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3명)

이전

저 : 황간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황간
관심작가 알림신청
황간(黃?, 1152∼1221)은 이름은 간(?), 자는 직경(直卿)이며, 민현[?縣, 지금의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 사람이다. 황간은 부친이 작고한 뒤에 주희의 제자인 유청지(劉?之, 1134∼1190)의 권유로 주희에게 수학했다. 그는 주희의 문하에서 학업을 펼친 후에 밤에도 자리를 깔고 눕지 않았으며,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면 의자에 잠시 앉아 새벽까지 그대로 지낼 때도 있었다. 주희는 주위 사람들에게 “황간은 뜻이 굳고 생각이 맑으니 그와 더불어 지내면 매우 유익하다”라고 칭찬했다. 후에 주희는 그 딸을 황간에게 시집보냈다. 영종(寧宗)이 즉위하자 주희는 황간에게 명해 표문(表文)을 올리게 했는데 이때 장사랑(將仕?)에 보임되고, 감태주주무(監台州酒務)의 직책을 받았다. 주희는 자신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심의편(深衣篇)〉과 다른 저술들을 황간에게 전해 주면서, “나의 도를 부탁할 곳이 여기에 있으니 유감이 없구나”라고 하는 말을 직접 기록했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황간은 3년간 심상(心喪)의 예를 차렸다. 그 후에 감가흥부석문주고(監嘉興府石門酒庫)의 직책을 받았다. 오엽(吳獵)이 호북 지역을 다스릴 때에 황간을 불러 안무사주고(安撫司酒庫)에 임명했고, 강서제거상평(江西提擧常平) 조희역(趙希?)은 황간을 불러 임천령(臨川令)으로 세웠다. 이후 안풍군(安?軍), 한양군(漢陽軍), 안경부(安慶府) 등의 지방관을 맡았는데, 황간은 부임하는 곳마다 학교를 소중히 여기고 교육을 앞세웠다.

제치사(制置使) 이각(李珏)이 황간을 불러 참의관(參議官)으로 삼고자 했으나 황간은 그가 함께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주 지역을 맡으라는 명을 거듭 사양했다. 그 후 다시 안경(安慶) 지역을 맡으라는 명이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여산(廬山)에 들어가 주희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이번(李燔), 진복(陳宓)과 함께 옥연(玉淵)과 삼협(三峽)의 사이를 돌아보고 스승 주희가 남긴 발자취를 탐방했다. 그가 백록동서원에서 건괘와 곤괘 두 괘를 강의했을 때는 산남과 산북의 선비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재소(行在所)에 불려 가 시사 문제를 아뢰고 대리승(大理丞)의 직책을 제수받았으나 이를 받들지 않아 어사 이남(李楠)의 탄핵을 받았다. 황간이 처음 형호(荊湖)의 막부에 들어갔을 때 강호의 호걸들과 교유했는데, 당시 호걸들도 황간에게 기개와 큰 뜻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안경 지역에 와서 제치사 이각의 막부 일을 겸하게 되자 장회(長淮) 지역의 군민들이 마음속 깊이 복종했다. 이러한 소문이 나자 그 지역의 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 그를 더욱 시기하게 되었다. 더욱이 황간이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게 되면 변방의 실태를 그대로 보고해 황제가 저간의 사정을 낱낱이 알게 될까 두려워해서 무리를 지어 방해했다. 황간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자 제자들이 날로 불어나 파(巴)·촉(蜀)·강(江)·회(淮)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예서》의 편찬과 저술에도 시간이 부족했지만, 밤에는 제자들과 함께 경의(經義)에 대한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근 사찰을 빌려 거처하며 의문 나는 점에 대해 열심히 토론했는데, 마치 스승 주희가 살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 후에 조주(潮州) 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박주(?州)의 명도궁(明道宮)을 주관하다가 이것마저 은퇴를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작고한 후에는 문인들의 요구로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술로는 《경해(經解)》와 《황면재선생문집(黃勉齋先生文集)》 등이 있다.

황간의 다른 상품

주자 행장(朱子行狀)

주자 행장(朱子行狀)

26,800

'주자 행장(朱子行狀)' 상세페이지 이동

역 : 장윤수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역 : 장윤수
관심작가 알림신청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계 쪽의 유가적 전통과 모계 쪽의 기독교적 배경을 갈등 요소로 안고 있었으나, 자라면서 점차 기독교로 기울었다.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철학이 목회자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막연한 조언을 따라 경북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철학의 끊임없는 괴롭힘과 더 이상 예전의 소명 의식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각 아래 목회자의 꿈을 접었다. 이후 철학 고전 연구 모임을 통해 조금이나마 철학 공부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릴 적 그토록 싫어했던 ‘태생적’ 전통문화의 배경이 향수를 자극해 동양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희미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 신유학 연구로 동양철학 연구를 시작해 현재는 한국 성리학과 동양 교육 사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경북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신라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다. 중국 서북대학교 인문학원 객좌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동양철학회장을 역임했다. 『도, 길을 가며 길을 묻다』(대한철학회 운제철학상 수상) 외 20여 권의 저서와 『중국문화정신』(중국국가출판협회 우수번역도서상 수상) 외 10여 권의 번역서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 〈강안학의 학문 정체성과 몇 가지 문제점 검토〉 등이 있다.

장윤수의 다른 상품

주자 행장(朱子行狀)

주자 행장(朱子行狀)

26,800

'주자 행장(朱子行狀)' 상세페이지 이동

강안학이란 무엇인가

강안학이란 무엇인가

34,000

'강안학이란 무엇인가' 상세페이지 이동

정몽

정몽

10,080 (10%)

'정몽' 상세페이지 이동

우리시대와 윤리

우리시대와 윤리

17,000

'우리시대와 윤리'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유학, 동아시아유학의 관점에서 보다

일본유학, 동아시아유학의 관점에서 보다

30,000

'일본유학, 동아시아유학의 관점에서 보다' 상세페이지 이동

가르침과 배움의 동양적 의미

가르침과 배움의 동양적 의미

21,000

'가르침과 배움의 동양적 의미' 상세페이지 이동

대구권 성리학의 지형도

대구권 성리학의 지형도

29,000

'대구권 성리학의 지형도' 상세페이지 이동

도道, 길을 가며 길을 묻다

도道, 길을 가며 길을 묻다

19,000 (5%)

'도道, 길을 가며 길을 묻다' 상세페이지 이동

원저 : 퇴계 이황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원저 : 퇴계 이황
관심작가 알림신청
退溪 李滉 (1501-1570)
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

퇴계 이황의 다른 상품

퇴계선생상제례답문

퇴계선생상제례답문

33,250 (5%)

'퇴계선생상제례답문' 상세페이지 이동

[그래제본소] 이황

[그래제본소] 이황

19,800 (10%)

'[그래제본소] 이황' 상세페이지 이동

주자 행장(朱子行狀)

주자 행장(朱子行狀)

26,800

'주자 행장(朱子行狀)' 상세페이지 이동

성학십도

성학십도

18,000 (10%)

'성학십도' 상세페이지 이동

사단칠정을 논하다

사단칠정을 논하다

10,080 (10%)

'사단칠정을 논하다' 상세페이지 이동

퇴계선집 (큰글씨책)

퇴계선집 (큰글씨책)

35,000

'퇴계선집 (큰글씨책)' 상세페이지 이동

퇴계 편지 백 편

퇴계 편지 백 편

25,200 (10%)

'퇴계 편지 백 편' 상세페이지 이동

한글본 성학십도

한글본 성학십도

22,000

'한글본 성학십도' 상세페이지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