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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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 West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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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라이프
아일랜드 남성 5인조 웨스트라이프는 비슷비슷한 보이밴드들의 범람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영역을 굳건히 마련한 그룹이다. 5명의 멤버가 유려한 하모니로 아름다운 발라드 중심의 팝 음악을 들려준다. 이들의 ‘특화’된 발라드는 댄스음악 중심인 여타 보이밴드들과 구별되게 한다. 이들의 차별화 전략은 천편일률적인 댄스음악에 둔감해진 음악팬들에게 신선한 청량제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소녀 팬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특히 발라드를 선호하는 국내에서는 가히 절대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인기도는 보이밴드 계의 ‘절대강자’ 백스트리트 보이스나 엔싱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차트성적도 화려하다. 영국에서 지금껏 이들이 발표한 7장의 싱글은 연거푸 차트정상을 차지했다. 이는 비틀스도 감히 달성하지 못했던 대기록이다. 팬 층을 10대에서 20대 이상까지 끌어올린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기대치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그룹이 웨스트라이프다. 브라이언 맥파든(Bryan McFadden), 키언 이건(Kian Egan), 마크 필리(Mark Feehily), 니키 번(Nicky Byrne), 셰인 필런(Shane Filan)으로 구성된 웨스트라이프는 원래 3인조로 출발했다. 6인조 그룹으로 활동하던 키언과 마크, 셰인이 보이존의 매니저였던 루이스 월시에 의해 처음 발탁되었다. 월시는 이들을 보이존의 로넌 키팅에게 소개시켜줬고, 곧 이 둘은 매니저가 되어 웨스트라이프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로넌 키팅의 제안으로 브라이언과 니키를 영입해 완전한 라인업을 갖춘 웨스트라이프는 1999년 셀프타이틀 데뷔앨범 [Westlife]을 발표했다. 그해 5월에 발매한 첫 싱글 ‘Swear it again’은 곧바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앞서 말한 대로 이 싱글을 필두로 7장의 싱글이 연속 차트정상에 오른다. 2000년에 내놓은 2집 [Coast To Coast] 역시 차트를 정복하며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발라드 외에 이들의 또 하나의 특기는 리메이크다. 이 점은 아일랜드의 선배 그룹 보이존과도 닮은꼴인데, 이들은 주옥같은 팝의 명곡들을 웨스트라이프 식으로 재해석해 옛 추억을 자극하고 있다.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 필 콜린스의 ‘Against all odds’, 아바의 ‘I have a dream’, 킹스턴 트리오의 원곡으로 테리 잭스가 히트시켰던 ‘Seasons in the sun’을 깔끔하게 재생시켰다. 이들은 수많은 보이밴드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프로듀서들에 의해 다듬어졌다. 이들의 전담 프로듀서 스티브 맥(Steve Mac)과 웨인 헥터(Wayne Hector) 외에 ‘틴 팝 히트제조기’ 맥스 마틴, 브리트니 스피어스, 엔 싱크에게 곡을 써줬던 라미, 역시 브리트니 앨범에 참여했던 페르 매그누손(Per Magnusson) 등이 웨스트라이프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이처럼 프로듀서에 의존도가 높은 보이밴드의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지만 이들은 거기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해맑은 감성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보이밴드로서 음악팬들에게 더 없는 만족을 주는 웨스트라이프는 충분히 나름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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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Charlotte Church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노래 : Charlott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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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처치
1990년대 중반 이후 팝계에 불어닥친 10대 열풍의 흐름은 클래식까지 그 손을 뻗쳤다. 10대들이 창출해낸 거대한 상업적 성공이 클래식 분야마저 자극한 것으로, 상업적 클래식 뮤지션을 물색하던 소니 클래식은 샤롯 처치(Charlotte Church)라는 보석을 발굴해낸다. 12살 소녀 소프라노의 등장이었다. 1986년 웨일즈(Wales)의 카디프(Cardiff)에서 태어난 샤롯 처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3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대중 앞에서 노래하며 타고난 재주를 뽐냈다고 한다. 어린 시절 TV 노래 경연대회 등을 통해 남다른 재주를 선보였던 그녀는 런던 팰러디움(the London Palladium), 로얄 알버트 홀(the Royal Albert Hall)등에서 노래하며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 때 나이 겨우 10살 무렵이었다. 서서히 재주가 일반에 회자되면서 소니 클래식이 그녀에게 손을 뻗쳤고, 마침내 ‘클래식 아이돌’이 탄생한다. 1998년 데뷔 앨범 < Voice Of An Angel >은 분명 상업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귀엽기 그지없는 앨범 커버, ’Ave Maria’, ’Pie Jesu’와 같은 친숙한 곡들... 클래식을 어렵게 여기던 대중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녀의 이름은 여성 소프라노였지만 그러한 친화력 때문에 팝계에서도 거론되었다. 소니의 공략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대중성 확보는 물론 어린 나이, 뛰어난 외모 덕분에 앨범은 영미시장을 강타했고, 데뷔 앨범은 물론 1999년 작 < Charlotte Church >, 2000년 크리스마스 앨범 < Dream A Dream >에 이르기까지 영국 차트에서 톱10의 성공을, 미국 시장에서도 플래티넘의 기염을 토했다. 귀여운 이미지로 성공을 이어가던 샤롯 처치는 2001년 < Enchantment >에서 농익은 여인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세대를 아우르는 클래식 스타로서의 기치를 확고히 했다. 데이빗 포스터(David Foster)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샤롯 처치에게 거는 상업적 기대가 얼마나 큰 것인가는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린 나이에 큰 상업적 성공을 경험하고, 자본의 논리에 편승한 아직 그녀의 나이 10대이다. 훌륭한 오페라 가수를 꿈꾸고 있고, 타고난 능력 또한 출중하다. 좀 더 성장하고, 홀로 설 수 있을 때 분명 샤롯 처치라는 이름은 더욱 광채를 발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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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 Cranberries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밴드 : Cranber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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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베리스
멤버 :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 퍼갤 로울러(Fergal Lawler, 드럼), 노엘 호건(Noel Hogan, 기타), 마이크 호건(Mike Hogan, 베이스)

1992년 10월 데뷔 싱글 ‘Dreams’를 발표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크렌베리스가 올해로 데뷔 10년을 맞이했다. 1991년 10월 내놓은 EP < Uncertain >부터 치면 11주년이 되는 해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시간동안 그들은 단 한차례의 라인업 변화와 기복 없이 논스톱 여정을 해왔다.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3,300만장이 팔려나간 4장의 정규 앨범 공개, 그 후속타로 전개된 지칠 줄 모르는 월드 투어와 각종 인터뷰, 그리고 자선공연 참여 등등 그들은 자신을 버리고 오직 크렌베리스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했고, 헌신했다. 아일랜드 서부의 조그만 마을 라임릭(Limerick)의 동네 꼬마 녀석들에서 월드 스타로 훌쩍 커버린 그들은 이제 자신들을 돌아보려 한다. 그리고 10년은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잠시 짬을 내어 과거를 회고하고 또 다시 새 출발 할 수 있는. 이번에 선보이는 신보 < Wake Up And Smell The Coffee >는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아일랜드의 서정과 비애] 부침이 심한 대중 음악계에서 크렌베리스는 아주 성공적인 행보를 거듭해오고 있는 팀이다. 시류에 휩쓸려 등장한 수많은 밴드들이 도태되고, 좌초되는 비정한 음악세계 속에서 그들은 독특한 팝/록 사운드로 꾸준한 인기를 누려왔다. 여기서 말하는 ‘독특함’이란 바로 그들의 조국 아일랜드의 분위기를 일컫는다. 영원한 신비의 장소이자 비극의 참호 아일랜드. 그 빛과 어둠의 그림자를 크렌베리스는 고스란히 품고 있다. 아름답고 서정적이면서, 한편으론 슬프고 절망적이다. 그들의 음악은 스미스(The Smiths)의 징글쟁글 기타 팝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안에 아이리시 포크와 켈틱 민요 등을 은근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게끔 녹여낸다. 때문에 밴드가 표현해내는 아일랜드는 드러내고 과시하기보다는 깊게 감춰두고 서서히 향기를 풍김으로써 신비롭고 애잔한 느낌을 들게 한다. 날카롭고 폭발적인 힘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매혹적인 천상의 목소리를 뽐내는 홍일점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 1971년 9월 6일 생)의 보컬과 선명하고 찰랑거리는 톤을 뽑아내는 노엘 호건(Noel Hogan, 1971년 12월 25일 생)의 기타가 아일랜드의 서정과 비애를 그려내는데 일등 공신임은 물론이다. 그들을 세계적인 그룹으로 만들어준 ‘Linger’, ‘Ode to my family’, ‘Zombie’ 등의 히트곡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노랫말도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아일랜드의 현실을 그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아일랜드의 분단과 전쟁을 가사에 실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선배 그룹 유투(U2)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신의 머리 속에서/ 당신의 머리 속에서 그들은 탱크와 폭탄을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당신의 머리 속에서/ 당신의 머리 속에서 그들은 울부짖고 있어요’ -1994년 2집 < 다툴 필요 없어(No Need To Argue) >의 수록곡 ‘Zombie’ 중에서- 크렌베리스는 언뜻 보아도 심상치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곡에 대해 < 롤링스톤 >과의 인터뷰에 "좀비는 IRA 폭탄에 의해 두 명의 어린이가 죽은 영국 워링턴 폭파 사고에 대하여 쓴 노래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자신들의 조국 아일랜드의 상황에서 불붙기 시작한 그들의 가시도친 시선은 점차 지구촌의 문제로 확대됐다. 1996년 3집 < To The Faithful Departed >에 수록된 ‘War Child’, ‘Bosnia’ 등이 대표적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보스니아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아이들에 대한 곡들이다.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가 주최한 보스니아의 전쟁 고아를 돕기 위한 자선 공연에 참여하여 ‘아베마리아’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바로 어린이들입니다. 그들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모든 곡들이 냉소적이고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잠시 떨어져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노래(Ode to my family), 함께 현실을 헤쳐나가자는 화합의 노래(Animal instinct) 등 강고한 서정으로 둘러싸인 노랫말도 있다. 스케치가 될 듯 하면서도 곧바로 사라져 버리는 안개 속에 숨겨진 아일랜드의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모습을 크렌베리스는 음악과 가사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0년간의 논스톱 여정] 크렌베리스는 1989년 아일랜드의 라임릭에서 기타리스트 노엘 호건과 베이시스트 마이크 호건(Mike Hogan, 1973년 4월 29일 생) 형제,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드러머 퍼걸 롤러(Fergal Lawler, 1971년 3월 4일)와 보컬리스트 나이올 퀸(Niall Quinn)에 의해 결성됐다. 당시 그룹명은 크렌베리 소 어스(The Cranberry Saw Us). 밴드는 1년 뒤인 1990년 음악적 견해차로 퀸이 탈퇴하고, 그가 소개시켜? 낭랑 18세의 매력적인 처녀 돌로레스 오리어던이 가세하면서 완벽한 짜임새를 갖췄다. 돌로레스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교회 성가대, 음악 페스티벌 등에 참가하며 노래 실력을 키워왔으며, 12살이 되던 해에는 ‘Calling’이라는 곡을 작곡하는 등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왔다고 한다. 라임릭, 더블린의 클럽 등에서 공연을 하며 음악 내공을 쌓아가던 그들은 같은 해 프로듀서 피어스 길모어(Pearse Gilmore)를 매니저 겸 프로듀서로 영입하고 < Nothing Left At All >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진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여 메이저 레이블들에 보냈다. 1991년 여러 레코드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 아일랜드 >와 여섯 장의 앨범 계약을 체결한 그들은 첫 결과물로 EP < Uncertain >을 공개했다. 하지만 미니 음반은 크렌베리스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는 ‘불확실한’ 부분이 있어 그들은 곧바로 데뷔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불화로 인해 매니저를 < 러프 트레이드 레코드(Rough Trade Records) >의 창립자 제프 트래비스(Geoff Travis)로 교체하고, 스미스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를 프로듀서로 맞이하여 제작한 1993년 1집 < Everybody Else Is Doing It, So Why Can’t We? >에 수록된 발라드 넘버 ‘Linger’(미국 차트 8위)의 스매시 히트로 인해 데뷔와 동시에 세계적인 지명도를 획득했다. 이러한 그들의 초고속 행진은 1994년 소포모어 앨범 < No Need To Argue >, 1996년 세 번째 앨범 < To The Faithful Departed >의 연속 히트퍼레이드로 반짝 인기가 아님을 여실히 증명됐다. ‘Ode to my family’, ‘Zombie’, ‘I can’t be with you’, ‘Ridiculous thoughts’, ‘Salvation’, ‘Free to decide’, ‘When you’re gone’ 등이 영국과 미국 차트에서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정상의 위치에 선 대가로 크렌베리스는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그들이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주위에서 짓누르는 압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보다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들을 옥죄어왔고, 쌓아올린 록 스타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들의 뇌리를 압박했다. 쉬지 않고 앨범 홍보와, 콘서트, 각종 행사 등에 참석하며 인기의 끈을 놓지 않으려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들은 지쳤다. "우리는 삶이 없다. 밴드가 우리의 삶이었다." 3집 공개 직후 노엘 호건의 말이다. 크렌베리스의 삶은 있을지라도, 멤버 개개인의 삶은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오아시스(Oasis), 블러(Blur) 등이 주도한 브릿 팝의 거대한 물결도 그들을 위축시키는데 한몫 했다. 영국을 뒤덮고 세계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새로운 음악 무브먼트에 대항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 보컬리스트 돌로레스가 솔로로 전향할 것이라는 루머가 불거져 나온 시점도 이때여서 톱 클래스 밴드가 짊어져야 할 시련을 한꺼번에 맞닥뜨려야 했다. 결국 멤버들은 잠시나마 자연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에 안겼다. 그들이 결정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노엘은 "우리는 변화를 위해 집이 필요했고, 평범한 삶을 원했다."고 했고, 돌로레스 역시 "우리는 집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며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언급했다. 1996년 3집 발표이후 후속 앨범 < Bury The Hatchet >이 3년이 지난 1999년에서야 공개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킷 사진의 변화, 사운드의 록 필 강화 등 여러 모습을 취하고 있는 4집은 전세계 17개 국가에서 앨범 차트 1위라는 기염을 토해냈고, 6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 오랜 공백으로 인한 크렌베리스의 불안감을 말끔히 해소시켰다. 모든 것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간 그들의 과감한 결단이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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