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출연진 소개(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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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엘리아 카잔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감독 : 엘리아 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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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as Kazanjoglou
엘리아 카잔은 1909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터키 사람은 아니었고, 그의 양친은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사업을 하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카잔이 2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베를린으로 옮겼으나 부친의 사업이 여의치 않자 그의 아버지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먼저 미국으로 떠났고, 나중엔 가족까지 모두 불러들였다. 뉴욕에 정착한 카잔은 예일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한 뒤 대학의 추천을 받아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차츰 능력을 인정받은 카잔은 조연출을 거쳐 마침내 무대 연기자로 데뷔한다. 한편 엘리아 카잔은 영화 만들기에도 관심을 보여 동료들과 함께 몇 편의 실험성 강한 전위적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연출자로 승진한 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모두가 나의 아들들> 같은 무대극을 연출한다. 꾸준히 단편영화와 연극을 오가면서 활동을 하던 엘리아 카잔에게 첫 장편영화의 연출기회가 온 것은 1945년에 만든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 A Tree Grows in Brooklyn>였다. 이후 1950년대까지 데릴 자눅이 사장으로 있던 20세기 폭스사는 그가 주옥같은 할리우드 명작을 만드는 터전이 되었다.

이후 작품들은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늘 사회적인 이슈들에 관심을 두었다. <부머랭 boo-merang>(1947)과 <거리의 혼란 Panic in the Streets>(1950)은 깔끔한 범죄드라마로서 오해와 저항, 이해의 부족을 무릅쓰고 개인과 대중을 위해 일하는 정부 관리들의 용기 있는 행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다작의 해 1947년에 그가 내놓은 세 번째 작품 <신사협정 Gentleman’s Agreement>으로 완성도 면에서 높은 평가를 얻고 그해 아카데미에서 작품, 감독, 여우주연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둔다. <신사협정>은 일관되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카잔의 ‘냉정한 리얼리즘’이 반유대주의를 소재로 하여 최초로 꽃피운 작품이다. 1949년 만든 <핑키 Pinky> 역시 인종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후 카잔은 무대 시절 연출했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1951)를 연출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말론 브랜도라는 신인 연기자를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으나 비비안 리의 연기는 기대에 못 미쳤으며, 연극무대를 지극히 양식적으로 영화로 옮겼다는 평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1952년 카잔은 미국의 마녀사냥, 매카시 선풍이 불어 닥치고 있는 가운데, 의회 반민주활동위원회에 소환되어 자신이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공산당원 이었음을 고백하고 자신이 알고 있었던 당원들의 이름을 댔다. 일종의 변절을 한 셈인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 경력이 과오였음을 인정하고 공산주의와 공산주의들을 색출하는 데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실었다. 이때부터 카잔의 영화 경력에서 자신의 정치적 태도의 변화를 공개적으로 정당화하는 미묘한 변화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해 52년에 만든 <혁명아 자바타 Viva Zapata!>는 사바타의 일대기를 통해, 독재 정권과 같은 전체주의적 방법에 의해서는 결코 혁명이 달성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또한 <팽팽한 줄에 매달린 사나이 Man on a Tightrope>(1953) 역시 냉전기간에 소련에서 탈출하는 체코의 서커스단을 묘사한 반공영화였다.

이러한 점은 그의 가장 뛰어난 영화 <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1954)에 이르러서도 미묘하게 반영된다. 이 영화는 부두 노동자와 자본 계급간의 대립을 빌려 정부에 대한 범죄 행위를 제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말론 브랜도가 부두 노동조합의 깡패집단을 정부에 고발한 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외칠 때 자신도 동일하게 뜨거운 느낌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워터프론트>는 강렬하지만 자연스러운 연기방법과 네오리얼리즘적인 연출이 결합된 것이기도 했다(예를 들어 그는 부두 노동자들이 나오는 신에서 실제 부두 노동자들을 썼다). 이 한 작품으로 그는 정치적으로 다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6개의 오스카상을 거머쥐었다.
연극에서 시작한 그의 경력은 배우들을 다루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와 리 스트라스버그는 1947년 이제는 고전적인 연기방법의 하나인 메소드 연기법의 효시가 되는 연기학교 ‘액터즈 스튜디오’의 문을 연다. 이후 1950년대 카잔의 영화들은 액터즈 스튜디오의 제자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말론 브랜도를 위시하여 제임스 딘(<에덴의 동쪽> 1955), 캐롤 베이커(<베이비 돌> 1956), 앤디 그리피스(<군중속의 얼굴> 1957), 내털리 우드와 워런 비티(<초원의 빛> 1961) 등은 그의 지휘 아래 21개의 오스카 후보와 9개의 오스카 주연 배우상을 따내는 성과를 올렸다.

1955년 카잔은 존 스타인벡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카인과 아벨을 모티브로 한 영화 <에덴의 동쪽>으로 당시 젊은이들의 좌절과 절망을 생생한 터치로 그려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가족 간의 굴레와 애증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고, 이러한 그들의 처지는 당시 사회상인 전시상황과 맞물리면서 더욱 그 주제와 감동이 증폭되었다. 이러한 일그러진 청춘군상과 가족 간의 갈등은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lass>(1961)에서도 유사하게 동어 반복되는 것이었다. 이후 대중적 인기 속에 존재하는 엄청난 정치적 힘을 알아차리게 되는 라디오 텔레비전 진행자의 이야기 <군중속의 얼굴 A Face in the Crowd>(1957)과 테네시 계곡의 댐 공사를 사이에 두고 정부와 개인의 갈등을 그리는 <야성의 강 Wild River>을 끝으로 그의 사회 영화들은 막을 내린다. 1960년대 이후 그는 자신의 주특기인 연극의 영화화나 사회적인 이슈들보다는 좀 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프로젝트들을 진행시킨다.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민사를 영화화한 작품 <아메리카, 아메리카 America America>(1963), 역시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 <열망 Arrangement>(1969)와 고국에서 찍은 16mm영화인 <방문자 The Visitors>(1972) 등은 흥행이나 비평 측면에서 완전히 실패를 면치 못하는 부진의 연속이었다. 무대와 영화연출을 오가며 계속 작업을 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그는 1976년 <마지막 거물 The Last Tycoon>을 끝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 감 독
1976 라스트 타이쿤 (The Last Tycoon)
1963 아메리카, 아메리카 (America, America)
1961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
1956 아기 인형 (Baby Doll)
1955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
1954 워터 프론트 (On the Waterfront)
1951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Streetcar Named Desire, A)
1950 거리의 공황 (Panic in the Streets)
1949 핑키 (Pinky)
1947 신사협정 (Gentleman's Agreement)
1947 씨 오브 그래스 (The Sea of Grass)

- 각 본
1947 신사협정 (Gentleman's Agreement)

- 제 작
1961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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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론 브란도
정말로 비대한 덩치에 유난히 괴벽스러운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난 말론 브랜도. 그의 말년의 행동들은 전후 배우의 표준으로 여겨졌던 젊은 시절의 명망을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그 표준에 그 자신조차 미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50년부터 1972년까지 그의 영예로운 전성기 동안 그는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화배우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브랜도에게는 누이가 둘 있었고 부모는 알코올중독자였다. 아버지는 집에 없는 적이 많았고 예술적인 성향을 지닌 어머니는 술에 취한 채 무너져 있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1943년에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다친 무릎 때문에 군대에도 입대하지 못하자 그는 누이들과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미래에 대한 아버지의 낮은 기대에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뉴욕스쿨의 드라마 워크숍에 등록한 그는 스텔라 아들러에게 연기를 배웠는데, 그녀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론을 적용하여 연기에 진정성을 불어넣기 위해 중요한 감정적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배우의 능력을 강조했다. 브랜도는 진정한 자신의 스타일로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이끌어 줄 영향으로 그 '메소드 연기법'을 채택하고, 1944년에 「아이 리멤버 마마」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했다. 굉장한 평가가 이어지면서 할리우드로 오라는 제안들이 있었지만 장기적인 계약에 따르는 제한들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6년 후에는 그도 뜻을 굽히고 신체가 마비된 군인들의 이야기인 「맨(1950)」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했다. 그 후 그는 연극 무대를 버리고 영화로 방향을 돌려 그때까지 어떤 배우들도 관객에게 선보인 적 없는 가장 비범하고 자극적이며 어려운 연기들을 보여 주었다. 1950년대 초의 작품들만 보아도 그에게 첫 아카데미후보의 영예를 안겨 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와 「혁명아 사파타(1952)」, 「줄리어스 시저(1953)」, 「위험한 질주(1953)」 그리고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게 한 「워터프론트(1954)」가 포진하고 있다. 1955년부터 1962년까지 브랜도는 박스오피스의 금광이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영화계에서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는 배우였다는 점이고, 1962년에는 「바운티 호의 반란」 한 편에 125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출연료를 받으며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높이 평가된 상업성은, 일반적으로 그에게 주어지던 '진지한 예술로서의 연기'의 선구자라는 인정과 더해지면서 압박감으로 작용했고, 결국 그가 변덕스럽고 이상한 행동을 하도록 몰고 갔다. 그런 그의 행동은 영화 제작 과정을 와해시키거나(「애꾸눈 잭(1961)」) 동업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브랜도가 다양한 욕망들을 -특히 음식과 여자들- 채우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자신을 낭비하고만 있다는 인식을 퍼뜨렸다.

브랜도라는 '브랜드' 되살리기
1960년대의 상업적으로 실패한 일련의 영화들(「어글리 아메리칸(1963)」, 「체이스(1966)」)과 함께 그러한 비판적인 견해는 더욱 확고히 뿌리내렸다. 그러다가 브랜도는 마리오 푸조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를 통해 다시 태어났다. 그가 연기한 돈 콜레오네라는 인물은 즉각 아이콘의 위치에 올랐고 그에게 또 하나의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안겨 주었다. 브랜도는 아카데미상을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러나 1972년은 뭐니뭐니해도 그의 가장 의미심장한 연기라 할 만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다.

말년의 활동은 간헐적이었다. 주로 우스꽝스럽고 지나치게 많은 출연료를 지불한 역할(「슈퍼맨(1978)」, 「포뮬라(1980)」, 「크리스포터 콜럼버스(1992)」, 「닥터 모로의 DNA(1996)」)이나 그의 연령과 아웃사이더라는 위치를 잘 살린 좋은 역할들(「미주리 브레이크(1976)」, 「지옥의 묵시록(1979)」, 「프레쉬맨(1990)」)이 조금 있었고,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뿌리(1979)」의 한 에피소드에도 출연해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떠들썩하게 보도된 그의 딸의 죽음까지 포함하여-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낭비였다.

그의 실망스러운 선택과 천재의 기벽을 알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브랜도가 연기예술에 지반을 뒤흔드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표준으로 우뚝 선 그는, 미국 특유의 연기 유파뿐 아니라 미국 특유의 남성상-남성적 특징과 여성적 특징을 조화시키고 거기에 계급의식까지 더한-이 자리할 하나의 우주를 창조해 냈다.


브랜도 신화

말론 브랜도는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배우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연기 스타일은 미국 연기에 혁명을 일으켰다. 스탠리 코왈스키와 돈 콜레오네를 비롯해 브랜도의 여러 인물들이 아이콘적 입지에 오른 것은 그가 즉석에서 이끌어 낸 즉흥연기의 성과였다. 그는 제임스 딘과 폴 뉴먼 등의 역할 모델이었고, 모든 미국 배우들을 평가하는 척도다.

·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 -잭 니콜슨, 브랜도와 '메소드 기법'과 자신의 연기 스타일에 미친 그의 영향에 관하여
· 그는 조명을 사랑해! 조명이 그를 통과하며 어떻게 빛나는지 보이지- 나는 편파적이면 안 되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야.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 이탈리아계 미국인이거나, 아니면 너무 탁월해서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그려낼 수 있는 배우를 원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래서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하고 물었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모르겠어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두 배우가 누굽니까? 로렌스 올리비에와 말론 브랜도죠. … 브랜도는 나의 영웅 중의 영웅이에요. 그를 만나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할 거예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대부」의 캐스팅에 관하여
· 그와 나는 공통점이 많아요. 그도 적을 많이 만들었죠. 그 역시 완벽주이자고요. -베티 데이비스, 자기와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 아카데미상을 받은 데 흥분해서.


"배우란, 당신이 그 자신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을 때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 자다."


출처 : 501 영화배우-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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