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출연진 소개(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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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르네 끌레르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감독 : 르네 끌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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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 Clair
1930년대 프랑스영화의 황금기 시절 르네 클레르는 장 르누아르나 마르셀 카르네 같은 감독보다도 더 대접받는 작가였다. 앙드레 바쟁의 말대로 당시 르네 클레르는 채플린 이래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의 하나였고 그의 매력적인 코미디들은 지적 풍요로움과 샴페인 같은 영화보기의 유쾌함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50년대를 고비로 그의 평가는 점점 추락일변도의 하강곡선을 그리며 동시대 작가 감독들의 반열에서 멀어져 갔는데, 그것은 복잡한 삶의 현실에서 도망가려는 영화의 과도한 단순함과 순진함 때문이었다.
1898년 파리의 센 강변에서 태어난 르네 클레르는 영화평론가이자 배우로 활약하던 중 영화제작에 매력을 느끼고 자크 드 바로셀로니 감독 밑의 조수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1924년 그는 <간주곡 Ent’r, ract>과 <파리는 잠들고 있다 Paris qui dort>를 내놓으면서 일약 영화계의 주목을 끄는 재능있는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영화는 사회풍자적인 요소와 초현실주의적 환상을 결합한 코믹판타지 물로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백일몽의 이미지는 그의 후기작품까지 계속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까지 클레르의 초기 경력에 열쇠가 되는 영화들, <파리의 지붕밑 Sous les toits de Paris>(1930) <백만장자 Le million>(1931) <우리에게 자유를 A Nous la Libert (1931) <독립기념일 Quar-toze Juillet>(1933)은 국제적으로도 명망이 높은 프랑스 초기 유성영화들이었다.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옮겨간 그는 본격적인 유성영화보다는 청각적으로 윤색된 무성영화를 실험했으며, 그는 음악과 소음들을 기상천외하게(벌판의 한 송이 꽃이 노래로 활짝 피거나) 또는 풍자적으로(감옥에서처럼 공장에서도 같은 음악과 단조로운 소리들이 계속되는 일관 작업) 사용했다. 기계화된 산업사회와 인간의 탐욕을 비판적으로 풍자한 <우리에게 자유를>은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파리의 지붕 밑>과 <독립기념일>은 로맨스와 사회적 풍자와 오페레타적 환상이 섞여 달콤한 파리거리와 파리사람을 보여주는 그의 아이콘 같은 영화들이다.

1934년 <마지막 백만장자 Le Dernier Milliardaire>의 실패로 파리를 떠난 후 클레르는 16년간 프랑스 밖에서 영화제작을 하게 된다. 영국에서 만든 <유령은 서쪽으로 간다 The Ghost Goes to West>와 <뉴스를 전 합니다 Break the News>는 그의 국제적 명성을 확고히 해준 출세작들이었으며, 1940년대 초반 할리우드에서 만든 네 작품 <뉴올리언스의 불빛 The Flame of New Orleans> <나는 마녀와 결혼했다 I Married a Witch>(1942) <내일 일어날 일 It Happened Tomorrow> (1944) <그리고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1945)는 그의 초기작들에 비해 다소 관습적이고 그만의 독특한 색깔이 바랜 감이 있으나 시각적으로는 매우 스타일이 넘치는 것들이었다.1947년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되자 르네 클레르도 고향으로 돌아온다. <위대한 전략 Le Grand Maneuver>(1955) <릴라의 문 Porte des Lilas>(1957) 같은 비극과 살인이 뒤섞인 좀더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에 도전했으나 이러한 시도가 그가 누렸던 감독 초기의 영광을 되돌려 주지는 못했다.

50년대 후반 그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에게 ‘극복해야 할 프랑스영화계의 아버지’로서 공격의 포화를 맞게 된다. 트뤼포는 클레르식의 스튜디오 촬영에 국한되고 깊이 있는 정서가 결여된 인공물의 영화보다는, 르누아르나 장 비고가 보여주었던 서정적인 비장미와 삶에 대해 명확한 해석과 주제의식이 분명한 영화들에 더 프랑스적인 가치를 두었다. 비록 그가 이전과 같이 가장 위대한 감독의 반열에 들지 못할지라도, 감독의 지성과 대중의 인기라는 행복한 만남을 실현한 선두주자로 그가 1930년대 프랑스영화의 황금기를 연 장본인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또한 그가 저술한 <시네마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고전적 영화교과서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그가 보여준 소리와 발성에 대한 실험정신, 움직임과 내레이션 기법의 독창성, 초현실적 이미지를 통한 획일화된 시간개념에서의 해방 등 영화 자체에 대한 혁신들은 아직도 프랑스영화의 전통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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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알랑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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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Delon
17세 때 군에 지원,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제대 후에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칸 영화제에서 미국 영화제작자 데이빗 셀즈닉이 할리우드 진출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프랑스 영화계로 진출, <여자가 다가올 때 (Quand la femme s`en mêle)>(이브 알레그레 연출, 1957)로 정식 데뷔했고 <태양은 가득히>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80년 이후에는 감독, 제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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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들롱회고전_수영장(1969)|주연배우
알랭들롱회고전_암흑가의 세사람(1970)|주연배우
알랭들롱회고전_형사(1972)|주연배우
암흑가의 두 사람(1973)|주연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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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들롱회고전_세 번째 희생자(1980)|주연배우
알랭들롱회고전_형사 이야기(1981)|주연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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