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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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 윤석중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사 : 윤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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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서울에서 태어나 양정고보(자퇴)를 거쳐 일본 조오치대학(上智大學)을 졸업했다. 2003년 12월 9일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우리나라 아동문학계를 이끌어 온 동요시인이자 아동문화운동가로 ‘동요의 아버지’ 또는 ‘윤석중 할아버지’로 불렸다.

13세 때인 1924년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요 「봄」이, 1925년 『어린이』에 동요시 「오뚝이」가 뽑히면서 천재 소년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동문학가의 길로 들어서서 1932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집 『윤석중 동요집』과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펴내면서 우리 정서가 담긴 동요시를 짓고 널리 알리는 데 헌신했다.

그가 남긴 1,200편이 넘는 동요시 가운데 800여 편이 동요로 만들어졌는데, 「퐁당퐁당」 「짝짜꿍」 「나리나리 개나리」 「낮에 나온 반달」 「기찻길 옆」 「우산 셋이 나란히」 등을 비롯하여 「어린이날 노래」 「졸업식 노래」 들은 세대를 이어 지금까지 널리 불린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신문을 내기도 한 윤석중은 ‘아동문학협회’를 창설하여 『주간 소학생』을 창간하고 우리말 글짓기 운동을 일으켰으며, ‘노래동무회’를 창립, 동요 보급에도 나섰다. 1956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모임인 ‘새싹회’를 창립하고 소파상, 장한 어머니상, 새싹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3·1문화상(1961), 문화훈장 국민장(1966), 외솔상(1973), 라몬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인촌상(1992), 금관문화훈장(2003) 등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동요시인으로 추앙받았다.

저서에 우리나라 첫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 동요집 『날아라 새들아』 『어깨동무』 『굴렁쇠』, 동화집 『열 손가락 이야기』 『멍청이 명철이』 『열두 대문』 들이 있고, 『넉 점 반』 『낮에 나온 반달』 들이 그림책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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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 이원수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사 : 이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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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원(冬原)
1911년 경상남도 양산(梁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린이」지에 동요 「고향의 봄」이 당선되었으며 이 동요는 홍난파(洪蘭坡)에 의해 작곡되어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1927년 <기쁨사>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벌여 장편동화와 아동소설의 장르를 개척하고 한국 아동문학 이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광복 이후에는 동요시집을 출판하였는데, 1947년 『종달새』, 1948년 그림동화집 『봄잔치』, 1953년 장편동화 『숲속 나라』, 1960년 동화집 『파란 구슬』 등을 간행했고 그 밖에 1961년 『이원수아동문학독본』, 1962년 『어린이문학독본』 등을 내었다. 1971년 아동문학집 『고향의 봄』을 발간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대학강단에서 아동문학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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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 - Nun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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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 박목월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사 : 박목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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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木月, 본명 : 박영종(朴泳鍾)
1940년을 전후한 시대로부터 탁월한 모국어로 한국인의 느낌과 생각을 노래해 우리 민족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준 대표적 민족시인 박목월.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사춘기 시절의 감성을 잔잔하게 울려주는 그의 본명은 박영종으로 1916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1933년 대구계성중학교 재학 중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어린이〉지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지에 당선되었으며, 1935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시《문장》에 〈길처럼〉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16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정지용의 추천에 의해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양대 문리대학장, 《심상》 발행인 등을 역임했다. 아시아 자유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문예상,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박두진, 조지훈과의 3인 합동 시집 《청록집》과 개인 시집 《산도화》, 《난·기타》, 《청담》, 《경상도의 가랑잎》, 연작시 〈어머니〉, 〈구름에 달 가듯이〉, 〈무순〉, 수필집 《밤에 쓴 인생론》, 《친구여 시와 사랑을 이야기하자》, 《그대와 차 한 잔을 나누며》, 《달빛에 목선 가듯》,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 등이 있다. 1978년에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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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 유치환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사 : 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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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環, 호:청마(靑馬)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으로 꼽히는 시인으로,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이 청마의 맏형이다. 동래보통학교와 일본 부장중학교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였으나, 1928년 학교를 중퇴하고 그해 10월, 11세부터 알고 지내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1930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한 후, 1939년에 첫 시집인 『청마시초』를 출간하였다.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허무와 낭만의 절규' '깃발'을 비롯한 53편의 초기의 시를 『청마시초』에 담았으며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수(首)》 《절도(絶島)》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들을 수록한 것이 제2시집 《생명의 서(書)》이다.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는 한편 시작을 계속, 1948년 제3시집 《울릉도》, 1949년 제4시집 《청령일기》를 간행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여 당시의 체험을 《보병과 더불어》라는 종군시집으로 펴냈다. 그후에도 계속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한 바 있다. 그의 시는 도도하고 웅혼하며 격조 높은 시심(詩心)을 거침 없이 읊은 데에 특징이 있는데, 이는 자칫 생경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기교보다도 더 절실한 감동을 준다는 특징이 있다.

이후 교직에 몸담으며 40여 년 간의 열정적인 시작활동을 통해 총 14권에 달하는 시집과 수상록을 출간했다. 1947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특별시 문화상,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 제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1967년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60세에 생을 마감했다. 문단의 거목 청마가 영면에 잠긴지 40년이 넘었지만 생명력 넘치는 그의 시는 여전히 살아 뜨겁게 숨쉬고 있다.

작사 : 김소월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사 :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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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素月, 김정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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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 홍난파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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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蘭坡, 홍영후永厚
1989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홍순(洪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후(永厚)이고, 난파(蘭坡)는 호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2세(1912)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서 바이올린 수업을 시작했다. 15세(1913)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서 바이올린 및 악전대요를 공부하고,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생들의 크리스마스 축하 무대에서 독주를 했다.

16세(1914)에 김상운과 결혼하였다. 17세(1915)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교사로 2년간 근무했다. 18세(1916)에는 홍난파가 쓴 최초의 곡인 창가 「야구전」을 발표했다. 19세(1917)에 의학에 뜻을 두고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1년 후 중퇴했다. 『악전대요』(박문서관), 『명곡신집(明曲新集)』(박문서관), 『통속창가집』(박문서관), 『간이무답(簡易舞踏) 행진곡집』(박문서관), 『말 잘하는 사위』(광익서관), 『조선 정악보』(광익서관)를 펴냈다. 20세(1918년)에 부인 김상운이 사망한다. 도쿄의 우에노(上野)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21세(1919)에 도쿄에서 음악, 미술, 문학의 예술 잡지인 [삼광](삼광사)을 창간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해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했다.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 주간이 되어 음악 보급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 계신 K 형께」([삼광], 창간호), 「북변잡기(北邊雜記)」([매일신보] 8월 11일∼8월 19일) 등의 수필과 단편 소설 「바람과 빛」([삼광], 창간호), 음악 평론인 「창가 유희의 교육상의 효능」(『삼광』 2호)을 발표했다. 22세(1920년)에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도쿄 복학이 거절되었다. 소설 『허영(處榮)』([매일신보], 9월 3일∼11월 18일)을 60회 발표한다. 단편 소설 「처녀혼」([삼광], 3호)을 출간한다. 이 책 서두에 「애수」라는 곡명으로 멜로디를 게재하고 김형준(金亨俊)이 작사해 「봉선화」가 탄생하게 된다. 9월 도쿄에서 ‘폴란드 고아 구제 대음악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 이를 홍난파는 최초의 연주회라 했다. 수필 「석왕사유기(釋王寺遊記)」,([삼광], 3호), 번역 소설 「빈인(貧人)」([삼광], 3호)을 각각 발표했다.

23세(1921)에 연극단의 음악과 연출을 맡았다. 자작 소설 『최후의 악수』([매일신보], 4월 29일∼6월 7일)을 쓰고, 이를 연극 대본으로 개작해서 자신이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해 주목을 끌었다. 24세(1922)에 전문 음악 연구 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27세(1925)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했다. 세계 명작 가곡집(연악회)을 출판했다. 28세(1926)에 일본의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했다. 세계 악성집(연악회)을 출판했다. 29세(1927)에 도쿄 교향악단(현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한다. 31세(1929)에 도쿄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하고, 『조선동요백곡집』(연악회) 상권을 간행했다.

32세(1930)에 중앙 보육학교 음악과 교수가 되었다. 33세(1931)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가 되었다.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으로 2년간의 유학을 떠났다. 35세(1933)에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조선동요백곡집』(연악회) 하권을 출판한다. 이은상의 시조에 곡을 붙인 『조선가요작곡집』(연악회) 제1집을 발행했다. 36세(1934)에 경성보육과 이화여전 강사가 되었다. 빅터 레코드사의 음악부 고문을 지냈다. 12월 27일 소프라노 이대형(李大亨)과 재혼하였다.

38세(1936)에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었다.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해 지휘자가 되었다. 39세(1937) 성서(成西)트리오 3중주단을 조직해 경성방송국을 통해서 실내악 발전에 기여했다. 흥사단 사건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 4개월간 수감되었다. 40세(1938)에 경성 음악 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음악만필』(영창서관)을 간행했다. 41세(1939)에 경성 방송 관현악단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다. 43세(1941)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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