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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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 김소월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사 :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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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素月, 김정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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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 어효선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사 : 어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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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해맑은 어린이의 마음을 담은 아름다운 노래말로 지금도 널리 불리는 동요『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비롯해,『꽃밭에서』『과꽃』등 수많은 동요와, 동시, 동화 들을 지었다. 그 동안 한정동 아동 문학상, 소천 아동 문학상, 대한 민국 문학상, KBS 동요 대상, 반달 동요 대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작품으로는 동요 동시집『봄 오는 소리』『인형 아기 잠』동화집『인형의 눈물』『종소리』『이상한 일기책』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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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 이원수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사 : 이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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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원(冬原)
1911년 경상남도 양산(梁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린이」지에 동요 「고향의 봄」이 당선되었으며 이 동요는 홍난파(洪蘭坡)에 의해 작곡되어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1927년 <기쁨사>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벌여 장편동화와 아동소설의 장르를 개척하고 한국 아동문학 이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광복 이후에는 동요시집을 출판하였는데, 1947년 『종달새』, 1948년 그림동화집 『봄잔치』, 1953년 장편동화 『숲속 나라』, 1960년 동화집 『파란 구슬』 등을 간행했고 그 밖에 1961년 『이원수아동문학독본』, 1962년 『어린이문학독본』 등을 내었다. 1971년 아동문학집 『고향의 봄』을 발간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대학강단에서 아동문학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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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 홍난파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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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蘭坡, 홍영후永厚
1989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홍순(洪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후(永厚)이고, 난파(蘭坡)는 호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2세(1912)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서 바이올린 수업을 시작했다. 15세(1913)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서 바이올린 및 악전대요를 공부하고,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생들의 크리스마스 축하 무대에서 독주를 했다.

16세(1914)에 김상운과 결혼하였다. 17세(1915)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교사로 2년간 근무했다. 18세(1916)에는 홍난파가 쓴 최초의 곡인 창가 「야구전」을 발표했다. 19세(1917)에 의학에 뜻을 두고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1년 후 중퇴했다. 『악전대요』(박문서관), 『명곡신집(明曲新集)』(박문서관), 『통속창가집』(박문서관), 『간이무답(簡易舞踏) 행진곡집』(박문서관), 『말 잘하는 사위』(광익서관), 『조선 정악보』(광익서관)를 펴냈다. 20세(1918년)에 부인 김상운이 사망한다. 도쿄의 우에노(上野)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21세(1919)에 도쿄에서 음악, 미술, 문학의 예술 잡지인 [삼광](삼광사)을 창간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해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했다.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 주간이 되어 음악 보급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 계신 K 형께」([삼광], 창간호), 「북변잡기(北邊雜記)」([매일신보] 8월 11일∼8월 19일) 등의 수필과 단편 소설 「바람과 빛」([삼광], 창간호), 음악 평론인 「창가 유희의 교육상의 효능」(『삼광』 2호)을 발표했다. 22세(1920년)에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도쿄 복학이 거절되었다. 소설 『허영(處榮)』([매일신보], 9월 3일∼11월 18일)을 60회 발표한다. 단편 소설 「처녀혼」([삼광], 3호)을 출간한다. 이 책 서두에 「애수」라는 곡명으로 멜로디를 게재하고 김형준(金亨俊)이 작사해 「봉선화」가 탄생하게 된다. 9월 도쿄에서 ‘폴란드 고아 구제 대음악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 이를 홍난파는 최초의 연주회라 했다. 수필 「석왕사유기(釋王寺遊記)」,([삼광], 3호), 번역 소설 「빈인(貧人)」([삼광], 3호)을 각각 발표했다.

23세(1921)에 연극단의 음악과 연출을 맡았다. 자작 소설 『최후의 악수』([매일신보], 4월 29일∼6월 7일)을 쓰고, 이를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자신이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해 주목을 끌었다. 24세(1922)에 전문 음악 연구 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27세(1925)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했다. 세계 명작 가곡집(연악회)을 출판했다. 28세(1926)에 일본의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했다. 세계 악성집(연악회)을 출판했다. 29세(1927)에 도쿄 교향악단(현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한다. 31세(1929)에 도쿄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하고, 『조선동요백곡집』(연악회) 상권을 간행했다.

32세(1930)에 중앙 보육학교 음악과 교수가 되었다. 33세(1931)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가 되었다.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으로 2년간의 유학을 떠났다. 35세(1933)에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조선동요백곡집』(연악회) 하권을 출판한다. 이은상의 시조에 곡을 붙인 『조선가요작곡집』(연악회) 제1집을 발행했다. 36세(1934)에 경성보육과 이화여전 강사가 되었다. 빅터 레코드사의 음악부 고문을 지냈다. 12월 27일 소프라노 이대형(李大亨)과 재혼하였다.

38세(1936)에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었다.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해 지휘자가 되었다. 39세(1937) 성서(成西)트리오 3중주단을 조직해 경성방송국을 통해서 실내악 발전에 기여했다. 흥사단 사건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 4개월간 수감되었다. 40세(1938)에 경성 음악 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음악만필』(영창서관)을 간행했다. 41세(1939)에 경성 방송 관현악단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다. 43세(1941)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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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wa Park
일본 도쿄 음악대학 영재학교, 대한민국 서울 선화예중,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 이탈리아 코모, “Il Fondazione per Il Pianoforte” 마스터 클래스,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 왕립 음악원, 독일 뮌헨 음대 최고 연주자 과정, 프랑스 파리 그리고 대한민국 서울. 피아니스트 박종화의 삶은 한국, 부산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후부터 지금까지, 피아노 와 음악을 따라 살아온 음악 유목 ?Music Nomad- 그 자체이다. 국내에서는 2007년,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임용되며 화제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 박종화에 대해 국내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 피아니스트 박종경과 함께 일찍이 세계 무대에서 젊은 거장으로 인정 받고 있었다.

5세 때 일본 동경 음대 영재반 수석 입학을 시작으로 미국 뉴잉글랜드 컨서바토리에서 러셀 셔먼을 사사하고, 독일 뮌헨 음대 최고 연주자 과정에서 엘리소 뷔르살라체를 사사하였으며 부조니 콩쿠르 입상과 더불어 1995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최연소 입상(5위), 루빈슈타인 콩쿠르 특별상, 스페인 산타데르 국제 피아노 콩쿠르2위 및 특별상 등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주로 유럽을 무대로 활동을 하다 겨우 33세 나이에 국내 최고의 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다양한 음악적 경험과 콩쿠르 입상, 유럽무대 활동 경력 그리고 3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될 정도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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