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5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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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 Wolfgang Amadeus Mozart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Wolfgang Amadeus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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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서양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이자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35년의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 실내악, 미사곡 등 600개가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많은 작품이 각 장르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섯 살 때 첫 작곡을 했으며 열네 살 때 이탈리아 여행 중에 오페라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유럽 전역을 여행했으나 경이적인 음악의 신동이라는 평판과 작품들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을 얻는 데 실패했다.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잠깐 동안 일했으나 대주교와의 불화로 해고되고 이후 빈으로 거처를 옮겨 작곡과 연주에 전념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로서의 높은 명성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등 오페라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것에 대한 보수는 그의 형편없는 경제관념과 낭비벽을 감당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안정적인 예술 활동을 위해서는 궁정이나 귀족으로부터의 후원이 필수적이었던 시대에 높은 급료를 안정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죽을 때까지 얻지 못했던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 동안 주로 생계를 위해 곡들을 썼고, 만년에는 닥치는 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모차르트의 창작열은 죽기 직전까지 조금도 식지 않아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수많은 작품들을 썼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한 일화는 무수히 많은데 바티칸에서 외부에 그 악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던 비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처음 듣고 거의 완벽하게 채보했고 이틀 뒤 두 번째에는 몇 개의 소소한 것들을 수정해 악보를 완성했다. 모차르트에 의해 처음으로 [미제레레]는 일반에 악보가 공개되었다. [교향곡 36번]을 사흘 만에 작곡했고 그의 3대 교향곡으로 평가받는 [교향곡 39번]부터 [교향곡 41번]까지를 6주 만에 완성했다. 모차르트 스스로 자신은 음악에 대한 천재를 타고났다고 자부했으나 작곡을 위해서 자신보다도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로 그는 음악에 전념한 천재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가볍고 경쾌한 장조의 작품이 대부분인데 만년에 접어들어서는 장조의 작품이라도 비장함과 애수에 넘치는 작품이 늘었고, 그런 작품들은 ‘천상의 음악’이라고 형용되었다. 죽기 두 달 전 건강이 이미 안 좋은 상황에서도 [마적]을 작곡해 초연하는 등 정력적으로 곡들을 썼으나 미완의 걸작 [레퀴엠]을 쓰던 도중 쓰러져 불과 2주 뒤에 35년 10개월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하이든, 베버,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로시니, 베를리오즈 같은 음악가들뿐 아니라, 실러, 괴테, 나폴레옹을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와 유럽 왕족들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

작곡 : Carl Philipp Emanuel Bach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Carl Philipp Emanuel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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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고전파 작곡가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다. 프로이센 황태자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쳄발로 주자로 일했고, 그의 즉위와 함께 베를린의 궁정악단이 되었다. 1768년 텔레만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의 궁정악장으로 재직했다

작곡 : Heitor Villa-Lobos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Heitor Villa-Lob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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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토르 빌라 로보스
브라질의 작곡가. 1887년 3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서관 사서이자 아마추어 작곡가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1899년 아버지가 죽은 뒤 카페와 영화관에서 첼로 연주를 했다.

1905년에 브라질 북동부를 여행하면서 민속 음악을 수집했다. 이 여행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어, 북동부에서 식인종을 만났을 때의 모험을 회고한 것은 믿기 어렵다. 그 후에 리우데자네이루의 국립 음악원에서 공부했지만 빌라로부스의 작품은 너무 독창적이었다. 몇 년 후에 빌라로부스 자신이 한 말을 빌리자면 그의 음악은 “폭포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대학은 거기에 한 발을 내미는 순간 최악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었다.

1912년 아마존 우림 지역에 갔다 온 것을 마지막으로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와서 정착했다. 1915년 11월 13일에 첫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그의 재능은 인정받아 1923년에 정부지원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30년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가르쳤다.

빌라로부스의 음악 교육 역시 훌륭한 업적이다. 당시 세대의 브라질 사람들을 위한 음악 교수법을 고안해 냈는데, 브라질의 음악문화와 그들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다. 민족음악을 접목시켜서 학생들을 위한 대편성 합창곡을 썼다. 빌라로부스가 죽은 지 40년이 지났지만 그의 교수법은 삼바 음악과 MTV에 영향을 받는 브라질의 지금 세대에게도 공감을 받고 있다.

1944년부터는 미국 전역을 돌며 지휘 활동을 하고, 미국 오케스트라에서 위촉된 작품과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1959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생을 마감했다.

작곡 : Georg P. Telemann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Georg P.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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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독일의 바로크 음악 작곡가로, 마그데부르크 출생이다. 독학으로 음악을 익혔으며,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을 공부했다. 종종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로 알려져있다.(적어도 현존하는 작품 수로)), 그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안토니오 비발디 그리고 절친한 친구였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 동시대 사람이었다.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바흐가 더 위대한 작곡자로 여겨지나, 당대에는 텔레만이 그의 음악적 능력으로 더욱 널리 인정받았다.

텔레만은 널리 여행하면서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습득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비올라나 트럼펫 혹은 오보에나 하프시코드를 각각 복합하는 등 특이하게 악기를 편성하는 협주곡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련의 중요한 음악 관련 직위를 역임한 바 있는데, 그 정점은 1720년부터 1767년 그가 죽을 때까지 함부르크의 가장 큰 다섯 교회에서 음악 감독직을 맡은 것이다.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은 1681년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텔레만의 가족은 딱히 음악적 배경이 없었는데, 그의 증조부는 할버슈타트에서 가수로 활동했으나 그 밖에 다른 직계 가족은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텔레만의 아버지는 1685년에 사망하여, 그의 어머니가 어린 텔레만의 양육을 도맡았다. 그들은 중상류 계층에 속했으며, 교회에서 일했다. 텔레만은 10살 때 음악을 접하게 되어 소질을 드러냈는데, 12살에 처음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텔레만의 음악적 재능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에 몸담기를 우려하여 그의 모든 악기를 빼앗고, 그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진로를 택하길 기대하여 1693년에는 젤러펠트의 새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그 학교의 관리인이 텔레만의 재능을 인정해준 덕분에 그는 계속 작곡을 하고 스스로 음악에 대한 지식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그가 힐데샤임의 김나지움 안드레아눔(Gymnasium Andreanum)에서 공부를 마칠 적에, 텔레만은 리코더, 오르간, 바이올린, 비올라 다 감바, 플루트, 오보에, 샬뤼모, 더블 베이스, 베이스 트롬본을 스스로 완전히 익혔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음악 양식을 접했으며, 일찍이 요한 로제뮐러와 아르칸젤로 코렐리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1701년에 텔레만은 법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는데, 아마도 어머니의 권유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은 곧 드러나는데, 그는 도시의 두 주요 교회에 음악을 의뢰받는다. 얼마 안되어 그는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40명 규모의 콜레기움 무지쿰을 창설한다. 이듬해 텔레만은 라이프치히 오페라 하우스의 감독과 두 교회의 합창 지휘자에 임명된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연장자인 작곡가 요한 쿠나우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 텔레만이 합창 지휘자에 임명되면서 도시의 음악 감독이던 자신의 지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텔레만은 또한 자신의 오페라를 만들 때 많은 학생들을 이용하여 이들이 쿠나우의 교회 음악에 참가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쿠나우는 텔레만을 '오페라 음악가'라고 비난했다. 텔레만이 이 일을 그만둔 뒤에도 쿠나우는 자신이 오페라에서 잃었던 성과를 되찾지 못했다.

텔레만은 1705년에 라이프치히에 남아 조라우(Sorau, 현재 폴란드의 zary)에 있는 백작 에어드만 2세(Erdmann II)의 궁정 법원에서 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 이곳에 재임하면서 2년 동안 그는 장바티스트 륄리와 앙드레 캉프라의 프랑스 양식을 알게 되고, 많은 서곡과 조곡을 작곡했다. 스웨덴 군대가 독일에 쳐들어오자 에어드만의 궁정은 성으로 대피했다. 텔레만은 1707년에 파리에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중에 아이제나흐(Eisenach)의 궁정에서 가수들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에서 바흐를 만난다. 텔레만의 생애에서 중요한 직위는 1721년에 임명받은 함부르크의 다섯 주 교회에서 음악 감독직으로,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여기서 텔레만은 노래와 음악 이론을 가르치고, 매주 혹은 격주로 공연하는 다른 콜레기움 무지쿰을 감독하면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때마다 종교 음악을 작곡하고 일요일마다 두 개의 칸타타를 썼다. 그는 또한 지역 오페라 하우스에서 몇 년 동안 감독을 맡았지만, 재정적 실패를 겪었다.

쿠나우가 라이프치히에서 맡던 자리가 공석이 되자, 텔레만은 그 직위에 지원한다. 이에 지원한 여섯 명의 음악가 중에서 그는 가장 유리한 후보자였으며 시의회의 승인을 얻게 된다. 그러나 텔레만은 이 제의를 함부르크에서 봉급 인상을 보장받는 데 이용하면서, 이 직위를 거절했다. 그리하여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가 텔레만을 대신하게 되는데 그도 이를 거절하면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에게 길을 터주게 된다. 텔레만은 자신의 음악을 출판하고, 다른 궁정에서 몇몇 작은 직위를 얻어서 함부르크의 봉급을 늘렸다.

대략 1740년부터 텔레만의 이론적인 논문을 쓰는 데 더욱 주력하면서 그의 성과는 줄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란츠 벤다나 그의 대자(代子)였던 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와 같은 몇몇 젊은 작곡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1755년 그의 장남 안드레아스가 죽은 뒤, 텔레만은 그의 손자인 게오프크 미카엘 텔레만을 양육할 책임을 지게 되었고, 미래의 이 작곡가에게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의 여러 종교적인 오라토리오는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이후 텔레만은 시력이 나빠져서 1762년에 이르면 창작이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나 이 작곡가는 1767년 6월 25일 죽는 날까지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기네스 북에는 텔레만을 역사적으로 800개 이상의 작품을 인정받은 가장 다작의 작곡가로 등재하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예를 들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출판된 그의 주제별 작품 목록은 텔레만이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실제로 3,000개가 넘는 작품을 썼음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그의 몇몇 악보는 음악학자 제이슨 그랜트가 최근에 발굴하기도 했다. 많은 필사본이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다른 작곡자인 시몬 세히터는 8000개가 넘은 작품을 써서 텔레만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중 5000여 작품은 작은 푸가이다.)

텔레만은 그의 생애에 인정받아 이후 수십 년간 그 명성을 이어갔지만, 19세기 초에는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일이 줄어들었으며, 텔레만의 중요한 작품인 Der Tod Jesu는 1832년 이후 20세기까지 연주되지 않았다. 1911년 Encyclopædia Britannica에는 바흐와 헨델 두 사람에 대해선 상당한 기사가 있지만, 텔레만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텔레만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20세기 초의 일로 1950년대의 베렌라이터판에서 정점에 달한다. 초기 음악 앙상블에서는 이제 텔레만의 작품을 연주하며, 그의 음악을 많이 녹음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텔레만의 작품에는 흔히 TWV 번호가 붙는다. TWV란 Telemann Werke Verzeichnis(텔레만 작품 목록)을 뜻한다. TWV는 숫자와 콜론,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TWV 뒤에 첫 숫자는 매체의 일반 형태를 가리키며, 콜론 뒤의 글자는 특정 작품의 조성을 뜻한다. 그리고 뒤에 붙는 숫자는 각 작품 형태별 번호이다. 가령 텔레만 B 플랫 메이저의 현과 통주저음을 위한 폴로노이스 협주곡은 TWV 43:B3이다. 다른 예로 텔레만의 D 메이저 모음곡은 TWV 55:D1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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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 : Franz Schu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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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자작농 출신이자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슈베르트에게 5살부터 악기교육을 시켰고,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그의 형 이그나츠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다. 7살부터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처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또한 가족 현악 4중주에서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는 바이올린을, 아버지는 첼로를, 자신은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하였다. 슈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친 이유는 단순히 취미였을 뿐, 슈베르트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된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재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08년에는 궁정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존경하였다. 13세 때 변성기로 인해 궁정학교 수업을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군복무를 일정기간의 교사근무로 대신하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14년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해에 바 장조의 미사곡(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의 독창을 부른 테레제 그로브는 슈베르트의 첫번째 애인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고, 테레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1815년 18세 때에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등의 명작도 이 해에 작곡되었다. 그가 지은 가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책으로 편집되었다. 1816년 슈파운이 소개한 시인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권유로 친구 집에 머물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괴롭힌 매독 또한 이 시기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817년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인 요한 미하엘 포글을 만났다. 1818년에는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냈다. 이듬해에 포글과 함께 북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는데, 그의 음악이 포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좋은 벗의 도움으로 그의 명성은 차츰 높아지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Schubertiads 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1819년 라이바흐 사범학교의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학교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가곡 《방랑자》나 《교향곡 제5번》 등이 이때의 작품이다. 1823년에는 《방랑자의 환상곡》, 《로자문데》 등을 발표했고 그 해 여름,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를 작곡하였다. 1824년,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의 음악 교사가 되어 전원 생활을 즐기며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듬해 다시 포글과 서부 오스트리아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였다. 1827년 30세가 되자 자신의 인생이 겨울을 맞았음을 아는 듯 《겨울 여행》을 작곡하였다. 1828년 3월 자작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뒤 교향곡 9번인 《대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출판된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가곡의 대부분이 그 해 8월에 완성되었다.

슈베르트는 한때 베토벤과 만난 적이 있었다. 평소에 베토벤을 존경해왔던 슈베르트는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자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만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날 기회를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1827년 3월 19일, 베토벤 집에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불과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인사하는 한편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준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슈베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이러한 베토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합병증으로 인해 힘이 들어 보였고 말할 때마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 후 베토벤은 청력상실로 듣지 못하는 탓에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음악가의 병이 든 처참한 모습을 보고 소심한 성격때문에 일찍 만나지 못한 자괴감과 후회감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1주일 뒤인 3월 26일,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공부하다가(키즐러에게) 11월 17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몸져 누웠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하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리는데다 허깨비가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유해를 교회에 묻으려 했으나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평소에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을 해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식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설과 매독의 악화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는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주해 1]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조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69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제9번 《대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마왕》, 《방랑자 환상곡》, 《스케르초》, 《악흥(樂興)의 한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곡 : Franz Haydn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Franz Hay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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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은 1732년 3월 31에 태어나 1809년 5월 31에 사망하였다. 로라우에서 태어나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o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세 때 친척인 초등학교 교장이자 교회음악가인 프랑크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740년 빈의 성스테파노대성당의 소년합창대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자유롭기는 하였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1759년까지 10년간이나 계속되고 그 동안의 자세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N.포르포라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고 음악 애호가인 귀족 툰백작부인의 하프시코드 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귀족 퓌른베르크남작 집안의 실내음악가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스테파노대성당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가수로서 예배주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세레나데악단에 참여하여 빈거리로 나와 돈을 버는 일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모르친백작 집안 궁정악장(宮廷樂長)에 취임하였다. 보헤미아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핍박하여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라와 결혼하였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후작 집안의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당시의 악장은 G.베르나였으나 그가 사망한 1766년부터는 하이든이 명실상부한 그곳 악장으로 승진하였다. 에스테르하지후작의 집에서는 하이든이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 있어서는 고전파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아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의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와 친교가 있었는데 첫번째 영국 체류 중이던 1791년에 모차르트는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가던 1792년, 본에 들렀던 하이든은 거기서 처음으로 젊은 베토벤을 만났으며 그후 잠시 빈에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베토벤이 왕성한 작곡활동을 하게 될 무렵에는 은퇴하여 여생을 즐겼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제2회 빈 공략의 포성을 들으면서 7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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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 : Jean-Philippe Ram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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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필립 라모
장 필립 라모는 화성법을 이론화한 최초의 이론가이자 작곡가이다.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무렵부터 프랑스 각지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전전하면서 이론과 창작에 힘썼다. 1722년(39세) 파리에서 유명한 '화성론'을 출판해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여기에 정착한다. 1726년에는 다시 '신음악 이론 체계'를 출판, '화성론'과 함께 3도 음의 누적에 바탕을 둔 화음 연결의 원리를 확립했다. 후에는 대표작 「이폴리트와 아리시 Hippolyte et Aricie」(1733)를 비롯한 많은 오페라와, 쿠프랭의 뒤를 이어받아 클라브생(하프시코드 또는 쳄발로라고도 부른다)곡을 작곡해 갔다. 후에 궁정 실내악 작곡가로 임명된 라모는 당시의 프랑스 악단 최대의 지도자가 되고, 죽음 직전에는 귀족 지위에 올랐다. 라모의 음악은 일반적으로는 「암탉 La poule」이나 「탕부랭 Tambourin」과 같은 극소수의 소품에 의해 사랑받고 있을 뿐이지만, 그 작풍은 동시대의 작곡가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었다. 특히 '선율은 화성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그의 기본적인 음악관은 이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지휘 : Zubin Mehta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지휘 : Zubin Meh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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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빈 메타
주빈 메타는 1936년 인도 봄베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메리 메타(Mehli Mehta)는 봄베이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미국 커티스 현악4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와 아메리카 유스 심포니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하였다.

주빈 메타는 원래 의학을 전공하였으나 지휘자가 될 결심으로 의학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빈 국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1958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개최된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1961년∼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고, 1962년∼197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주빈 메타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 당시 수많은 레코드와 연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69년 이스라엘 필하모니는 그를 음악고문으로 지명한 데 이어 1977년엔 음악감독, 1981년에는 상임감독으로 지명하였다. 또한 1978년에는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가 되어 13년간 지휘하였으며 1998년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주빈 메타는 오랫동안 전 세계에 음악을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왔으며 2011년 3월에는 미국 LA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오케스트라 :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오케스트라 :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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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설적인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에 의해 1946년 설립된 런던이 자랑하는 5대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세계 일류급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장 지휘자들과 뛰어난 연주자들의 참여로 수많은 명연들을 탄생시켰으며, 파격적인 레퍼토리와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높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문화에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명품 클래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오케스트라 : Monte-Carlo Philharmonic Orchestra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오케스트라 : Monte-Carlo Philharmonic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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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카를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몬테카를로 오페라 오케스트라],Orchestre philharmonique de Monte-Carlo (OPMC) / Orchestre National de l'Opera de Monte-Carlo / Monte Carlo Opera Orchestra
1856년 창단한 모나코의 교향악단.

1953년, 레니에 3세의 명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몬테카를로 오페라 오케스트라 (Orchestre national de l'Opera de Monte-Carlo)'로 변경하였다가 1980년 '몬테카를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Orchestre philharmonique de Monte-Carlo)'로 다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