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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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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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殷植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호는 겸곡(謙谷) · 백암(白巖)이며, 필명으로 무치생(無恥生) · 태백광노 ·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 · 백치(白痴)를 사용했다. 그는 한국 근대사상 격동기에 활동한 유학자, 근대 학교 운동의 선구자, 교육 사상가, 언론인, 역사가로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국내뿐만 아니라, 격동하는 중국으로 1911년 망명한 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대내적으로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가 해체되면서 근대사회로의 태동이 시작되는 한편, 대외적으로 서구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우리의 자주 의식이 고양되는 때였다. 그의 생애는 제1기(1859∼1897)의 주자학 수학기, 제2기(1898∼1909)의 언론 활동과 계몽운동기, 제3기(1910∼1925)의 망명과 독립운동기로 나눌 수 있다.
박은식은 어려서부터 주자학을 배우며 성장한 주자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신(新)문화와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주자학 사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陽明學)으로 학문적 전환을 결단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적 변화와 함께 1898년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그 후 경학원 강사,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하면서 교육 개혁에 관한 글을 쓰고,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했다. 1905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보호국으로 만들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이를 비판했다. 그는 이후 복간된 ≪황성신문≫에서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는 항일 언론 활동을 1910년 폐간될 때까지 펼쳤다. 또한 1906년 교육 계몽 단체인 서우 · 서북학회의 기관지 ≪서우≫ ·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논설을 써서 계몽 활동에 진력하고, 서우사범학교 · 오성학교 · 서북협성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에 힘썼다.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해 유교 개혁을 주장했다. 이어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해 유교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에는 양명학 보급을 위해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를 간행하고, 한문교과서 ≪고등한문독본≫을 저술했다. 병합 후에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의 집필을 위해 1911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의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저술에 집중했고, 대종교(大倧敎) 신도인 그의 영향으로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때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을 집필했다.
1912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했다. 1914년에는 홍콩으로 가서 중국어 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이 되었다.?이 시기에 강유위(康有爲) · 양계초(梁啓超) · 당소의(唐紹儀)를 비롯한 중국혁명동지회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저술하고, 망명 후에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를 간행했다. 상해에서 이상설(李相卨), 신규식,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또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인촌의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한국 역사에 대한 강연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또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번역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했다.
박은식은 1919년 3 · 1운동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았다. 이때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1919년 8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정부, 서울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했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으며, 대한교육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에 간행했다. 이후 ‘건국사’를 쓰고야 말겠다는 각오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으나 이듬해 11월 1일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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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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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圭植, 예관, 일민
본관 고령.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자는 공집이며 호는 예관이다. 관립 한어학교와 육군무관학교를 나와 육군 부위로 진급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실패, 오른쪽 눈만 실명하였다. 그래서 예관이라는 호를 썼다고 한다. 대한자강회·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며,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다가 국권피탈의 소식에 분개,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대종교 종사 나철에 의해 구조되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 쑨원의 신해혁명에 가담하였다. 중국 국민당 요인들과 한·중 연합단체인 신아동제사를 결성하고, 1915년 박은식과 대동보국단을 조직, 잡지 '진단'을 발간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 법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었다. 이 해 광둥의 신생 중화민국 정부에 대사로 부임,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북벌서사식에도 참가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저서에 『한국혼(韓國魂)』, 『아목루(兒目淚)』가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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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 : 노관범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편저 : 노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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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부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대한제국기 박은식과 장지연의 자강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제국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로 모하실학논문상을 수상했다. 전통과 근대의 통합적 사유를 위해 분발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한국의 사상사, 지성사, 개념사, 지식사, 학술사이다.
지은 책으로는 《백암 박은식 평전》(2021), 《기억의 역전》(2016), 《고전통변》(2014) 등이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는 《근대전환기 문화들의 전환과 메타모포시스》(2021), 《동아시아에서 세계를 보면》(2017), 《한국의 근현대, 개념으로 읽다》(2016), 《민음 한국사: 19세기, 인민의 탄생》(2015), 《두 시점의 개념사》(2013),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개념의 힘》(2013) 등이 있다. 함께 번역한 책으로는 《신역 정조실록》(2019), 《음빙실자유서》(2017) 등이 있다.
최근의 관심사는 한국에서 사상사의 탄생, 한국인이 생각한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 학계의 실학 만들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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