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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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정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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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암
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일성루一星樓·매심재每心齋다. 1758년(영조 34) 경기도 광주 마현(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정재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정약현, 삼남은 정약종, 사남은 정약용). 어릴 때 고향 근처의 남한강에서 동생들과 낚시를 즐겨서, 장성한 후에도 동생 약용과 함께 성균관을 몰래 빠져나와 낚시를 갈 정도로 호기심 많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1783년(26세)에 진사가 된 무렵 이벽과 교유하면서 서학과 천주교를 접하고 관심을 가졌다. 1790년 규장각 초계문신이 되고 1797년 병조좌랑까지 오르지만, 한때 서학에 몸담았다는 사실 때문에 모함을 받으며 벼슬길이 좌절되었다.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자 이듬해인 1801년 신유사옥으로 동생 정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참수되고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은 각각 신지도와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그해 9월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형제는 다시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유배 초기 6년을 소흑산도(우이도)에서 보냈는데, 감시가 너무 심해서 환멸을 느껴서 흑산도 사미촌(신안군 흑산면 사리)으로 옮겼고, 이후 아우 약용이 유배에서 풀릴 듯하다는 소식에 조금이라도 뭍과 가까운 곳에 있고자 다시 소흑산도(우이도)로 넘어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생을 다시 보지 못하고 1816년 6월 6일 우이도에서 59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자산어보》, 《표해시말》, 《송정사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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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이청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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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본관은 경주, 자는 금초琴招, 호는 청전靑田이다. 다산 정약용이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1806년 가을부터 1808년 초봄까지 이청의 집에 거처했다. 십대 시절에 정약용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차차 그의 저술을 도왔는데, 특히 경전과 역사 방면의 문헌 대조와 비교 및 검토에 능했다. 하지만 70세까지 과거에 응시해도 번번이 낙방하고 말았다. 정약용이 《여유당전서》를 저술할 때 중요한 조력자였고, 정약전의 초고인 《자산어보》를 수습하고 문헌 고증 및 일부 어종을 추가한 공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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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 정명현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역 : 정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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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경제연구소 소장. 고려대 유전공학과를 졸업하고, 도올서원과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서울대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전통 과학기술사를 전공하여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석사와 박사 논문은 각각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담긴 해양박물학의 성격」과 『서유구의 선진농법 제도화를 통한 국부창출론』이다. 『임원경제지』 중 『본리지』 · 『섬용지』 · 『유예지』 · 『상택지』 · 『예규지』 · 『이운지』를 공역했다. 또 다른 역주서로 『자산어보: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이 있고, 『임원경제지: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을 민철기 등과 옮기고 썼다. 현재 임원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인제지』 번역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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