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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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 Pegg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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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리
미국의 가수. 노스다코타주의 제임스타운에서 태어났다. 1941년부터 1943년 12월까지 베니 굿맨 악단의 가수로 활동하였으나, 1944년 1월에 독립하였다. 한때 은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재기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팝 가수로 활동하였다. 또한, 작사 및 작곡의 재능도 뛰어나 독특한 허스키 보이스와 교묘한 표현기교가 놀라울 정도이다. 그녀의 음반으로는 《블랙 커피》, 《조개껍데기》, 《뷰티 앤드 더 비트》, 《베이즌 스트리트 이스트》 등 많이 있다.

그녀는 보통적으로 대한민국 국내에서는 《Johnny guitar》라는 노래 작품을 오리지널로 불러 히트한 가수로도 널리 잘 알려져 있으며 미국 남성 가수 밥 에벌리(Bob Eberly)가 오리지널로 부른 노래 작품 《Let there be love》를 리메이크하여 대중적 히트한 가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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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Elvis Presley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노래 : Elvis Pres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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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얼마 전 폴 매카트니가 50년대 초기 로큰롤 역사에 헌정한 앨범 < Run Devil Run > 속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로큰롤이 첫 반세기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 멤피스의 선(Sun) 스튜디오로 한 트럭 운전사가 어슬렁거리며 들어가 혁명의 끈을 풀어놓은 지 거의 50년이다. 스타에 정신이 팔린 수만의 10대들처럼 그가 처음 엘비스를 들었을 때 기회는 리버풀시 알레톤의 제임스 폴 매카트니에게도 던져졌다.’ 오늘날 폴과 비틀스를 있게 한, 단 한사람의 영향을 꼽는다면 위 해설처럼 단연 트럭운전사출신 엘비스 프레슬리다. 존 레논은 이를 결정적 한마디로 축약한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affects me until Elvis)." 존과 폴이 만나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사실 엘비스의 음악을 더 강하게 표출해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로큰롤의 진정한 역사는 ‘시대의 풍운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개막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다. 물론 역사가에 따라 로큰롤의 효시를 행크 발라드(Hank Ballard)나 빌 헤일리(Bill Haley) 또는 척 베리(Chuck Berry)로 꼽기도 한다. ‘Work with me, Annie’ ‘Crazy man crazy’ ‘Maybellene’ 등과 같은 이들의 대표곡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구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다수 대중들은 여전히 로큰롤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엘비스가 나와서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빌보드지의 결론. ‘1953년 록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작 차트나 방송에서 그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싱글 ‘Heartbreak hotel’이 연속 8주 넘버원에 머물면서부터였다.’ 초기 로큰롤은 척 베리나 버디 할리와 같은 탁월한 ‘작가’를 소유했다. 리틀 리처드나 제리 리 루이스라는 출중한 ‘배우’ 그리고 조 터너, 보 디들리와 같은 ‘음악감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큰롤은 강풍을 휘몰아칠 역동적 ‘스타’가 필요했다. 그가 엘비스였다. 그 시대는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소화해줄 백인가수를 요구했고 엘비스는 백인대중들로부터 ‘저 친구는 백인이면서 왜 검둥이노래를 부르는 거야?’라는 의아함을 일으킬 만큼 탁월한 흑인감성의 보유자였다. 이러한 시의성은 그러나 일반의 인식처럼 56년 RCA 소속의 엘비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54년 선 레코드사의 엘비스로서 확립된 것이었다. 샘 필립스 사장의 전설적인 선 시절에 엘비스는 ‘That`s all right’, ‘Blue moon of Kentucky’ 와 ‘Mystery train’ 등을 부르면서 컨트리와 R&B를 크로스오버화한 신종의 로커빌리를 선보이면서 벌써 ‘웨스턴 밥의 왕’으로 불렸다. 이 때 이미 순회공연에서 팝 음악사상 초유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위크』는 ‘금세기 백년간의 스타’ 특집기사를 다루며 그의 등장을 ‘20세기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시 엘비스 백업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D.J. 폰타나는 54년 상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엘비스 무대가 끝나고 나면 노래를 따라해 줄 관객들은 다 빠져버려 아무도 없었지요. 애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 애들은 아마 우리 연주는 듣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처음으로 흔드는 가수’ 엘비스를 보고자 하는 것이었죠.” 로컬 무대에서 전국 네트워크 TV로 진출하면서 마침내 ‘엘비스마니아’는 폭발했다. 미국의 3대 전국 공중파 방송 ABC CBS NBC의 체제가 정립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는 텔레비전시대의 영웅으로서 ‘라디오스타를 죽이는’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미와 지미) 도시 브라더스의 CBS < 스테이지 쇼 >, NBC의 < 밀턴 벌 쇼 >와 < 스티브 알렌 쇼 > 그리고 저 유명한 CBS의 < 에드 셜리번 쇼 >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벌써 음악의 영상시대를 주도했다. 음악이 음반으로만 소구하던 시대는 ‘섹시 가이’ 엘비스의 출현으로 끝났다. ‘보는 음악’ 시대를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비스였다. 스탠다드 팝의 파수꾼 프랭크 시내트라도 자기 TV 쇼의 떨어지는 시청률을 참다못해 ‘음악의 공적(公敵)’이라고 성토해마지 않았던 엘비스를 출연시켜야 했다. TV 뿐만 아니라 영화 최초의 로큰롤 스타도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 러브 미 텐더 > < 러빙 유 > < G.I. 블루스 > < 블루 하와이 > 등 3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로큰롤의 열정과 록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의 호소력을 제공했다. 음반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하며 천하를 제패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정도의 막강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77년 사망하면서 그의 캐리어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무려 2억5천만장의 앨범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접근한 인물은 비틀스가 아닌 2억장의 빙 크로스비(캐롤 ‘White Christmas’가 결정적이다)며 프랭크 시내트라는 겨우 4천만장에 불과했다. ‘1인 기업’ 엘비스는 막대한 돈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핑크를 포함한 갖가지 칼라의 자동차 캐딜락을 구입했고 멤피스에 4만 달러 짜리 목장 그리고 10만 달러로 저택 그레이스랜드를 샀다. 전용 비행기는 물론 텔레비전 세트 그리고 첨단기계들도 마련했다. 물론 지금이야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엘비스와 같은 하층계급 청년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부의 상징들이었다. 동시대 그리고 후배가수들이 일개가수에서 기업으로 융기한 엘비스를 통해 신분상승과 스타덤 획득 욕구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엘비스처럼 슈퍼스타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버디 할리는 엘비스를 빅 스타로서 존경했고 밥 딜런의 음악동기는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톰 존스는 아예 영국의 제록스판 엘비스였다. 엘비스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그레이스랜드 담을 넘다가 제지당했고 그룹 퀸은 엘비스를 안중에 두고 50년대 로큰롤풍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만들었다(로저 테일러의 증언 “처음으로 텔레캐스터와 부기 앰프를 쓴 다소 빈약한 사운드였다. 분명 엘비스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었다.”). 마크 알몬드(Mark Almond)의 명쾌한 한마디를 들어보자. “그는 왕이다. 그밖에 다른 코멘트는 일체 필요없다!” 하지만 60년 전역 이후 엘비스는 달라졌다. 매니저였던 톰 파커 퇴역대령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음악방향이 빗나간 것이었다. 예의 로큰롤 넘버와는 거리가 먼 It`s now or never나 Surrender와 같은 감상적인 이탈리아 민요를 영역해 불렀다. 변화(아니면 변신?)의 징조는 프랭크 시내트라 쇼에 출연했을 때 뚜렷이 나타났다. 이 쇼에서 엘비스는 스탠다드 가수의 상징인 턱시도 정장을 했으며 호스트 프랭크 시내트라와 서로의 대표적 히트곡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이 시점을 계기로 엘비스가 로큰롤을 버리고 스탠더드 팝 가수로 돌아서 청춘진영을 배신했다는 주장이 고개를 비집는다. 명백한 훼절이라고 단정해도 선뜻 반대논리를 펴기 어렵다. 그러나 친(親)엘비스 측은 그로써 그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 승격하는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반박한다. 로큰롤만의 논리로 음악을 풀고 엘비스를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느냐는 것은 관련자의 이데올로기나 각 시대의 성격에 따를 수밖에 없다. 변절이든 성숙이든 이 점만은 분명하다. 엘비스의 보컬이 초기의 로큰롤가수로 한정되었을 때 과연 후대에의 보컬 영향력을 소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가창력은 음역, 에너지, 통제력, 피치 등 모든 면에서 압권으로 평가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지만 ‘멀티칼라’인 그의 보이스에는 자니 레이의 급격한 변색, 두왑 그룹인 잉크스파츠(Inkspots) 빌 케니의 테너, 딘 마틴의 솜사탕 그리고 마리오 란자의 풍미가 동거했다. 그러면서도 로이 오비슨과 같은 유니크한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스탠더드 발라드를 소화함으로 해서 우리들은 ‘Are you lonesome tonight’, ‘Suspicion’, ‘In the ghetto’, ‘The wonder of you’, ‘Fool’, ‘My boy’ 등의 팝 고전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유산이다. 그가 없었다면 성악가나 스탠더드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만을 접했을 것이고 로큰롤 싱어가 선사하는 발라드의 진미(珍味)를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공존공영 가능성을 그처럼 실감나게 시범한 가수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흑인감성의 전달로 로큰롤이 ‘흑백의 퓨전’임을 목소리 하나로 입증한 그는 이어서 역시 매직 보컬로 로큰롤과 스탠더드의 제휴를 일궈내는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우리가 70년대 록과 메탈 분야에서 형식을 확립한 이른바 ‘록발라드’라는 것도 그 원조는 엘비스일지도 모른다. 엘비스는 목소리를 통해 대중의 공감대를 전달한 몇 안 되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조한 보이스와는 거리가 먼, ‘이끼가 잔뜩 낀’ 풍부한 목소리였다. 아마 신나는 로큰롤 ‘Burning love’ 한 곡으로도 충분히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후대 음악팬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더러 ‘느끼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후반기의 노래 가운데는 그런 요소를 풍기는 곡이 있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기서 느끼함이 아닌 되레 ‘풍성한 감성’을 수혈 받곤 한다. 미트 로프(Meat Loaf)는 말한다. “엘비스는 노래하는 것 무엇이든지 감정적으로 가사로 스피릿을 감상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희구했던 명성과 부를 얻고 난 뒤 아쉽게도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 데도 나갈 수가 없었고 편안히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60년대나 70년대 로커였다면 이런 사실상의 ‘수감생활’을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래적 반항아’가 아니었다. 스타덤의 고독과 소외에 차츰 무너져간 그의 말년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70년대 들어서 조울증이 불거진 그는 때로 격렬해져 텔레비전 세트나 당구대, 주크박스, 자동차 등 가장집기를 부수는 발작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D.J. 폰타나와 그의 아내 앞에서 엘비스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이렇게 토로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난 엘비스인게 너무 지겨워요! 뭘 해야될 지를 모르겠어요. 뭔가 딴 일을 했으면 제발 한이 없겠어요.” 고고음악의 대명사인 자니 리버스의 해석. “엘비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래야만 했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일이란 없었지요.” 엘비스만큼 화려한 명성과 처절한 고독이라는 양극단을 겪은(아니면 겪기로 강제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욕의 교차요, 희비의 쌍곡선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우리는 슈퍼스타덤의 빛 외에 냉혹함과 잔인성이라는 그림자를 동시 확인한다.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후 마약중독 비만증 그리고 자살 등 정황에 근거한 갖가지 설들이 난무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이 얼마나 철저히 비공개로 갇혀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스스로 창조한 혁명에 쓰러진 순종파 가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에 의해 그의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는 일은 없다. 여전히 그는 만인이 공감하는 ‘킹 오브 로큰롤’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 가수’다. 비틀스가 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엘비스의 가치는 입증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로 더러 지적되지만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ster Bangs)의 엘비스 예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동의를 앞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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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Paul Anka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노래 : Paul A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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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앵카
‘Diana’의 주인공 폴 앵카(Paul Anka)는 소녀 취향의 팝과 스탠다드 풍의 노래들로 1950년대 후반 전 세계의 ‘오빠부대’를 지휘했던 가장 인기 있는 틴 아이돌 스타였다. 1957년 왜소한 체구를 소유한 폴 앵카의 데뷔 싱글 ‘Diana’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You are my destiny(7위)’, ‘Crazy love(19위)’, ‘Puppy love(2위)’, ‘Lonely boy(1위)’, ‘Put your head on my shoulder(2위)’, ‘It’s time to cry(4위)’등이 내리 차트를 강타하면서 그의 시대가 화려히 전개되었다. 이 곡들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드러운 멜로디는 물론, 소녀들의 가려운 데까지 손을 뻗쳐 그들의 감수성을 포착해냈기 때문이었다(그는 전곡을 직접 작곡하고 작사하는 당시의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당연히 소녀 팬들의 열렬한 지지가 뒤따랐으며 동시대의 로큰롤 가수들을 못미더워 했던 부모들은 폴 앵카에게만은 안심했다. 1950년대 후반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로큰롤 가수들과는 달리 그는 반듯하고 예의바른 이미지로 자신을 가꾸어 당시 부모님 세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같은 시기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나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척 베리(Chuck Berry)보다는 팻 분(Pat Boone), 릭키 넬슨(Ricky Nelson), 닐 세다카(Neil Sedaka)처럼 점잖고 단정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1941년 7월 30일,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아랍계 시리아인의 이민자 2세로 태어난 폴 앵카는 어려서부터 넘쳐흐르는 음악적인 끼를 주체할 수 없어 14살 때 캐나다판 ‘전국 노래 자랑’에 참가하기 위해 부모님의 차를 몰래 몰고 몬트리올까지 진군한 전과도 있었다. 그의 이러한 적극성은 훗날 그가 10대 스타를 거쳐 싱어 송라이터, 영화배우, 음반 제작자, 사업가 등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보모를 모델로 하여 16살 때 작곡한 ‘Diana’는 이 캐나다 가수의 데뷔 곡이었음에도 북미 지역과 영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면서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했음을 알린 기념비작이다. 그리고 이후의 소나기성 히트 퍼레이드로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히 다져졌다. ‘Puppy love’는 1970년대 가족 그룹 오스몬즈(The Osmonds)의 막내 도니 오스몬드(Donny Osmond)가 리메이크해 3위에 랭크 시키면서 다시 한번 틴아이돌 세대의 명곡임을 입증했고, ‘Put your head on my shoulder’는 1990년대 후반 국내의 샴푸 CF에 쓰여 옛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는 가수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서 멋진 노래들을 만들어 준 음악적 동지로서의 역할도마다하지 않았다. 모범생 스타일의 천재 로큰롤러 버디 홀리(Buddy Holly)의 ‘It doesn’t matter anymore(13위)’와 정력적인 싱어 톰 존스(Tom Jones)의 신나는 넘버 ‘She’s a lady’(2위 - 리차드 샌더슨의 발라드와는 다른 곡),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위해 프랑스의 샹송 ‘Comme d’Habitude’를 개사한 ‘My way’, 자신이 직접 출연하기도 한 전쟁 영화 < 지상 최대의 작전 >의 주제가인 ‘The longest day’, 그리고 TV 토크쇼의 대명사로 자니 카슨(Johnny Carson)이 진행한 < 투나잇 쇼 >의 타이틀곡까지 그에게는 음악에 대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매일 밤 방송된 < 투나잇 쇼 >와 불후의 명곡이 된 ‘My way’만으로도 그는 막대한 로열티를 받았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왕년의 틴아이돌 스타는 환경이 변한 음악 시장에 적응해 재도약에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제목 때문에 방송금지 곡으로 묶였던 ‘(You’re) Having my baby’로 다시 한번 싱글 차트를 수복했고 ‘One man woman/One woman man(7위)’과 ‘I don’t like to sleep alone(8위)’, ‘Times of your life(7위)’ 모두 탑 텐을 기록하면서 꺼지지 않는 작곡 역량을 과시했다. 이 때가 제2의 전성기였다. 특히 1986년 이장호가 감독한 영화 < 공포의 외인구단 >의 주제곡으로 정수라가 부른 ‘난 너에게’는 ‘I don’t like to sleep alone’을 표절한 것으로 판명되어 ‘난 너에게’는 방송 및 판매가 금지되었다. 이 불세출의 남성 가수 노래들 중에서 ‘Happy’와 ‘Papa’는 외국 차트와는 상관없이 국내 팝 팬들에게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1970년대 팝 팬들 가운데 ‘Papa’의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이 곡과 데뷔작 ‘Diana’는 심지어 우리말로 번안되기도 해, 팝송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의 노래는 무의식적으로 입력되어 있다. 데뷔한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치지 않고 음악 활동을 하는 그는 1990년대 중반 내한해 디너쇼 공연을 가져 우리의 기성세대들로 하여금 흥겨운 회상에 젖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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