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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로베스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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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spierre, Maximilien-Francois-Marie-Isadore de
로베스피에르는 아라스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마저 집을 나간 뒤 형제자매들과 함께 외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1781년 법학학위를 받고 아라스로 돌아와 변호사가 되었으며, 누이 샤를로트와 함께 외가에서 독립했다. 오래지 않아 명성을 얻었고, 주교관구의 성직자에 대한 사법권을 갖는 주교법원(Salle Episcopale) 판사로 임명되었다. 아라스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으며, '불명예 구금(拘禁)에 관한 보고 Memoire sur les peines infamantes'로 메스 아카데미에서 1등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 소집이 선포된 후, '아르투아 삼부회를 개혁할 필요성에 관해 아르투아 민중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냈다. 1789년 3월 아라스의 시민들은 로베스피에르를 대표의 1사람으로 뽑았으며, 아르투아 지구의 제3신분(평민계급)회는 아르투아 8인 대표위원 가운데 5번째로 그를 선출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베르사유 시절뿐만 아니라 그뒤 파리에서도 검소한 생활양식, 소박한 예의범절을 지켜나갔다.

로베스피에르는 국민의회의 어떤 위원회에도 속하지 못했고, 의장으로 뽑히지도 못했다. 단 한번 1790년 6월 국민의회 서기로 선출된 일이 있으며 그보다 앞서 4월에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밀고나가는 정치단체인 자코뱅당 당수직을 맡았다. 헌법을 기초하고 있던 국민의회에서 자기 역할에 전념하였고, 1791년 9월 3일에 제정된 프랑스 헌법의 전문을 이루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이의 준수를 촉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은 물론 동료들을 새로 생긴 입법의회에서 제외시켰으며, 1791년 6월에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파리 검찰관으로 선출되었지만 이 직책도 포기하고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지롱드당의 몰락 후, 산악파는 반프랑스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혁명의 승리를 위해 '단일한 하나의 의지'(une volonte une)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혁명정부의 필수 권력기관들이 창설되고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나서서 그 기관들을 움직였다.

1793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4월에 창설된 공안위원회에서 직책을 맡았다. 동료들이 외교사절로 떠나 있거나 특별한 임무에 몰두해 있는 동안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파 단체와 자경단을 동원해 혁명세력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대규모 징병, 독재적 경제관리, 전면전을 위해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국민공회에서 6월 4일, 220표 중 216표의 지지로 그는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혁명 체제의 모든 적들을 심판하기 위해 1793년 3월에 창설한 혁명재판소를 개편하는 프레리알(초원의 달) 22일(6. 10)의 법령이 공포된 뒤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반대는 더욱 커져갔다. 왕당파뿐 아니라 산악당 동료들까지 갖은 중상모략과 독재자라는 비난을 퍼뜨려 마음이 상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를 떠났으며, 1794년 여름 공포정치의 종말과 반대파의 급격한 부상을 한꺼번에 맞이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다시 여론의 지지를 얻을 목적으로 7월 23일 공안위원회와 7월 26일 국민공회에 모습을 나타내 자신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호소했으나, 그의 두번째 연설은 저지당했다. 입법의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생 오귀스탱 및 동료 3명을 고발하고 뤽상부르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파리 코뮌 정부가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는 봉기 주도를 거부했다. 국민공회에 의해 범법자로 선포된 로베스피에르는 시청에서 스스로 자신의 턱에 권총을 쏴 중상을 입었고, 국민공회 병사들에게 생포당했다.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혁명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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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슬라보예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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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voj Zizek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이자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세계적 석학.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8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컬럼비아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파리8대학교, 런던대학교 등 대서양을 넘나들며 세계 주요 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 류블랴냐대학교 사회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버크벡연구소 인류학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1989년 국제적 명성을 안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 통찰을 바탕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대중문화를 자유롭게 꿰어내며 전방위적 지평의 사유를 전개하는 독보적인 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저서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새로운 계급투쟁』 등이 있고, 공저로 『거대한 후퇴』, 『지속 가능한 미래』, 『나의 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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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voj Zizek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이자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세계적 석학.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8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컬럼비아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파리8대학교, 런던대학교 등 대서양을 넘나들며 세계 주요 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 류블랴냐대학교 사회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버크벡연구소 인류학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1989년 국제적 명성을 안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 통찰을 바탕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대중문화를 자유롭게 꿰어내며 전방위적 지평의 사유를 전개하는 독보적인 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저서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새로운 계급투쟁』 등이 있고, 공저로 『거대한 후퇴』, 『지속 가능한 미래』, 『나의 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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