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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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 Sergei Rachmaninov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Sergei Rachmani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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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y Vasilyevich Rachmaninoff Sergej Rachmaninoff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 피아노 연주가이자 지휘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오래된 귀족 가문의 하나였다. 9세 때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3년 뒤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1895년에 완성된 1번 교향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불안증세 속에 1897년 발표되었는데, 이는 많은 혹평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 약 3년 간 거의 작곡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되었다. 1901년 완성된 제2번 피아노 협주곡 역시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된 것이다.

1905-1906년에는 모스크바 황실 극장 지휘자를 거쳐 미국 및 유럽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곧 라흐마니노프의 재산도 몰수당하였다. 그는 가난 속에서 북유럽에 머물러있다가 미국에서 지휘자의 자리를 제안받고 건너가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1942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943년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기량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뒤늦게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다. 전설적인 기교와 13도의 음정까지도 연주해 낼 수 있을 만큼 컸던 손 등에 힘입어,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피아노 연주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라흐마니노프 스스로 연주한 자신의 음악이나 일반적인 레파토리 곡들의 연주는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의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라흐마니노프는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악곡 형식과 장르를 포괄하지만, 그 안에서도 슬라브적인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는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세 개의 교향곡과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 세 개의 오페라, 저녁기도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전주곡 올림 다 단조를 포함한 스물 네 개의 전주곡, 열 일곱 개의 연습곡, 교향적 무곡과 많은 가곡 등이 있다. 그는 비록 명백히 쇼팽과 리스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은 차이콥스키와 비슷한 후기 낭만파 양식이다.

지휘 : Riccardo Chailly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지휘 : Riccardo Cha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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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샤이
리카르도 샤이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프랑코 카리치오로를 사사하여 작곡의 디플로마를 얻은 다음, 페루자에서 피에로 과리아노,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에서 프랑코 페라라와 같은 명교사를 사사했다. 1968년, 15세 때 클라우디오 시모네에게 인정을 받아 파도바에서 이 솔리스티 베네티를 지휘하여 데뷔했고, 2년 뒤에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추천으로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다. 1972년 키지 음악원을 졸업한 샤이는 밀라노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마스네의 [베르테르]를 공연하여 오페라 지휘자로 데뷔했다.

1974년에는 미국으로 진출, 시카코 리릭 오페라에서 [나비 부인]을 지휘했고, 1977년 시즌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오프닝에서 [투란도트]를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군도]를 지휘, 국제적인 주목을 끌게 된다. 더욱이 1982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데뷔했다. 그는 이미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함부르크의 슈타츠오퍼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오페라 지휘자로서는 제일 젊으면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는 주인공이 되었다. 다만 콘서트의 지휘 방면에는 아직도 충분한 캐리어를 쌓았다고 할 수 없지만 런던 교향악단이나 베를린 필하모니아, 뮌헨 필하모니, 로열 필하모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를 지휘, 차곡차곡 캐리어를 쌓고 있다. 1982년 시즌부터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였다.

1986년에는 볼로냐 시립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으로도 취임했고, 콘서트와 오페라의 양쪽으로 자기의 본거지를 가질 수 있게 된 샤이는 점점 활약을 넓히고 있다. 또한 1988년부터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 수석 지휘자도 겸하게 되었다. 그 동안 1984년에는 로열 필하모니와 함께 한국에 와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지휘했다.

샤이는 위와 같은 경력에 비추어 보더라도 연령적으로는 아직도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적지만 시중에 팔리고 있는 레코드를 듣게 되면 소위 네거티브적인 의미의 젊음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마스네의 [베르테르](그라모폰)에서는 도밍고, 오브라스초바와 같은 베테랑 가수를 구사하여 실로 전체를 멀리 내다보는 안정된 음악을 이끌어 낸 솜씨는 실로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멘델스존의 [교항곡 제2번(찬가)][교향곡 제3번(스코틀랜드)](필립스)에서도 다분히 젊음을 느낄 수가 있지만, 스케일의 크기를 본다면 도저히 20대의 젊은이의 음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찬가]의 경우 코러스의 컨트롤, 오케스트라와 솔로의 퍼스펙티브 등은 숙달된 기량이라고 표현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많다고 본다. 역시 샤이가 오페라의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익혔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이만큼 흥미롭게 곡을 들려 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라 하겠다. 샤이는 21세기의 1장이란 라이센스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재라고 하겠다.

연주 : Martha Argerich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연주 : Martha Arge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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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아르헤리치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세 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음악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빼어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열한 살에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극장 테아트로 콜론에 데뷔했다. 1955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해 프리드리히 굴다의 제자가 되었고, 1957년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1960년 연주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슬럼프를 겪던 아르헤리치는 1965년 제7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녀의 연주는 쇼팽 해석을 혁신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음반과 공연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며 숱한 명반과 명연을 남겼다. 현란한 테크닉과 파워풀한 타건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그녀는 〈BBC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9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녀는 독주 무대 대신 실내악 협연 위주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과 협연을 이어오고 있다. 또 루가노 페스티벌, 벳푸 아르헤리치 페스티벌 등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공연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그녀에게는 성姓이 다른 세 딸, 1964년 중국 출신 지휘자 첸량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다 첸, 1970년 두 번째 남편이었던 지휘자 샤를 뒤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니 뒤투아, 1975년 연인이었던 피아니스트 스티븐 코바세비치와의 사이에서 낳은 스테파니 아르헤리치가 있다. 엄마로서 아르헤리치의 모습은 스테파니가 감독한 다큐멘터리영화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세 딸들Bloody daughter〉에 담겨 있다.

1992년 암(악성 흑색종)을 진단받은 그녀는 1997년 병이 재발했지만 회복해 완치되었다. 여든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