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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조선어학연구회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조선어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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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국어학의 연구와 한글맞춤법의 정리를 목적으로 박승빈(朴勝彬)이 조직한 학술단체.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주최로 박승빈의 조선어학 강습이 12일간 개최되었다. 이 강습이 끝나던 11월 28일 국어학의 연구기관을 두자는 중론이 있어, 참석인사 20여명의 결의로 ‘조선어학연구회’(가칭)의 창립준비위원 및 규칙기초위원을 선정하였다. 이해 12월 5일 창립준비위원회를 개최하여 의정 토의를 거쳐, 12월 10일 창립총회를 열어 규칙을 통과시키고 간사장에 이긍종(李肯鍾), 간사에 백남규(白南奎)·신남철(申南澈)·문시혁(文時爀)·정규창(鄭圭昌) 등 5명을 선출하여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 회는 1930년대 언어·문자를 통한 민족문화계승을 내세워 활동한 조선어학회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나온 단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래의 설립동기는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하던 국어표기법통일안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정식으로 발표되자 이에 대한 박승빈학설의 이론적 주장과 그 반대운동을 조직화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34년 2월 15일자로 기관지 ≪정음 正音≫을 발행하는 한편, 이 해 6월 27일에는 ‘조선문기사정리기성회(朝鮮文記寫整理期成會)’를 조직하였고, 7월에 ‘한글맞춤법통일안 반대성명서’를 발표하여 조선어학회와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어학연구회가 지향한 목적과 내용은 1932년 9월에 발표된 ‘조선어학연구회 취지서’(1934년 2월 ≪정음≫ 창간호에 실림.)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취지서에서 언문의 기사법은 과학적으로 논리가 명확하고 체계가 정연하여야 하며, 종래 관용되어온 역사적 제도에 근거하여야 하고, 대중이 일상생활에 실용함에 평이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정서법(正書法)의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러한 다음 한글파 학설을 비판하였는데, 한글파 학설에는 ① 과학적 진리에 어긋아는 억지로 맞추려는 환상적 논법이 있고, ② 역사상의 기초적 제도를 몰각한 망령된 것이 있고, ③ 어음(語音)과 부합되지 아니하는 기사의 독점적 강요가 있고, ④ 발음이 안 되는 기형문자의 사용이 있고, ⑤ 국부적 관찰에 얽매여 전체에 통하지 못하는 편견적 견해가 있다고 지적한 뒤, 박승빈학설에 따른 맞춤법이 보다 더 대중적 실용성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 회는 주시경학파(周時經學派)의 집결로 조직된 조선어학회와 대립하여 박승빈학설을 기초로 한 새로운 문자운동의 추진체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어학연구회에서 전개한 <한글맞춤법통일안> 반대운동은 이 회가 내세운 철자법이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정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과 비슷하여 보수적 구식표기의 인상을 주었다.

더구나 근거가 박약한 새 부호 등의 사용을 주장하는 면에서 언론과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고질적·파쟁적 전술이라는 일반사회의 비난 속에 한글통일운동을 교란하는 인상을 주어, 이 회가 내세운 신문자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관지 ≪정음≫을 꾸준히 속간하여, 1941년 4월 26일자 제37호로 폐간되기까지 약 10년 동안 국어연구와 연구기반의 조성에 이바지하였다. 리고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일제 초기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주시경·권덕규(權悳奎)·이규영(李奎榮) 등이 편찬하기 시작한 ≪조선어사전≫의 원고를 계명구락부를 거쳐 인수하여 계속한 점 등은 민족문화계승에 공헌한 것으로서 민족항쟁사에 큰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