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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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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 August Strindberg
1849년 1월 22일, 빚더미에 빠져 파산한 해운업자이며 귀족이었던 아버지와 여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 명의 남매와 함께 스톡홀름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스트린드베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웁살라대학에서 화학과 의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왕립극장의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학업에 충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소질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는 한때 방랑자처럼 생활하며 방황하기도 했다. 1874년 왕립도서관의 사서 보조로 일하면서 문화사와 중국학 등을 연구했으며 1877년에 남작 부인이자 배우 지망생이었던 시리 폰 에센과 결혼했다. 1879년에 출간한 자전적 사실주의 소설 『빨간 방』이 성공한 이후 풍자소설 『새로운 왕국』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후 단편집 『결혼』을 출간했으나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스트린드베리는 무죄로 풀려났으나 이 일로 불안과 편집증적 증세를 보였고, 피폐했던 결혼 생활도 끝나게 된다. 1887년 자연주의 희곡으로 평가받는 「아버지」를 집필했으며, 1888년에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미스 줄리」를 선보였다. 이후에도 「파리아」, 「채권자」 등 주요 희곡을 연이어 발표했다. 1893년에는 두 번째 부인인 프리다 울과 결혼했으나 역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곧 헤어졌다. 1898년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이라 평가받는 「다마스쿠스로」를 선보였고 1901년에 여배우 하리에트 보세와 세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나 역시 이혼하고 말았다.
1902년에 그에게 명성을 안겨 준 희곡 「꿈의 연극」을 발표하고 아우구스트 팔크와 함께 스톡홀름에 극장 ‘인티마 테아테르’를 만들어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1910년에는 일명 ‘스트린드베리 논쟁’이라 불리는 스웨덴 역사상 가장 큰 문화 토론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순수한 문학 토론이었으나 곧 참정권, 국방 그리고 스웨덴 한림원의 역할에 대한 주제로 옮겨 가며 무려 20년 이상 지속됐다. 불우한 결혼 생활로 인해 정신적 고뇌를 겪고, 체제 비판적인 면모로 많은 공격을 받으면서도 위대한 작품을 집필했던 스트린드베리는 1912년 5월 14일 위암으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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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 오세곤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역 :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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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하여 현대희곡 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를 마쳤다. [배우의 화술], [예술강국, 문화대국], [연기화술클리닉] 등의 저서와 여러 권의 고등학교 연극 교과서를 집필하였으며,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과 시집 [사형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 [왕은 죽어가다], [살인놀이], 장 아누이의 [반바지], 스트린드베리의 [줄리아씨], 하벨의 [청중],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 베케트의 [승부의 종말], 사르트르의 [더러운 손] 등 여러 작품을 번역하였고, [우리 읍내], [체홉의 수다], [술로먼의 재판], [갈매기], [타이터스], [보이첵], [오 행복한 날들] 등의 작품을 연출하였다.

1996년 가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1999년 순천향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연극무용학과 교수를 지냈다. 2007~2008년 한국연극교육학회 회장과 2005~2012년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15년 한국연극교육학회 산하 분과학회로 한국화술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