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6명)

이전

저 : 나쓰메 소세키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나쓰메 소세키
관심작가 알림신청
Natsume Soseki,なつめ そうせき,夏目 漱石,나츠메 긴노스케 夏目 金之助
소설가이자 평론가, 영문학자.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 작가로, 일본에서 소위 ‘국민 작가’로 불리며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문학을 대표하며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확고한 문학적 위치에 있는 일본의 국민작가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로 일본 도쿄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후 바로 양자로 보내졌다가 9세에 본가로 다시 돌아왔다. 청년 시절에는 친부모와 양부모 사이의 불화가 이어졌는데 그때의 경험은 자전적 소설 『한눈팔기』에 등장하기도 한다. 도쿄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제1고등학교 시절에 가인(歌人)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를 알게 되어 문학적, 인간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도쿄고등사범학교·제5고등학교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893년 도쿄제국대학을 영문과를 졸업하고 1900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된다. 영국 유학 중 신경 쇠약에 빠진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예민하고 우울한 자아를 남겼으며, 귀국 후 도쿄제국대학 강사로 일했지만 다시 정신 질환을 앓는다. 그는 치유의 한 방편으로 1905년, 다카하마 교시의 권유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1905년 『호토토기스(두견)』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906)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불혹에 가까운 나이로 소설 창작을 시작했지만, 소설가이기 전에 그는 이미 뛰어난 하이쿠(俳句) 시인이었고 영문학자였다.
교직 생활과 소설 창작을 동시에 병행해야 하는 데에 고충을 느끼던 소세키는 아사히(朝日)신문사의 전속 작가 초빙을 받아들여 교직을 떠나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1907년에 교직을 사임하였으며 아사히[朝日]신문사에 입사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를 연재하고 『도련님』(1906), 『풀베개[草枕]』(1906)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대부분의 저작은 아사히 신문을 통해 발표되었다. 그는 초기의 경쾌하고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들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간의 심층 심리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그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20세기 초 근대적 주체와 삶의 불안한 내면 풍경을 깊은 통찰력으로 꿰뚫어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은 일본적 감수성과 윤리관으로 서구 근대의 기계문명과 자본주의를 비평적으로 바라보며 인간세계를 조명하고자 했다. 경쾌한 리듬과 유머를 바탕으로 권선징악과 같은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기반을 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며 템포가 빠르고 리듬감이 있는 문체로 자연스레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소설 외에도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의 작풍은 당시 전성기에 있던 자연주의에 대하여 고답적인 입장이었으며, 그후 『산시로[三四郞]』(1908), 『그후』(1906), 『문(門)』(1910)의 3부작에서는 심리적 작풍을 강화하였고, 다시 『피안 지나기까지』(1912), 『마음』(1914) 등에서는 근대인이 지닌 자아·이기주의를 예리하게 파헤쳤다. 반복적인 위궤양, 당뇨 등을 앓았던 그는 1916년 12월 병이 악화되어 『명암』 집필 중 49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으며, 1984년, 영국에서 그가 살았던 집 맞은편에는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대표작으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坊っちゃん)』, 『풀 베개(草枕)』, 『산시로(三四?)』, 『마음(こころ)』, 『노방초(道草)』 『명암』(미완) 등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상품

저 : 아리시마 다케오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아리시마 다케오
관심작가 알림신청
Takeo Arishima,ありしま たけお,有島 武郞
일본의 소설가. 어릴 때부터 미션 스쿨에 다니며 서양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때의 경험이 이 책에 실린 「한 송이 포도」를 낳았다. 그 후 가쿠슈인 예비과와 중등과를 졸업하고, 이어서 삿포로농업학교(현재 홋카이도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했다. 190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하버포드대학원과 하버드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07년 일본으로 돌아와 도호쿠대학교 농과대학, 삿포로농업학교 등에서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쳤으며, 1910년 동인지 『백화(白樺)』에 참가하여 소설과 평론을 중심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아내와 아버지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이 시기부터 많은 소설을 발표하고 작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소설 말고도 동화, 연극, 사회 평론, 미술 평론 등 다양한 글을 썼다. 대표작으로 『카인의 후예(カインの末裔)』, 『어떤 여자(或る女)』, 『선언 하나(宣言一つ)』 등이 있다. 1923년에 『부인공론(婦人公論)』의 기자이자 유부녀였던 하타노 아키코와 동반 자살했다. 1963년, 홋카이도 신문사가 홋카이도와 인연이 깊은 아리시마 다케오를 기리기 위해 ‘아리시마 청소년 문예상’을 만들었다. 홋카이도 내의 중학생과 고교생들의 문학 작품을 뽑아서 매년 상을 주고 있다.

아리시마 다케오의 다른 상품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

16,640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 명단편선 8

일본 명단편선 8

19,840

'일본 명단편선 8' 상세페이지 이동

테마명작관 2 - 가족

테마명작관 2 - 가족

5,500

'테마명작관 2 - 가족' 상세페이지 이동

저 : 하야시 후미코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하야시 후미코
관심작가 알림신청
Fumiko Hayashi,はやし ふみこ,林 芙美子
1903~1951.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후쿠오카 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여학교 졸업 후 도쿄에 올라와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를 꿈꾸며 고단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1930년 자신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방랑기』를 출판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대공황의 와중에도 60만 부나 팔린 『방랑기』를 비롯한 그녀의 작품은 당시 도시 생활자의 밑바닥 삶, 특히 여성의 자립과 가족, 사회 문제를 생생하게 그려내 대중에게 사랑받았고 사후에도 다수의 작품이 영화, 연극, 드라마로 제작됐다. 1948년 제3회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청빈의 서』, 『만국』, 『뜬구름』, 『밥』 등이 있다.

하야시 후미코의 다른 상품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11,500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12

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12

10,200

'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12'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11

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11

12,000

'일본 근현대 여성문학 선집 11'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 명단편선 9

일본 명단편선 9

18,240

'일본 명단편선 9' 상세페이지 이동

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관심작가 알림신청
Ryuunosuke Akutagawa,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芥川 龍之介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1892년 도쿄의 서민 지역인 시타마치에서 태어났다. 외가에 양자로 들어가 두 이모가 그를 양육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도쿄제일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해 차석으로 졸업했다. 기쿠치 칸, 구메 마사오 등과 재학생 시절 동인지 『신사조』를 발간해 『라쇼몬』 『코』 등의 단편을 발표했는데 나츠메 소세키로부터 단편 『코』가 절찬을 받으며 일약 다이쇼 시대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전공인 영문학을 비롯해 프랑스, 독일, 러시아문학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아 간결하면서도 평이하고 명쾌한 필치가 특징이지만 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왕조물’, ‘기독교물’, ‘에도물’, ‘개화기물’, ‘현대물’ 등의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나생문(羅生門)』, 『마죽(芋粥)』 등 150편 정도의 단편 소설을 남겼다.

초기에는 일본 고대 설화 문학에서 소재를 취해 보편적이면서 현대적인 인간 에고이즘의 내면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썼고, 이후 예술지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들, 에도 시대 그리스도교 박해를 다룬 기리시탄 작품들, 일본의 근대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 등을 쓰다가 말년에는 자살을 염두에 둔 듯 자신의 삶을 무자비하게 조롱하고 야유하는 자전적인 작품들이 많다. 1927년 7월 24일 새벽, 비가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다바타의 자택에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했다. 그가 밝힌 자살의 이유는 ‘장래에 대한 그저 막연한 불안’이었다. 아쿠타가와의 자살은 관동대지진과 더불어 일본 근대사에서 다이쇼라는 한 시대의 종언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던졌다. 1935년 아쿠타가와의 친구였던 문예춘추의 사주 기쿠치 칸이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했고 현재까지도 이 상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으로 인정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다른 상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청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청춘

10,500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청춘' 상세페이지 이동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

14,000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 상세페이지 이동

작가의 산책

작가의 산책

10,500

'작가의 산책' 상세페이지 이동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18,000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 근대 아동문학 걸작선

일본 근대 아동문학 걸작선

16,000

'일본 근대 아동문학 걸작선'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 명단편선 10

일본 명단편선 10

16,640

'일본 명단편선 10' 상세페이지 이동

저 : 다야마 가타이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다야마 가타이
관심작가 알림신청
Tayama Katai,だやま がたい,田山 花袋
도치기현 온라쿠군(邑?郡) 다테바야시초(館林町)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현재의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이다. 다야마 쇼쥬로와 테츠 부부의 차남으로서 태어났다. 다야마 가타이의 집은, 대대로 아키모토 번의 무사 집안 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877년 서남전쟁 때에 경시청 순사로서 종군하여 전사했다. 다야마 가타이는 12살부터 한학숙에서 한시문을 배웠고, 14세 때에는 한시집을 엮을 정도록 한학에 뛰어났다. 또 게이엔파의 와카나 서양문학도 가까이했다고 한다.

형을 따라 상경하여, 1890년, 야나기타 구니오를 알게 된다. 다음해에 오자키 고요의 밑으로 입문하여, 그의 지시로 에미 스이인의 지도를 받는다. "참외밭"를 처음으로 발표하고 다음해부터 본명 로쿠야 대신 가타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당초는 겐유샤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1896년에 구니키다 돗포, 시마자키 도손과 알게 된다. 다음해, 돗포, 구니오들과 "서정시"를 간행하여, 여기에 40편의 시를 실는 등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 한다. 모파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1902년에 "아카츠키 총서"의 제5편으로서 썼던 "쥬자에몬의 최후"를 발표하여, 이 작품으로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게 된다. 1899년에 결혼하여, 오하시 오토와의 소개로 하쿠분칸(博文館)에 근무하여, 교정 일을 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는 제2군 사진반으로서 종군하게된다. 전쟁을 겪은 후 자연주의 문학 분야를 자각하여, 평론 "노골적인 묘사"니 소설 "소녀병"을 발표하여, 새로운 문학의 담당자로서 활약하게 된다. 1906년 하쿠분샤로부터 "문장세계"가 창간되자 편집 주임이 된다. 문장세계는 당초 실용문의 투서 잡지를 목적으로 발행되었지만, 다야마들의 영향을 받게되어 자연주의 문학의 거점이 된다. 1907년에, 중년작가의 여제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그렸던 "이불"을 발표했다. 여제자와 헤어졌던 남자가, 그녀가 사용하였던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으며, 슬퍼한다라는 묘사는, 독자, 더 나아가 문단에 충격을 주게 되었다. 이 작품에 의해서,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의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거기다가 "생(生)", "처(妻)," "연(緣)의 장편 3부작, 장편소설 "시골교사"를 써, 도손과 나란히 시대를 대표하는 자연주의 작가가 되었다. 다이쇼 시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자연파의 쇠퇴와 신예 작가의 등장으로 문단의 주류로부터 밀려나게되지만 "일등병의 총살"등의 작품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만년은 종교적 심경에 이르러, 정신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28년 말에 뇌일혈로 입원했다. 거기다가 후두암에 걸려, 1930년 5월13일, 자택에서 향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도손의 글이 새겨진 묘는 다마영원(多磨園)에 있다. 그는 유언에 따라 토장되었으며 현재 다테바야시시(館林市)에는 다야마 가타이 기념관이 있다.

다야마 가타이의 다른 상품

역 : 오석륜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역 : 오석륜
관심작가 알림신청
吳錫崙
1963년생으로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시인, 번역문학가,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로, 시인, 번역가, 칼럼니스트 등, 인문학 관련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다.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이며, 문화체육관광부·한국연구재단 등, 정부 여러 부처의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동국대학교 일어일문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인재개발원 주임교수를 지냈고, 동국대학교, 중앙대학교, 광운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등에서 일본문학과 일본어를 강의하였다. 전공은 일본 근현대문학(시)이다. 그동안 펴낸 저서 및 역서로, 시집 『파문의 그늘』(시인동네, 2018)을 비롯해,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시를 읽는다』(역락, 2019), 『일본어 번역 실무 연습』(시사일본어사, 2013), 『일본 하이쿠 선집』(책세상, 2006), 『풀 베개』(책세상, 2005), 『미디어 문화와 상호 이미지 형성』(九州大學 出版部, 2006, 일본어판, 공저), 『도련님』(가지 않은 길, 2013), 『일본 단편소설 걸작선』(2009, 행복한 책읽기), 『미요시 다쓰지 시선집』(小花, 2005), 『2번째 키스』(개미, 2004), 『조선 청년 역도산』(북&북스, 2004), 『일본 대표 단편선』(전 3권, 공역, 고려원, 1996), 『한국사람 다치하라 세이슈』(고려원, 1993), 『그 여자는 낮은 땅에 살지 않는다』(책나무, 1990)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일본 문학과 관련한 많은 논문이 있다.

오석륜의 다른 상품

미요시 다쓰지 시를 읽는다

미요시 다쓰지 시를 읽는다

27,000

'미요시 다쓰지 시를 읽는다'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 하이쿠 선집

일본 하이쿠 선집

9,500

'일본 하이쿠 선집' 상세페이지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