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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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 David Bow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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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
무차별 변신으로 일관해온 록의 순례자 1947년 영국 런던의 브릭스턴 태생인 데이비드 보위는 애청곡이 많은 뮤지션은 아니다. 이름도 꽤 알려졌고 차트 활동도 부진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감에 맞는 음악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인기곡 하나 남겨 놓지 못했다. 그러나 영미 록 역사에서, 특히 1970년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로 기록된다. 이른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는 1969년 미국에서 아폴로 11호가 사상 최초로 달에 착륙했을 때에 맞춰 공상 과학(SF)의 환상을 실은 ‘우주의 괴짜(Space oddity)’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는 불세출의 걸작 앨범 < 지기 스타더스트와 화성에서 온 거미들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Spiders From Mars) >을 통해 남녀 일체의 파격을 선보이며 진보적인 록 뮤지션으로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 동성이자 초월자인 ‘지기’로 분해 무대의 시각적 충격을 강조했으며 현상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상화했다. 흔히 ‘자극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70년대와 맞물린 이러한 퍼스낼리티 설정은 즉각 록의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되었다. 그것이 ‘글램 록’ 또는 ‘글리터 록’이란 것이었다. 그는 가수가 노래하는 사람, 무대가 노래하는 장소라는 등식과 관념을 넘어섰다. 화려하고 원색적인 화장에 반짝거리는 의상을 하고 나와 무대에서 노래할 뿐만 아니라 ‘연기’를 했다. 그것은 자극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는 1972년 “지금 충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극단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팬들이 지기의 이미지를 오용하여 반사회적인 폭력을 일삼게 되자 곧바로 지기의 탈을 벗어버렸다. 이 시점부터 그는 어느 것 하나에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개(Diamond dogs)’로 예언자가 되는 듯 하더니 ‘로우(Low)’에서는 은둔자로 변신했으며 나중에는 ‘야윈 백인공작(Thin white duke)’으로 탈바꿈했다. 음악도 이곳 저곳을 넘나들었다. 하드한 기타록을 하다가 소울 음악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전자 음악도 했고 심지어 디스코 댄스 음악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볼 때 그는 새로운 것에 과감히 가슴을 열어 끊임없는 혁신을 이룩한 음악인이었다. 데카당적인 틀은 유지했지만 그 속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예술적 보헤미안’임을 의도적으로 나타냈다. 하지만 ‘한 우물 파기’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그를 ‘뿌리 없는 실험 병자’로 ‘음악적 곡예사’로 배격했다. 그가 펼쳐 놓은 무수한 장르의 파편들과 끝없는 변신의 행적을 보면 카멜레온이요, 기회주의자였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과연 이같은 무차별 변신을 두둔해야 하는가. 그러나 록계에서는 그의 음악이 언제나 예측 불허였으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30년간 록계에 몸담으면서 오로지 실험 정신으로 일관해 온 순례자로 떠받드는 것이다. 그는 1993년 AP통신과의 회견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내가 한 것을 동료들과 비교할 때 나를 모험적인 작가로 생각한다. 난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체질적으로 싫다. 그래서 악평이 나오기도 한다... 난 스튜디오에 들어가 머릿속에 담은 구체화된 아이디어가 내 자신을 놀라게 하는지를 본다. 밖에서 누군가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곡을 쓴다.” 그의 곡예는 대중의 기호를 쫓은 상술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성을 자극하는 것, 바로 그 점에 봉사했다. 즉 ‘예술적 동기’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형상화해 온 셈이다. 이처럼 록예술에 집착한, 그리고 진보적인 뮤지션의 음악은 대중의 폭넓은 사랑과는 대부분 무관하다. 음악적으로 볼 때도 곡조나 편곡에 있어서 일반적인 패턴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빌보드 차트 1위곡을 두 곡이나 보유하고 있다. 예술의 개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가 때로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반증이다. 때문에 1위곡들인 ‘명성(Fame)’이나 ‘춤을 춥시다(Let’s dance)’는 그다지 호평을 받는 편이 아니다. 특히 디스코 리듬에 전자 댄스 음악적 요소가 전면화된 ‘춤을 춥시다’는 노골적으로 상업성을 겨냥, 보위의 골수 팬들을 실망시켰다. 1977년 < 로우 >앨범 발표 당시 “되도록 이 앨범이 팔리지 않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그를 전제할 때 그것은 명백한 일탈이었다. 그는 ‘춤을 춥시다’의 성공이 너무 거대했던지 이후 그 그림자에 가려 주류에서 급격히 멀어졌다. 줄기차게 앨범을 내놓았지만 상업적 성과도 내리막길을 달렸고 평자들의 호의도 식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그 자신도 그때의 성공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1995년 < 뉴욕 타임스 >지에 “‘춤을 춥시다’로 빅히트를 한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난 대중적인 인기를 누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내가 풍선껌 포장지와 같은 처지에 서게 된 느낌이었다.” 라고 술회했다(가끔 목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서구 록스타들은 반성도 참 잘한다!). 그는 이때 2년만에 이색적인 앨범 < 아웃사이드(Outside) >와 함께 컴백했다. 이색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편의 심리적인 추리소설을 사운드트랙화 했기 때문이다. ‘나단 애들러의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앨범은 기괴한 10대 소년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사립 탐정과 그 주변 용의자들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 이 ‘예술적 추리 사건’의 진상은 1999년 발매될 마지막 앨범에서 규명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 아웃사이드 >앨범은 시리즈의 첫편인 셈이다. 데이비드 보위는 이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한 때 명콤비였던 걸출한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와 다시 손을 잡았다. 그것은 1980년대의 부끄러운 상업적 성공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비상업적’인 과거의 면모를 회복하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즉흥성이 중시된 연주나 몽환적 부유(浮遊)의 분위기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마치 ‘안 팔려도 그만’이라는 당당함이 배어 있는 음반이다. 그는 인기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자세를 되찾음으로써 ‘영원한 로커’임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록이란 게 원래 그런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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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 Dusty Spring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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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티 스프링필드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에 그녀의 노래 ‘The look of love’가 삽입되어 애청되면서 국내의 신세대 팬들과도 친숙해졌다. 1939년 영국 런던에서 메리 이사벨 캐서린 버나데트 오브리엔(Mary Isabel Catherine Bernadette O’Brien)이란 본명으로 태어나 1958년 3인조 보컬 그룹 라나 시스터스(Lana Sisters)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으며 1960년에는 오빠 디온(Dion), 그의 친구 팀 페일드(Tim Feild)와 함께 더 스프링필즈(The Springfields)를 결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로 개명하고 오빠 디온도 팀 스프링필드로 이름을 바꾸며 이듬해 ‘Dear John’으로 데뷔한 스프링필즈는 처음에 차트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1961년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 독자 선정 영국 최우수 보컬 그룹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63년 발표한 싱글 ‘Island of dreams’와 ‘Say I won’t be there’가 잇따라 영국 차트 5위에 오르면서 인기 그룹으로 비상한다. 하지만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점에 더스티 스프링필드가 솔로활동을 선언하면서 그룹은 해체를 맞는다. 이미 그룹을 통해 풍부한 음색과 가창력을 대중에게 알린 터라 솔로활동은 순풍에 돛단 듯 시작부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허스키하면서 소프트한 느낌은 로큰롤 밴드가 맹위를 떨치던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대에 드물게 여성 솔로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처음부터 그녀는 단순한 팝이 아닌 ‘미국적인 소울’의 필을 표현했다. 작곡 팀 마이크 호커와 이보르 레이먼드는 미국 흑인음악의 상징인 모타운 식으로 쓴 곡 ‘I only want to be with you’로 그녀에게 차트4위(미국 12위)라는 좋은 성적을 안겼다. 이 곡은 얼마 전 국내 칼라핸드폰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으며 1976년에는 비틀스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영국의 틴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즈(Bay City Rollers)가 리메이크해 친숙해지면서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는 이어 역시 호커와 레이먼드 컴비가 써준 ‘Stay awhile’로 차트13위에 올랐으며 틴 팬 앨리 전통을 계승한 전설적 작곡 콤비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와 할 데이비드(Hal David)가 만들어준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와 함께 3위로 다시 상위권을 점령했다. 디온 워릭(Dionne Warwick)을 키워낸 이들은 영국 여가수로서 드물게 스탠더드와 소울 감성을 동시에 간직한 그녀를 높이 평가해 디온 워릭이 취입했던 곡 ‘Wishin’ and hopin’’을 제공, 마침내 미국차트 6위에 올려 미국에서도 통하는 가수로 만들어 냈다. 이 때 더스티는 뉴욕에 건너와 녹음하면서 영미(英美)를 관통하는 명실상부한 대서양 스타로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Wishin’ and hopin’’에 이어 ‘All cried out’(41위)은 심지어 미국에서만 싱글로 발표되었다. 1964년이 저물어 가던 겨울 오빠 팀 스프링필드가 쓴 곡 ‘Losing you’으로 영국 차트 9위(미국91위)에 오른 그녀는 1965년과 1966년에도 쾌조를 보여 훗날 팝 보석으로 널리 애청된 ‘In the middle of nowhere’(영국8위)와 명콤비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쓴 발라드 ‘Some of your lovin’ (영국8위) 그리고 ‘Little by little’(영국17위) 등을 줄줄이 내놓았다. 이 시점에 꼭 기억해야 할 곡은 더스티의 것으로서는 가장 많이 팔렸으며 아직까지 라디오를 통해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엘비스 프레슬리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로 이 곡은 영국차트 정상에 이어 미국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다시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준 ‘Goin’ back’(영국10위)과 ‘All I see is you’(영국9위, 미국20위) 두 곡을 더 히트시킨 그녀는 이 두 곡이 담긴 베스트 앨범 < Golden Hits >를 차트에 6개월 동안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러한 성공으로 국제적 팝 스타로 도약, 영국 BBC 텔레비전의 음악프로 MC로 뽑히기도 했다. 당시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지의 여론조사에서 최우수 영국 여가수와 최우수 국제 여가수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1967년 들어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그녀의 국제적인 명성이 더욱 확산된 가운데 ‘I’ll try anything’(영국13위, 미국40위)이 히트했고, 바카라크와 데이비드 콤비의 곡으로 007영화 < Casino Royale >의 삽입곡인 ‘The look of love’ 또한 미국에서 22위에 올라 변함 없는 인기를 과시했다. 이 곡은 30여 년이 지난 1996년 한국영화 < 접속 >에 삽입되어 천지를 진동시켰다. 1968년에는 팝 명반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 Dusty in Memphis >를 발표한다. 미국의 소울의 도시 멤피스에서 녹음한 이 앨범은 ‘팝과 소울’의 절묘한 결합으로 빠짐없이 여성 팝 보컬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또한 더스티의 음악을 ‘블루 아이드 소울’로 일컫게 하는데 결정타가 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 Dusty in Memphis >에선 미국 10위를 기록한 ‘Son of a preacher man’를 비롯해 ‘Don’t forget about me/Breakfast in bed’ ‘The windmills of your mind’(스티브 매퀸이 주연한 영화 < Thomas Crown Affair >의 주제곡으로 1999년에 영화가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으로 리메이크되면서 이 곡도 스팅의 노래로 리메이크됐다)가 연속 싱글로 나왔지만 비평적 찬사만큼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70년 발표한 앨범 < A Brand New Me > 이후 그녀의 활동과 인기는 눈에 띄게 후퇴했으며 1972년 < See All Her Faces >와 이듬해 < Cameo >는 차트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곧 사라져 버렸다. 이후 긴 휴식기를 마치고 1978년 < It Begins Again >, 1979년 < Living Without Your Love >, 1982년 < White Heat > 앨범을 발표하는 등 다시 왕성한 활동을 펼쳤지만 자신의 앨범보다는 딴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한 곡들에서 인기를 누리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1984년에는 스펜서 데이비스(Spencer Davis)와 ‘Private number’를 불러 인기를 얻었고, 1987년에는 카펜터스의 리처드 카펜터(Richard Capenter)의 앨범에서 ‘Something in your eyes’를 불러 건재함을 과시했다. 바로 직전 1987년 펫 샵 보이스(Pet Shop Boys)와 호흡을 고른 곡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는 그녀의 재기를 몰고 온 기폭제가 됐다. 평소 더스티 스프링필드를 존경해 온 펫 샵 보이즈의 초청으로 참여해 고수(高手)의 멜로디 파트 가창력을 시범한 이 곡은 영국 차트2위를 기록한 데 이어 미국차트도 강타, 역시 2위를 밟았다. 이 곡의 대성공과 함께 다시금 자신의 솔로 히트곡들을 생산, 1989년 역시 펫 샵 보이스가 만들어 준 영화 < Scandal >의 삽입곡 ‘Nothing has been proved’를 영국차트 16위까지 올렸으며, 같은 해 ‘In private’도 14위에 랭크시키며 관록의 힘을 과시한다. 펫 샵 보이스가 4곡을 맡은 1990년 앨범 < Reputation >도 차트38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50살 초로(初老)에도 활동의 가속페달을 밟으며 노익장을 과시한 그녀는 1995년에도 < A Very Fine Love >를 발표했지만 얼마 후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병이 호전되어 가던 1999년 3월 그녀는 엘튼 존과 함께 로큰롤 명예전당에 이름을 올린 지 10일 후에 암이 재발하면서 6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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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Nina Simone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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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시몬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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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픈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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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 보이스
비치 보이스는, 파도타기 놀이인 서핑의 즐거움을 담은 노래로 유명한 팝 그룹이다. 이들이 60년대 초반에 발표한 노래 ‘서핑 USA’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전파를 탄다. 이들이 ‘록 역사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66년에 발표한 < 펫 사운즈(Pet Sounds) >가 있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독집이라 해도 무방한 이 앨범은 서프 음악의 종언을 알리기라도 하듯 갖가지 새로운 시도를 선보여 당시 팝 음악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브라이언은 더빙 반복을 통해 이 앨범의 사운드를 놀라울 만큼 두껍게 했고 종소리, 경적소리, 외침 같은 효과음을 많이 응용했다. 사람들은 이 같은 기술적 개가를 접하고 스튜디오 음악의 실체를 알기 시작했다. 폴 매카트니가 1967년, 팝 사상 최고의 명반인 <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 >를 만든 후 “만약 < 펫 사운즈 >가 없었더라면 이 앨범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다. 톰 페티, 린지 버킹햄, 그룹 소닉 유스 등도 < 펫 사운즈 >가 음악을 듣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비치보이스를, 얼핏 < 서핑 USA >하나로 이름을 날린 그저 그런 그룹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적이 의아스러울 만한 부분이다. 이 앨범은 국내에 ‘그리운 고향’(‘앞마을 옛터에 빨래하는 순이...’로 시작되는)으로 번안된 ‘슬룹 존 B’와 같은 히트곡을 내긴 했지만, 출반 당시에는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음반을 낸 캐피톨 레코드사 측도 브라이언이 쓸데없는 음반을 만들었다고 불평했었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이 90년 CD로 나왔을 때도 골든 레코드(50만장 판매)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앨범 가치는 상승해 ‘전설적인 걸작’으로 자리잡았다. 근착 빌보드는 < 펫 사운즈 >발매 30주년을 기념해 CD 박스 세트를 오는 5월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전하고 있다. 뒤늦게 이 작품이 명반임을 깨달은 캐피톨사가 음반의 의미를 기리려는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이 박스 세트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캐피톨사는 이 앨범을 ‘상품’으로서뿐 아니라 ‘역사적 다큐멘트’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원곡을 리마스터한 것들 외에, 당시의 신곡 및 실패본들이 총망라돼 실릴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팬이 캐피톨사 측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로이 버크허트는 이런 말을 했다. “그와 같은 일은 마땅히 레코드회사가 해야 한다고 본다. 백년이 지나면 비틀스, 롤링 스톤스, 비치 보이스는 우리 시대의 베토벤, 브람스, 바흐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옛 음반이 거의 재발매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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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픽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이란 태풍이 휘몰아 쳤을 때 트래픽(Traffic)은 태풍의 눈에 자리했던 그룹이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잊고 상상의 대상과 합일하게 만들어 주는 그의 음악은 광기와도 같은 침묵을 수반하여 그 한가운데서 소용돌이쳤다. 사이키델릭과 소울, 펑키, 거기다 클래식 요소까지 뒤섞여 있지만, 그럼에도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앨범 곳곳에 농축되어 있는 절제미 때문이었다. 스펜서 데이비스 밴드(Spensor Davis Band)의 보컬로도 잘 알려진 스티비 윈우드(Steve Winwood)가 주축이 되어 형성된 트래픽은 1967년 < Dear Mr. Fantasy >를 가지고 데뷔했다. 프론트맨 윈우드가 노래와 키보드와 기타를 맡고, 드럼의 짐 카팔디(Jim Capaldi)가 드럼을 쳤으며 크리스 우드(Chirs Wood)가 플롯과 색소폰을 연주했다. 당시 사이키델릭의 흐름에서 배제되었던 관악기의 도입은 이 그룹이 지향하는 ''사운드의 색감''측면에서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록의 이미지를 결정해준 인물은 리드 기타의 데이브 메이슨(Dave Mason)이었다. 노래에 관한 한 ''흑인보다 더 흑인처럼'' 부를 줄 알았던 스티비 윈우드도 발군이었지만 팝적 감각이 뛰어난 데이브 메이슨 또한 장르를 뛰어넘는 전천후 인물로 그룹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트래픽을 규정할 때 반드시 ''윈우드와 메이슨의 공조그룹''이란 표현을 동원한다. 이러한 쟁쟁한 실력자들의 만남으로 사이키델릭이란 시대 조류에 편승했으면서도 하나의 획을 긋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비틀즈, 롤링 스톤즈, 후 등 빅3를 제외하고 미국 그룹 판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영국 그룹이란 점은 주의를 집중시켰다. 더욱이 롤링 스톤즈와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의 프로듀서로도 잘 알려진 지미 밀러(Jimmy Miller)의 참여로 이 앨범의 음악적 가치는 수직 상승한다. 트래픽은 음악만큼 공연으로도 고평(高評)을 받았다. 사이키델릭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무대의 가지각색 현란한 조명들은 비디오 프로듀서인 테일러 핵포드(Taylor Hacford)의 도움으로 관중을 사로잡으면서 현장효과를 절정으로 이끌곤 했다. 당시 사이키델릭 록그룹에 있어서 이 같은 ''판타지''공연은 당연 필수덕목이었다. 자유가 보인다. 그렇지만 조금도 방종이나 무차별적 개성으로 생각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한 구덩이에 차가운 백인 감성과 활활 타오르는 흑인적 열정이라 함께 어우러져 차가운 입김과 뜨거운 연기를 동시에 내뿜는 듯하다. 대척(對蹠)의 아름다운 동거와 퓨전이 여기 있다. 만약 쾌락만을 추구한 음악이었다면 즐거움 되에는 극도의 상실감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스터 환상과의 여행은 상실이나 허무 아닌 열락이며 그를 통한 삶의 재충전이다. 트래픽은 이듬해 1968년 < Traffic >, 1970년의 < John Barleycorn Must Die > 등의 걸작 앨범들을 통해 그들은 찬란한 자유의 행보를 계속한다. 그러면서 활동 9년 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갈망을 깊이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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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 : Ten Years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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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 이어즈 애프터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 시대를 수놓은 일렉트릭 블루스를 연주하면서 곧바로 이어진 하드록 사운드로 연결된 시점에 활약했던 그룹이다. 흑인 블루스 광(狂)으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앨빈 리(Alvin Lee)가 그룹의 핵심 인물이자 간판이며 국내에서는 1971년 싱글차트에도 등장했던 그들의 꿈꾸는 듯한 느낌의 감성적인 하드록 발라드 ’I’d love to change the world’가 오랫동안 애청되었다. 영국의 노팅햄에서 1944년 태어난 앨빈 리(Alvin Lee)는 13살 때 처음으로 기타를 잡아 팝에 열광했고 이듬해인 14살 때 집을 나와 런던으로 갔다. 여기서 리오 라이온스(Leo Lyons)와 만났고 둘은 끼니를 굶는 고생 끝에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앨빈은 블루스 명인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의 런던 마키 클럽 공연에서 백업 연주를 했고 리오는 윈저(Winsor) 재즈 페스티벌에 출연했다. 1965년 올간을 연주하던 칙 처칠(Chick Churchill)을 만나 셋은 블루스를 지향하는 밴드 제이버즈(Jaybirds)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솔로가수들의 백업 공연 차 영국 국내를 다니고 나이트클럽에 나가 스탠더드 넘버를 연주하던 이들은 언젠가는 파괴력이 넘치는 본격 밴드를 만들 꿈을 키웠다. 1967년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3사람 앞에 드럼주자인 릭 리(Rick Lee, 앨빈과는 전혀 무관)가 나타나 곧장 목표하던 그룹을 결성, "10년 후를 목표로 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텐 이어즈 애프터(Ten Years After)로 붙였다. 그 해 5월 롤링 스톤스, 더 후 등이 출연했던 클럽에서 스테이지 데뷔했고 바로 드림 레코드와 계약을 해 첫 앨범 < Ten Years After >를 발표했다. 이 앨범 커버는 밴드 사진이나 디자인이 사이키델릭 아트를 취해, 사이키델릭 블루스를 내건 그룹임을 드러냈고 실제 앨범은 초기 블루스 거물인 소니 보이 윌리암슨(Sonny Boy Williamson)의 ’Help me’와 윌리 딕슨(Willie Dixon)의 ’Spoonful’에 대한 해석을 담아냈다. 블루스를 연주했으나 영국 팬들에게 별로 어필하지 못하자 이듬해인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의 콘서트에서 호평을 받아, 에릭 클랩튼의 크림(Cream)처럼 영국보다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런 가운데 2번째 앨범인 < Undead >가 발표되어 영국에서도 착실하게 인기를 다지기 시작, 1969년 앨버트 홀에서 열린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같은 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존 메이올, 레드 제플린, 제쓰로 툴 등 영국의 신(新)영웅들과 출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그들의 인기는 본격 궤도에 올랐다. 특히 전설적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I’m going home’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 시기에 내리 발표한 일렉트릭 블루스 경향의 하드록 앨범들 < Ssssh >(1969년) < Cricklewood Green >(1970년) < Watt >(1970년)는 모두 앨범 차트 20위권에 진입하는 히트를 기록, 록그룹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1971년 크리살리스(Chrysalis)로 레이블을 옮겨 발표한 < A Space In Time >에서는 그들에게 가장 유명한 곡이 된 싱글 ’I’d love to change the world’를 발표해 미국(40위)과 영국에서 모두 준(準)히트를 기록했다. 1974년 앨빈 리가 새로 9인조 밴드를 조직하면서 텐 이어즈 애프터의 위상을 크게 흔들렸고 이 새로운 밴드가 발표한 앨범 < Positive Vibrations >는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됐다. 그룹 매니저의 부인 속에서도 해산설이 나돌던 1975년 마침내 앨빈 리는 활동중단을 피력했지만 오랫동안 공식적 해산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앨빈 리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그룹을 이끌고 활동을 계속, 텐 이어즈 애프터와 앨빈 리 밴드(Alvin Lee Band)란 이름으로 공연을 가졌다. 1989년에는 텐 이어즈 애프터란 이름으로 15년만에 신보 < About Time > 앨범을 내놓아 차트에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도 이들은 그룹명을 보유한 채 오리지널 멤버들이 모여 때때로 공연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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