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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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 : Frederic Cho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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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쇼팽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다. ch는 폴란드어에서는 'h' 발음이 나지만, Chopin은 프랑스계 성씨이기 때문에 '쇼팽'이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쇼팽의'는 'Chopina'로 격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쇼페나'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Szopen'(쇼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쇼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서쪽으로 4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젤라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교구의 세례 기록에는 그의 생일을 1810년 2월 22일로, 이름을 라틴어로 프리데리쿠스 프란치스쿠스(라틴어: Fridericus Franciscus)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폴란드어로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가 된다. 그러나 쇼팽과 그의 가족들은 생일을 3월 1일로 기록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날짜를 진짜 생일로 인정한다.

프리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영어:Nicolas Chopin)은 프랑스 로렌 출신으로, 16세가 되던 1787년에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니콜라는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1806년에는 그가 가르쳤던 가문 중 하나인 스카르벡(Skarbek)의 가난한 친척인 테클라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폴란드어: Tekla Justyna Krzyzanowska)와 결혼했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브로후프(Brochow)에 있는 교회에서 181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 때 니콜라 쇼팽의 18살짜리 제자인 프리데리크 스카르벡을 대부로 삼았는데, 프리데리크라는 이름도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둘째이자 외아들로, 누나인 루드비카(Ludwika, 1807~1855),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 1811~1881)와 에밀리아(Emilia, 1812~1827)가 있었다. 니콜라는 폴란드에 헌신했으며, 가정에서도 폴란드어를 주로 사용하게 했다.

프리데리크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난 1810년 10월, 니콜라가 바르샤바 고등학교 (대학 전단계 학교, 1804~1831에 존재했음)(영어:폴란드어: Liceum Warszawskie)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됨에 따라 바르샤바에 있는 작센 궁정(영어:Saxon Palace) 1층으로 이사한다. 니콜라는 거기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머니는 하숙집 소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프리데리크의 체격은 왜소했으며, 어린 시절에 병에 자주 걸렸다.

그의 누이인 루드비카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종종 자신의 동생 프레데리크에게 놀이처럼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루드비카는 프레데리크의 재능을 눈치채었고, 결국 그들의 부모는 프레데리크가 공식적인 레슨을 받도록 한다. 공식적인 레슨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체코 음악가 보이치에흐 지브니(영어:폴란드어 Wojciech ?ywny)에게 1816년부터 1821년까지 교습을 받으면서 부터다. 누나 루드비카도 지브니에게 레슨을 받으며 프리데리크 등 남동생들과 가끔 듀엣을 하기도 했다. 쇼팽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7살 무렵에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사단조, 내림나장조의 두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1821년에는 내림가장조 폴로네이즈를 작곡해 지브니에게 헌정하는데, 그 원고는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쇼팽 원고가 된다. 12세 때부터 엘스너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 엘스너가 세운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들어가게 된다.

1817년 작센 궁전은 바르샤바의 러시아 총독에 의해 군사용으로 징발되었고, 바르샤바 강당은 오늘날 바르샤바 대학교의 총장 집무실인 카지미에슈 궁정(영어:Kazimierz Palace)에 다시 세워졌다. 쇼팽가는 카지미에슈 궁정에 인접한 건물로 이사한다다. 이 기간 동안, 프리데리크는 폴란드 입헌왕국의 통치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초대받아 그 아들과 종종 놀았는데, 거기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파블로비치 대공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율리안 우르신 니엠체비치(영어:Julian Ursyn Niemcewicz)는 그의 극적 에클로그 《우리들의 담론Nasze Przebiegi"(1818년)》에서 "꼬마 쇼팽"의 인기를 증언하고 있다.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e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e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핵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환상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e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였고 오로지 몇몇만이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였다. 실내악에 관하여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바르샤바에 살 때 쇼팽은 부흐홀츠의 피아노를 사용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사는 동안에는 플라이에에서 악기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플라이에(Pleyel et Cie)의 피아노를 '그 이상은 없다'는 뜻의 "비 플러스 울트라"로 평가한다. 리스트는 파리에서 쇼팽과 친구가되었고 쇼팽의 플라이에 피아노의 소리를 "수정과 물의 결합"으로 묘사한다. 런던에서 쇼팽은 "나는 3대의 피아노, 플라이에, 브로드우드 및 에라르드가 놓인 대형 응접실이 있다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2018 년 폴 맥널티가 만든 쇼팽의 부흐홀츠 피아노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바르샤바 쇼팽 연구소에서 최초의 시대 악기 국제 쇼팽 콩쿠르에 사용되었다.

연주 : 조성진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연주 :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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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Jin Cho
2015 제17회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우승
2014 제14회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 3위
2011 제6회 대원음악상 신인상
2011 제14회 차이콥스키기념 국제콩쿠르 피아노부문 3위
2009 제7회 일본 하마마쓰 국제피아노 콩쿠르 우승
2008 제6회 모스크바 국제청소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 심사위원상
2008 제6회 모스크바 국제청소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 오케스트라 협연상
2008 제6회 모스크바 국제청소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 1위

파리국립고등음악원 졸업

연주 : Helene Grimaud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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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그리모
프랑스의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뉴욕 사우스 세일럼에있는 Wolf Conservation Center의 설립자.

엘렌 그리모는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마르세이유 음악원에서 삐에르 발비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2살에 파리 콩세르바트와 국립 음악원에서는 자끄 뤼비에르, 레온 플라이셔, 죄르지 산도르에게 사사했다.

1987년은 그녀의 음악 생활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엘렌은 깐느 미뎀 (MIDEM : 국제 음반 박람회)클래식상을 수상했고 , 그 연주의 라이브 방송을 들은 다니엘 바렌보임은 즉시 그녀에게 오디션을 제의했다. 이후 파리 오케스트라의 협연 초청과 라로끄 당떼롱 피아노 페스티벌에서의 초연을 포함한 높은 수준의 공연 요청이 이어졌고, 도쿄에서도 연주 데뷔를 하게 되었다. 이후 엘렌 그리모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NHK 심포니, 그리고 뮌헨 필하모닉 등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동부에서 서부에 이르기까지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워싱턴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다.

음악 생활 초기부터 그리모는 샤이, 게르기에프, 하이팅크, 아쉬케나지, 살로넨, 테미르카노프, 진만 등 수준 높은 지휘자와 함께 했다. 2008년 10월 BBC 프롬스의 마지막 날 연주에서 그녀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투어 했던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다니엘 하딩이 지휘하는 말러 체임버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했고, 필립 조단이 지휘하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와 연주했다. 2009년 봄에 그녀는 바흐의 피아노 콘체르토 D 단조와 실베스트로프의 소품으로 바이에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유럽 투어를 했다. 열정적인 실내악 음악가이자 독주 연주자로서 엘렌은 토마스 크바스토프와 외르크 비트만, 크리스틴 쉐퍼, 르노 카푸숑 등과 함께 일류의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음악의 중심지에서 연주하게 된다.

2002년 엘렌 그리모는 독일 그라모폰 레이블과 독점적인 음반 계약을 맺고, 바흐 음악과 솔로작품들, 라이브 녹음음반, 그리고 D 마이너 콘체르토를 발매했고, 브레멘 도이치 캄머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키보드 작업을 디렉팅했다. DGG 이전의 음반으로는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가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와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 5번이 있었다. 이후 DGG에서 발매한 음반으로 요하네스 브람스와 로베르토, 클라라 슈만의 작품을 연주한 '리플렉션' 음반과 베토벤과 페르트의 작품을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스웨덴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 '크레도' 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독주 음반, 피에르 볼레즈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함께 녹음한 바르토크의 피아노 콘체르토 3번 등이 있다. 15세부터 음반을 발매한 연주자로서 그녀의 초기 작업들로는 리스트, 라벨, 라흐마니노프, 슈트라우스, 거쉬인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무수한 수상 경력도 있는 엘렌 그리모는 고향인 프랑스에서도 높이 평가 되었다. 2002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수여하는 예술문학훈장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국가공로훈장 기사장을 수여했다. 2005년에는 에코 음악상의 ‘올해의 연주자’부문을 수상했다. 그리모는 '야생의 변주' 와 '특별 수업' 두 권의 책을 써서 로베르 라퐁에서 출판했다. '야생의 변주' 는 영어를 비롯해 각국으로 변역 출간되었다. 두 책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했고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지속적으로 늑대 보호운동을 해오던 엘렌 그리모는 1999년 늑대 보호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다.

연주 : Lang Lang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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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랑
뉴욕타임즈가 “클래식계에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로 찬사를 받고 있는 랑랑은 파워풀하고 화려한 연주로 세계 청중을 사로잡고 있다. 1982년 중국 선양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살 때에는 선양 피아노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첫 독주회를 가졌다. 또 열세 살 때에는 차이코프스키 영 뮤지션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다.

랑랑은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그리고 미국의 빅 파이브라 불리는 모든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최초의 중국 피아니스트이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클래식 음악가로는 이례적으로 연주를 해 스타 파워를 증명했다. 그리고 2008년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지휘로 한국에서 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하였다.

한편 랑랑은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의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많은 어린이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보냈으며, 2008년 중국 쓰촨성에 지진이 났을 때에는 자신의 피아노를 경매에 붙여 피해자들을 돕기도 했다. 현재 랑랑은 자신의 힘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랑랑 국제 음악 재단’을 설립하여, 재능은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음악 할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세계의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연주 : Maria Joao Pires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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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주앙 피레스
4세에 공개무대에서 연주하고 5세에 첫 리사이틀, 7세에 모차르트의 협주곡연주, 9세에 포르투갈의 ‘젊은 음악상’에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천재성을 주목받았다. 1961년 17세 때 구르벤키안 재단의 장학금으로 뮌헨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엥겔과 슈미트를 사사하면서 그 재능을 본격적으로 꽃피웠다. 70년 브뤼셀에서 열린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콩쿠르의 우승을 계기로 국제 무대로의 길이 열렸다. 단정한 스타일, 명쾌한 터치에서 오는 투명한 울림, 치밀하고 청결한 감각 등은 특히 모차르트에서 십분 발휘되며, 일본 컬럼비아의 『모차르트/피아노 소나타 전집』 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 베를린 음악 콩쿠르 제2위
리스트 콘체르트상 제1위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콩쿠르 제1위

연주 : Maurizio Pollini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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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폴리니
1942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열살 때 첫 콘서트를 열었다. 특히 1960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국제 쇼팽 콩쿨에서 우승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 심사위원장이었던 A.루빈스타인이 폴리니를 가리켜 "기교상으로는 우리들보다 훨씬 낫다"라고 극찬할 만큼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면서 그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바 있다. 그러나 폴리니는 그로부터 10년간을 연주일선에 나타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내적인 성숙을 기다려 왔다. 그런 후 73년도부터 레코딩에 들어가 쇼팽을 필두로 녹음을 진행시켜 가면서 무르익은 피아니즘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폴리니는 쇼팽 위주의 연주에서 벗어나 현대곡까지를 레퍼터리로 확보해가면서 폭넓은 비약을 꾀한다. 그러나 아루트르 루빈스타인이 타계한 지금, 폴리니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쇼팽 연주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연주 : Martha Argerich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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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아르헤리치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세 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음악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빼어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열한 살에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극장 테아트로 콜론에 데뷔했다. 1955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해 프리드리히 굴다의 제자가 되었고, 1957년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1960년 연주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슬럼프를 겪던 아르헤리치는 1965년 제7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녀의 연주는 쇼팽 해석을 혁신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음반과 공연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며 숱한 명반과 명연을 남겼다. 현란한 테크닉과 파워풀한 타건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그녀는 〈BBC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9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녀는 독주 무대 대신 실내악 협연 위주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과 협연을 이어오고 있다. 또 루가노 페스티벌, 벳푸 아르헤리치 페스티벌 등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공연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그녀에게는 성姓이 다른 세 딸, 1964년 중국 출신 지휘자 첸량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다 첸, 1970년 두 번째 남편이었던 지휘자 샤를 뒤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니 뒤투아, 1975년 연인이었던 피아니스트 스티븐 코바세비치와의 사이에서 낳은 스테파니 아르헤리치가 있다. 엄마로서 아르헤리치의 모습은 스테파니가 감독한 다큐멘터리영화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세 딸들Bloody daughter〉에 담겨 있다.

1992년 암(악성 흑색종)을 진단받은 그녀는 1997년 병이 재발했지만 회복해 완치되었다. 여든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