingway
1899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 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의사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를 두었고, 여섯 남매 중 장남이었다. 평생을 낚시와 사냥, 투우 등에 집착했으며, 다방면에 걸쳐 맹렬한 행동을 추구하고, 행동의 세계를 통해 자아의 확대를 성취하려 했다. 그러한 인생관은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고등학생 때 학교 주간지 편집을 맡아 직접 기사와 단편을 썼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17년 [캔자스시티 스타]의 수습기자로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며,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다리에 중상을 입고 귀국했다. 휴전 후 캐나다 [토론토 스타]의 특파원이 되어 유럽 각지를 돌며 그리스-터키 전쟁을 보도하기도 했다. 1921년, 해외 특파원으로 건너간 파리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등 유명 작가들과 교유하는 등 근대주의적 작가들과 미술가들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23년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詩)』를 시작으로 『우리들의 시대에』, 『봄의 분류(奔流)』,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발표했다.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소설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그후 1920년대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피츠제럴드’와 ‘포그너’와 함께 3대 작가로 성장하였다.

그의 첫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1926년에 발표했는데, 헤밍웨이의 대다수 작품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발표되었다. 전쟁 중 나누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전쟁문학의 걸작 『무기여 잘 있거라』(1929)는 그가 작가로서 명성을 얻는 데 공헌했으며, 1936년 『킬리만자로의 눈』,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0)는 출판되자마자 수십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이후 10년 만에 소설 한 편을 발표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52년 인간의 희망과 불굴의 정신을 풀어낸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여 큰 찬사를 받았으며,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통해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러나 이 해에 두 번의 비행기 사고를 당하는데, 말년에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 활동도 막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행동의 규범에 철저한 만큼이나 죽음과 대결하는 삶의 성실성과 숭고함을 작품에 투영하려 노력해왔다. 1959년에는 아이다호 주로 거처를 옮겼고, 1961년 여름, 헤밍웨이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1961년 케첨의 자택에서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작으로는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52년 『노인과 바다』 등이 있다.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10여 년 넘게 긴 침체기를 겪었지만, 인생의 절망과 희망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신념을 잃지 않으면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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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랄프 왈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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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Waldo Emerson
19세기 초월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미국 최초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다. ‘에머슨이 없었다면 진정한 의미의 미국 문학은 탄생할 수 없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 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미국 사상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그가 제시한 자기신뢰, 민권 개념 등은 지금도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의 철학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정신’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으며, 링컨은 그를 ‘미국의 아들’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1803년 보스턴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엄격한 도덕률과 신앙심이 충만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하버드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1829년 유니테리언파 보스턴 제2교회 부목사가 되었다. 정통 교리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성과 자유를 찬미하던 그는 교회와의 충돌이 잦아졌고, 결국 목사를 그만두고 유럽 여행을 떠나 밀, 콜리지, 칼라일, 워즈워드 등 당대의 지식인과 친분을 맺었다. 1834년 미국으로 돌아와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에 정착해 저술활동에 전념하면서 초월주의자 클럽을 발족해 미국 초월주의 철학사조를 발전시켰다. 탁월한 대변자로서 ‘콩코드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머슨은 40여 년간 1,500회 이상의 강연으로 개인주의 철학을 전파했으며 남녀평등과 노예제 폐지를 주창했다. 미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하버드대학교에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882년 콩코드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중세 시대의 종교』 『자연』 『에세이, 제1시리즈』 『에세이, 제2시리즈』 『대표적 인간들』 『영국적 기질』 『삶의 태도』 『5월제 외』 『사회와 고독』 『시집』 『시선집』 『신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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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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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 Adams Keller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이겨낸 미국의 사회사업가, 작가다. 1880년 6월 27일 미국 앨라배마 주의 터스컴비아에 있는 비교적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고 난 후 시력과 모두 청력을 잃었다. 일곱 살 때인 1987년 가정교사 앤 설리번을 만나,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통해 헬렌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설리반은 10살 이후 남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학대와 고통 속에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불결하고 빈약한 환경에서 남동생을 떠나 보내야만 했고, 그녀 본인은 눈병에 걸려 실명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설리반은 겨우 20살이었지만 헬렌 켈러의 고통을 이해해줄 수 있는 인내심과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설리반이 없었더라면 아마 위대한 사회사업가 헬렌 켈러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삼중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헬렌은 난폭하고 거칠었으나 장애의 고통을 잘 이해해주는 훌륭한 스승 설리반 덕분에 그녀는 지적으로 큰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그 해 7월부터 점자 공부를 시작한 헬렌 켈러는 1890년에는 보스턴의 농아 학교 플러 선생님으로부터 발성법을 배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899년 하버드 부속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하였고 마침내 1904년 일반인도 입학하기 어렵다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바로 그 해 센트 힐 박람회에서 '헬렌 켈러의 날'이 제정되어 헬렌은 처음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처음으로 전세계의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으며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복음을 심어 주었다. 그녀는 미국 본토가 아닌 해외에서도 강연 여행에 나섰으며 생전에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1937년). 1942년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의 부상병 구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에는 프랑스의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수상하였고 1964년에는 미국의 최고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 받았다. 그녀는 풍부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했다. 1968년 88세를 일기로 코네티컷에 있는 자택에서 영면했다.

그녀의 저서로는 『신앙의 권유』, 『나의 종교』, 『암흑 속에서 벗어나』, 『나의 생애』,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등이 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헬렌 켈러가 22세에 쓴 아름다운 자서전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50대에 이른 그녀가 자신의 눈이 뜨여 3일간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완역한 책이다. 53세에 쓴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시력과 청력 대신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헬렌 켈러의 작품은 정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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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사라 티즈데일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사라 티즈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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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 Teasdale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녀의 곁에는 늘 간호하고 돌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며, 결혼 후에 출간한 시집 『사랑 노래』로 1918년에 미국 시협회가 주관하는 컬럼비아대학교 시상(퓰리처상)을 최초로 수상하였다. 그 외에, 『강물은 바다로』, 『불꽃과 그림자』, 『달의 음영』, 『오늘-밤 별들』과 유고 시집 『이상한 승리』를 남겼다. 간결성과 명료성, 고전적인 형식,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주제를 사라 티즈데일 시의 주요 특징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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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Einstein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름에서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울리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뮌헨에 전기공장을 세우고 일을 시작하자 그곳으로 이주해 학업을 시작했으나 19세기 독일의 엄격하고 현학적인 교육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성적 부진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업 부진으로 가족들이 밀라노로 이주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서 독학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해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수학 성적에 주목한 학장의 배려로 아라우에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고등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후 마침내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1900년 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스위스 시민이 되었고, 2개월간 수학 가정교사로 일하다 베른에 있는 특허사무소 심사관으로 채용되었다. 5년간 특허사무소에 일하던 아인슈타인은 1905년 독일의 『물리학연보Annalen der Physik』에 5개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이라는 논문으로 연방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다른 논문들에서는 유명한 광전효과, 브라운운동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제시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모든 좌표계에서 빛의 속도가 일정하고 모든 자연 법칙이 똑같다면,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이론을 제기하면서 그때까지 인간이 가지고 있던 우주관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또한 그는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를 확립했는데, 이에 따르면 ‘물질이 갖는 에너지는 그 물질의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과 같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공식 E=mc2이다.

특수상대성이론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1914년 독일 프로이센과학아카데미에 자리를 얻어 그곳에서 연구하면서 때때로 베를린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1916년 마침내 『물리학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를 발표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뉴턴이 말한 힘이 아니라 ‘시공연속체 속에 있는 존재에 의해 생긴 굽어진 장(場)’이다. 그의 이론으로 시공간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바뀌었으며, 그때까지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우주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19년 런던 왕립학회가 프린시페 섬에서 행한 과학탐사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예측한 계산값을 증명하는 일식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1905년에 발표한 ‘광전효과’에 대한 공로 때문이었다. 이 이론을 설명하는 광양자 가설은 훗날 양자역학을 낳는 시금석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양자역학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고 거리를 두며 말년에는 주로 통일장이론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난 그는 이후 20여 년 동안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거의 변화 없는 생활을 유지했다. 1939년,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핵무기 연구에 관한 유명한 서한에 서명함으로써 ‘맨해튼 계획’ 수립에 영향을 끼쳤지만,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충격을 받아 핵무기 폐기를 위한 운동에 동참했으며, 비무장 세계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편 1940년,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을 유럽인으로 생각했다. 1952년 이스라엘의 2대 대통령을 제안받기도 했던 그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1955년 대동맥류 파열로 프린스턴 병원에 입원한 뒤 그해 4월 18일 그곳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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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Walt" Whitman
미국의 국민시인으로 불리우는 월트 휘트먼은 스스로를 ‘미국인, 한 야성적 사나이, 하나의 우주’라고 정의하였다. 미국의 정신을 잘 대변해 주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받는다. 1819년 5월 31일 미국 롱아일랜드의 헌팅턴타운 근교의 웨스트힐스에서 농부이자 목수였던 아버지와 퀘이커 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아홉 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민중의 대변인으로, 형식을 깬 자유시를 통해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을 표현한 시인이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5∼6년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하고, 11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심부름꾼,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지식을 깨우쳤는데, 그 덕분에 미국 작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이나 영국 작가들에 대한 모방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 민중시인, 자유시인, 혁명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세울 수 있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교사가 되었으며, 5년간 학교에서 일한 뒤 언론사에서 활동하며 시와 소설을 썼다.

저널리즘에 몸을 담아 뉴욕에서 활약했는데, 1838년에는 주간지 [롱아일랜더]를 창간했다. 1841년 『프랭클린 에반스』, 1842년 『한 아이의 챔피언』 등 소설을 발표하며 [뉴욕 오로라]의 편집자로 일하던 시기에 랠프 월도 에머슨의 ‘자연과 시인의 능력’이라는 강연에 감명받아 자유시 형식의 시 쓰기에 전념한다. 그리고 1842년 봄에 갑자기 편집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욕 오로라]를 그만둔 후, [이브닝 태틀러], [롱아일랜드 스타],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과 같은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 자유 기고가, 편집인 등으로 10여 년간 활동하다가, 마침내 시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신문사 [브루클린 프리맨]의 편집 일을 맡았다.

1848년에 휘트먼은 뉴올리언스에서 발행되는 [뉴올리언스 크레센트]의 편집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고 뉴올리언스로 떠난다. 이때 그는 여행을 통해 그는 미국의 광대함과 다양함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으며, 이때 경험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폭 넓은 비전은 그의 시에 스며들어 그를 미국의 위대한 시인으로 발돋움하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55년 7월, 제목 없는 열두 편의 시를 실은 『풀잎』 초판을 자비로 출판했는데, 에머슨이 이 시집을 극찬하여 시인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풀잎』의 혁신적인 자유시 형식, 성에 대한 묘사, 민주주의적 감수성에 대한 찬미, 그리고 시인의 자아는 시, 우주, 독자와 하나라는 낭만주의적인 주장은 미국 시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휘트먼은 『풀잎』에 생명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찬양을 담은 「아담의 아이들」, 「창포」, 남북 전쟁의 경험을 담은 「드럼-탭스」, 에이브러험 링컨에게 헌정한 「오, 캡틴! 마이 캡틴!」, 「나 자신의 노래」 등을 추가하며 ‘임종판Deadbed edition’이라 불리는 1891~1892년 판본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수정과 증보를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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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Wadsworth Longfellow
헨리 롱펠로(Henry W. Longfellow) 1807년 2월 27일, 당시에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일부였던 메인의 포틀랜드에서 변호사의 여덟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여섯 살 무렵 사립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매우 학구적이고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많은 문학작품들을 소개해 줌으로써 독서와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도록 독려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시를 써서 지역신문에 발표를 했으며, 그 후로도 계속 시를 써서 신문이나 문학잡지에 기고했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이사로 있던 새로 생긴 보든대학(Bowdoin College)에 입학해 그곳에서 너새니얼 호손을 만나 평생을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1825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 대학의 현대어 담당 교수직을 맡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현대어 교수직은 그가 유럽의 현대어를 더 공부한 다음에 맡는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그는 1826년 유럽으로 건너가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을 공부했다. 유럽 여행은 언어 공부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이 여행은 그에게 유럽의 문학, 특히 유럽의 낭만주의 문학을 많이 읽고 접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829년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1835년까지 보든대학에서 유럽의 현대어를 가르쳤다. 하버드대학의 현대어 교수였던 조지 티크너(George Ticknor)가 사임하게 되자 그 뒤를 이어 하버드에서 현대어 교수로 지명되었다. 1835년 그는 언어를 연마하기 위해 다시 유럽으로 갔다. 이 두 번째 유럽 여행에서 그는 독일에서 낭만주의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바친 얼마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를 여행하며 자유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 여행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첫 번째 아내 메리 포터(Mary Storer Potter)가 유산으로 고통을 받다가 사망하는 불운을 당했다. 롱펠로는 유럽 여행에서 보스턴 재력가의 딸인 젊은 프랜시스 애플턴(Frances Elizabeth Appleton)을 만났고, 그녀와 결혼 후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은 케임브리지의 브래틀 가(Brattle Street)에 있는 크레이기 하우스(Craigie House)에 정착했다. 두 번째 유럽 여행을 마치고 1836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롱펠로는 하버드대학의 프랑스어 및 스페인어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시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케임브리지 지역 문학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39년에 괴테의 낭만주의 작품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를 모방한 소설 『히페리온(Hyperion)』과 첫 시집 『밤의 목소리(Voices of the Night)』를 출간했다. 1841년에 두 번째 시집 『발라드와 기타 시(Ballads and Other Poems)』를, 1842년에는 『노예에 관한 시(Poems on Slavery)』를 출간해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18년간 하버드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설화 시 <에반젤린(Evangelin: A Tale of Acadia)>과 소설 『캐버너(Kavanagh)』를 썼지만, 가르치는 일이 시를 창작하는 데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 1855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 뉴잉글랜드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은 『하이어워사의 노래(The Song of Hiawatha)』, 『마일스 스탠디시의 구애(The Courtship of Miles Standish)』, 『노변 여인숙 이야기(Tales of a Wayside Inn)』로 발라드 시인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861년 또 한 번의 불운을 겪게 된다. 집에 화재가 나서 부인이 불에 타 죽고, 그는 부인을 구하려다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롱펠로의 두 번째 아내는 14년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끝에 마흔네 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롱펠로는 이때 생긴 흉터를 감추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또한 아내를 잃은 견딜 수 없는 비탄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단테의 『신곡』을 번역해 미국인들에게 최초로 알린 사람이 되었다. 이 번역을 마친 후, 그는 세 번째로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학위도 받고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는 영광도 누렸다. 1882년 3월 24일 그가 죽은 후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흉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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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거트루드 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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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trude Stein
미국으로 이민 온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1874년 펜실베이니아의 앨러게니에서 태어나 1946년 프랑스 파리 근교 인 뇌유쉬르센에 있는 미국 병원에서 72살에 죽었다. 그녀는 시인, 작가, 극작가, 번역가 및 예술품 수집가로 불리며 또한 매우 중요한 미국의 여성주의자로도 언급된다.

래드클리프대학 재학 중 교수 윌리엄 제임스의 권유로 1897년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시기에 만난 페미니스트 정치활동가이자 편집자였던 메리 북스테이버Mary Bookstaver와의 관계는 첫 번째 책 『Q.E.D.』(1903)의 기초가 되었고, 세 편으로 묶인 『세 명의 삶Three Lives』(1909) 가운데 중편 「멜란차Melanctha」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성애로 표현되었다. 1903년 파리로 이주한 거트루드 스타인은 플뢰뤼스 27번지에서 살며 예술가들을 위한 살롱을 열었다.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으로 구입하고,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조이스, 엘리엇 등 미국의 예술가들과도 깊게 교류하는 등 예술가들의 후원자이자 예술품 수집가로 영향을 끼친다.

1907년 살롱을 방문한 앨리스 바벳 토클라스(Alice Babette Toklas)와 사랑에 빠져 평생의 동반자가 된다. 1930년 연인 앨리스 B. 토클라스와 ‘플레인에디션’ 출판사를 설립해 작가와 편집자로 활동한다. 1933년, 살롱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삶을 엮은 『앨리스 B. 토클라스의 자서전The Autobiography of Alice B. Toklas』을 발표해 유럽 문화를 궁금해하던 미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다.

20세기 중후반의 가장 놀랄만한 미국 여성 예술품 수집가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도 거트루드 스타인이 자신의 길을 인도했던 본보기였다고 밝힌 바가 있듯이 20세기 초반에 야수파와 입체주의 화가들을 누구보다 앞서 높이 인정하며 격려한 점과 청년 작가들에게는 ‘잃어버린 세대’라고 신랄한 비평을 서슴지 않으면서 엄격한 습작 훈련을 요구했던 그녀야말로 유럽의 문단과 화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모였다는데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 외에도 시집 『부드러운 단추Tender Buttons』(1914), 장편소설 『미국인의 형성The Making of Americans』(1925) 등을 통해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1946년, 벨기에 여행 이후 위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스타인이 남긴 유산은 가족들의 반대로 동반자 앨리스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1967년 3월 사망한 앨리스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묻힌 파리의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에 함께 묻혔다.

그녀의 주요 작품은 『세 인생(Three Lives)』, 1909년 『부드러운 단추』, 1914년 『지리와 희곡』, 1922년 『미국인의 형성』, 1925년 『작문과 해설』, 1926년 『상냥한 루시 쳐치』, 1931년 『우정이라는 꽃이 시들기 전에, 우정은 끝났다네』, 1931년 『쓰기의 기술』, 1931년 『오페라와 연극』, 1932년 『앨리스 B. 토클라스의 자서전』, 1933년 『3막으로된 4인의 성인(聖人)』, 1934년 『마티스, 피카소 그리고 거트루드 스타인, 가장 짧은 두 편의 이야기』, 1933년 『누구나의 자서전』, 1937년 『아이다』, 1941년 『내가 본 전쟁』 등이 있으며 작곡가 버질 톰슨Virgil Thomson을 위해서 오페라 극본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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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e Wilson Baker
칼 윌슨 베이커는 미국의 문학가로 시카고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남부감리교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티븐 F. 오스틴 주립대학교 교수직을 역임했고, 다양한 대학 및 문학 단체에서 강의했다. 텍사스에서 가장 재능 있는 작가이자 여성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마지막 시집 『말을 탄 몽상가들(Dreamers on Horseback)』로 퓰리처상 시 부문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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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레딩 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교 진학 후 학보에 다수의 시를 발 표했다. 뉴욕법학전문학교 졸업 후 맨해튼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1914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요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결혼 후 1916년 코네티 컷주의 하트퍼드재해보장보험회사로 이직하여 1955년 사망할 때까지 임원 으로 재직하며 시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23년 첫 시집 『하모니엄』을 발표, 총 8권의 시집과 1권의 산문집을 냈으며, 『가을의 오로라』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고 『월리스 스티븐스 시 전집』으로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에밀리 디킨슨과 월트 휘트먼의 계보를 이어 미국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미학을 구축해낸 대가로, 20세기 후반부터 해럴드 블룸, 헬렌 벤들러 등 주요 평론가들에 의해 꾸준한 재조명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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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3세 때인 1848년 부모님을 따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러게니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뒤 면직 공장에서 실패를 감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1850년에는 피츠버그 전신국의 전보배달원으로 직업을 바꾸었고, 거기서 그의 사업 기초를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인 토머스 A. 스코트를 만나게 된다. 남북전쟁 이후 그는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를 떠나 키스톤 브릿지 웍스라는 철골 구조물 회사를 차려 큰돈을 벌어들인다. 이후 계속 철강업에 매진해 1880년대 후반에는 카네기 스틸을 선철 분야의 최대 회사로 만들었고, 1892년에는 여러 군소 철강업체를 흡수한 카네기 스틸 컴퍼니를 출범시켜 철강 분야의 카네기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1901년 66세의 카네기는 은퇴를 결심하였고, 마침 여러 철강업체를 합쳐 효율을 극대화하기 원했던 J. P. 모건에 의해 유에스 스틸 코퍼레이션으로 통합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카네기는 사업에서 은퇴해 공익사업에 매진한다.
카네기 도서관, 카네기 홀, 카네기 멜론 대학교, 피텐크리프 공원 등 교육과 공익에 그가 기여한 바가 크다. 그는 사업가 외에도 저술가이자 반제국주의자이며 박애주의자였다. 지은 책으로는 『부의 복음』, 『사업의 왕국』, 『자서전』, 『사업의 정석』, 『오늘날의 문제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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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비평가. 1809년 매사추세츠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실종되고 어머니는 두 살 때 세상을 떠나자, 세 살 때 한 사업가 부부에게 입양되어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1826년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도박과 음주에 빠져 양부모로부터 최소한의 재정적 지원으로 잠시 수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했다. 그 후 1835년에는 잡지사 편집인으로 근무, 그 이듬해 5월 클렘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생활고와 결핵에 시달리다 결혼 생활 6년 만에 사망했다. 그러자 포는 방탕한 생활로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아 2년 후인 1849년 10월, 볼티모어의 길거리에서 쓰러져 마흔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검은 고양이』, 『모르그 가의 살인』, 『어셔 가의 몰락』, 『황금 풍뎅이』 등의 단편과 『애너빌 리』, 『갈가마귀』, 『엘도라도』 등의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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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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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na St. Vincent Millay,낸시 보이드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는 1892년, 메인주의 바닷가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밀레이 자매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노래와 피아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시를 읽었다. 빈센트는 평생 동안 어머니와 많은 양의 편지를 교환했는데, 편지에서 종종 자신이 새로 쓴 시를 소개하며, 어머니의 반응을 살폈다.
빈센트는 일찍이 학교에서 글쓰기에 큰 재능을 보인다. 10대 초반에 아동잡지에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을 정도다. 1906년 열네 살의 빈센트는 《세인트 니콜라스》에 시 <숲의 나무(Forest Trees)>를 게재한다. 이 시는 빈센트가 잡지에 게재한 최초의 작품이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1917년 첫 시집 《르네상스》가 출간된다. 빈센트의 후원자들은 시집 출간에 맞춰서 낭송회 일정을 잡아 주었다. 스무 곳이 넘는 도시를 방문하며 30회 이상의 낭송회를 열었다. 신문은 그녀를 미국의 포잇 걸(poet-girl)이라고 불렀다. 이후 《엉겅퀴에서 나온 무화과(A Few Figs from Thistles)》(1920), 《또 다른 사월(Second April)》(1921), 그리고 《하프 짜는 여자의 노래(The Ballad of the Harp-Weaver)》(1922)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문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1927년 사코·반제티 사법살인 사건 이후 적극적으로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발표한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프로파간다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미정부의 프로파간다 조직인 전시작가연대(Writer's War Board)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36년 여름 자동차 사고가 있었다. 사고의 여파로 빈센트는 피아노를 치지도, 글을 쓰지도 못했다. 사고후유증 때문에 수술을 세 번이나 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1950년 집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시집 《눈 속의 수사슴(The Buck in the Snow and Other Poems)》(1928), 《치명적 인터뷰(Fatal Interview)》(1931), 《이 포도의 와인(Wine from These Grapes)》(1934), 희곡 <아리아 다 카포(Aria Da Capo)>, <한밤중의 대화(Conversation at Midnight)>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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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차일드 하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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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erick Childe Hassam
1859~1935.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미국의 도시와 해안을 주로 그렸다. 3,000점이 넘는 그림, 유화, 수채화, 에칭, 석판화 등을 제작했으며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품 및 공동품을 많이 소장한 성공한 사업가이며, 어머니는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엘 호손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드로잉과 수채화에 뛰어났으나 그의 부모는 초기에 그의 재능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나무조각가로 일했으며 1879년경부터 초기 유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선호하는 장르는 수채화였고 대부분 풍경화였다. 1883년 보스톤의 윌리엄스 에버렛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수채화를 전시했다. 다음 해, 그의 친구들의 권유로 중간이름 없이, ‘차일드 하삼(Childe Hassam)으로 활동했다. 또한 서명에는 항상 초승달 모양의 상징을 추가했는데, 그 의미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1886년 프랑스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구상적 드로잉과 회화를 공부했으며, 인상주의를 미국 미술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0년대 중반, 하삼은 도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스턴 커먼의 황혼(Boston Common at Twilight)」(1885)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미국의 미술평론가들의 반응은 냉담했으나 그는 크게 성공했고, 파리에서 생활하며 프랑스 예술가들과 교류하였다. 파리 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 칠레 등을 여행하며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미국 인상주의의 선도적 역할을 했지만, 신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로 전환될 때 뒤늦게 인상주의에 합류했다. 후기 작품 중에 가장 독특하고 유명한 작품으로는 ‘깃발 시리즈(Flag Series)’로 알려진 30여 점의 그림이 있다. 1916년 뉴욕 5번가에서 열린 미국의 세계1차대전 참전 퍼레이드에서 영감을 얻어 연작을 만들었다. 그중 「빗속의 거리」는, 2009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을 재정비하면서 걸어놓아 화제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에드워드 호퍼나 로버트 헨리 같은 사실주의파에 합류하기도 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인상주의 화풍이 부활하기 전까지, 하삼은 ‘비운의 버려진 천재’로 남았으나, 1970년대에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품들이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자, 하삼과 미국의 인상주의학파들은 다시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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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Henri
도시의 풍물을 사실적으로 그린 화가였고, 20세기 전반기 미국 화단을 주도한 애시캔 화파(Ashcan School)의 지도자였으며, 후배 화가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위대한 미술 교사였다. 1886년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일컬어지는 토머스 에이킨스(1844∼1916)의 제자 토마스 안슈츠(1851∼1912)에게 처음 미술을 배웠고, 그 후 파리로 건너가 쥘리앵 아카데미,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면서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을 알게 되었다. 1891년 26세의 나이로 미국에 돌아와 필라델피아 여자 디자인 학교의 강사가 되었다. 그의 새로운 미술 이론은 필라델피아 신문에서 삽화가로 근무하고 있던 젊은 화가들, 존 슬론, 에베릿 쉰, 조지 루크스, 윌리엄 T. 글랙큰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뉴욕으로 옮겨가 독립적인 그룹을 형성하면서 현대 미국 미술의 리얼리즘이 시작되었다. 헨리는 이들과 함께 8인 그룹을 결성하고 8인전을 개최했다. 8인전은 1908년 뉴욕시에서 딱 한번 개최되었으나, 20세기 미국 미술의 주된 흐름을 형성했다. 몇 년 뒤 그들은 애시캔 화파라는 더 큰 그룹으로 편입되었다. 이 화파에는 8인 이외에도 조지 벨로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국인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 글렌 콜맨, 유진 히긴스, 제롬 마이어스(1867∼1940) 등이 참여했다. 1908년 관변 아카데미와 완전히 결별하고 1913년부터 1928년까지 뉴욕시의 독립 미술학교인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9년 뉴욕시에서 6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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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제임스 휘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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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유럽에서 활약한 미국의 화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회화의 주제 묘사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여 차분한 색조와 그 해조(諧調)의 변화에 의한 개성적 양식을 확립했다. 매사추세츠주 로웰 출생. 어린 시절을 러시아에서 지내고 귀국 후 워싱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55년 파리에 유학하여 에콜드 보자르에서 마르크 가브리엘 샤를 글레르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러나 귀스타브 쿠르베의 사실주의에 끌리고 마네,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점차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젊었을 때는 군대를 동경하여 3년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성격과 그림을 좋아하는 본성을 따라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고, 1863년 파리의 낙선자 전람회에 [흰색의 교향곡 1번, 흰 옷을 입은 소녀]를 출품하여 화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 작품으로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로, 파리에 대한 혐오를 느껴 본거지를 런던으로 옮겼다. [회색과 검정색의 조화, 1번-화가의 어머니] 외에 [알렉산더 양]등 훌륭한 초상화를 남겼으며 1877년부터 [야경(夜景)]의 연작을 발표했다. 휘슬러는 그의 작품을 회색과 녹색의 해조(諧調) 라든가, 회색과 흑색의 배색 등 갖가지의 첨색으로 그렸으며, 색채의 충동을 피하여 작품에 조용한 친근감을 주고 있다.
1877년 [불꽃] 등을 선보인 개인전을 런던에서 열었을 때 J.러스킨의 혹평에 대해 소송을 일으켜 승소하였지만, 이는 몰이해한 군중을 한층 더 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휘슬러는 또한 작가이자 평론가인 오스카 와일드와도 교유하여, 그의 강연집이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그는 에칭에도 뛰어나 판화집도 출판했으며, 동양 문화를 모티프로 한 피코크 룸(현재 워싱턴의 프리미어 미술관으로 옮겨서 보존)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주요작품에 [흰색의 교향곡 1번, 흰 옷을 입은 소녀] [회색과 검정색의 조화, 1번-화가의 어머니] [검정과 금빛 야상곡] [녹턴 파란색과 은색-첼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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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Cowperthwait Eakins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이자 사진가, 조각가, 순수미술 교육자이다. 미국의 시각예술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명으로 평가되고있다. 그는 1870년대 초반부터 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주요 모델은 그의 고향인 필라델피아의 사람들이였다. 그는 여러 초상화도 그렸는데 주로 그의 친구나 가족 또는 예술, 과학, 의학 등에서의 주요한 인물을 그렸다. 초상화들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필라델피아의 지적인 삶을 보여준다. 대부분 생각하는 사람을 그렸다. 또한, 그는 많은 그림을 작업실이 아닌 거리, 공원 등 바깥에서 그렸다. 그는 주로 나체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동영상의 기술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었다.

그의 선생님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했다. 지도자로서, 그는 미국 시각예술의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미술가의 어려움이 그를 교육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행동과 성적인 모함으로 그의 평판은 나빠졌다. 그의 작품은 당시 큰 호응을 일으키지 못하였으나, 그가 죽고나서 그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사실주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 : 그랜마 모제스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그랜마 모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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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ma Moses,아나마리 로벗슨 모세스
나이 78세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 미국의 국민 화가로 추앙을 받게 된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세는 그녀의 별명으로, 그랜마 모세스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미국의 예술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나이에 처음 붓을 들어 그림을 시작한 그녀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사랑을 받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미술을 공부한적이 전혀 없었으나 10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00점의 그림을 세상에 남겼다.

그림 : 조지 캐틀린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조지 캐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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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Catlin
미국의 화가이자, 작가이면서 여행가이다. 주로 서부 개척 시대 당시에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전문으로 하였다. 1830년대, 미국 서부를 5번 동안 여행하면서, 인디언의 고유 영토에서 평원인디언을 그린 첫 번째 백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