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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심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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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大允, 진경, 백운·석교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진경(晉卿), 호는 백운(白雲)·석교(石橋)이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준소의 영수 심수현의 고손자이고, 강화학파의 중심 인물 소론 산림 대사헌 심육의 동생인 이조참판 심악의 증손자이다. 그의 정치·경제적인 처지때문에 교유폭운 매우 좁았으나, 이희영(李曦榮), 강혜백(姜惠伯), 유영건(柳榮健), 정치형(鄭稚亨) 등과 교유하였다.
심대윤의 집안은 증조부 심악(沈?)이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이어 일어난 1755년(영조 31)의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되면서 일거에 몰락하고 말았다.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그는 벼슬길이 막히고 겨우 양반의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처지는 그가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된 원인이 된다. 그는 한양(漢陽)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와 혼인을 하였는데, 그의 처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정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는 혼인 후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넷째 동생인 심의돈(沈宜敦)의 아들인 심명택(沈命澤)을 양자로 들였다. 그는 39세 때에 한양을 떠날 정도로 경제적 처지가 매우 곤란하여 노모와 두 동생과 함께 안성(安城)의 가곡(佳谷)으로 이주를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경제적인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 목반(木槃)을 만드는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학문적인 노력에는 변함이 없었다. 심대윤은 저술에 몰두하다가 1872년(고종 9) 7월 25일 생을 마감하였다.
심대윤의 집안은 증조부 심악(沈?)이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이어 일어난 1755년(영조 31)의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되면서 일거에 몰락하고 말았다.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그는 벼슬길이 막히고 겨우 양반의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처지는 그가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된 원인이 된다. 그는 한양(漢陽)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와 혼인을 하였는데, 그의 처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정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는 혼인 후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넷째 동생인 심의돈(沈宜敦)의 아들인 심명택(沈命澤)을 양자로 들였다. 그는 39세 때에 한양을 떠날 정도로 경제적 처지가 매우 곤란하여 노모와 두 동생과 함께 안성(安城)의 가곡(佳谷)으로 이주를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경제적인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 목반(木槃)을 만드는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도 학문적인 노력에는 변함이 없었다. 심대윤은 저술에 몰두하다가 1872년(고종 9) 7월 25일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