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8명)

이전

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관심작가 알림신청
Johann Wolfgang von Goethe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다른 상품

세계문학 모노에디션 12권 세트

세계문학 모노에디션 12권 세트

95,040 (10%)

'세계문학 모노에디션 12권 세트 ' 상세페이지 이동

필사의 힘 : 괴테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따라쓰기

필사의 힘 : 괴테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따라쓰기

17,820 (10%)

'필사의 힘 : 괴테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따라쓰기' 상세페이지 이동

서동시집

서동시집

18,000 (10%)

'서동시집' 상세페이지 이동

파우스트

파우스트

7,920 (10%)

'파우스트' 상세페이지 이동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큰글자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큰글자책)

18,000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큰글자책)' 상세페이지 이동

365 괴테 일력

365 괴테 일력

18,050 (5%)

'365 괴테 일력' 상세페이지 이동

파우스트

파우스트

15,750 (10%)

'파우스트' 상세페이지 이동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15,030 (10%)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상세페이지 이동

저 : 프리드리히 니체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프리드리히 니체
관심작가 알림신청
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869년부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편두통과 위통에 시달리는 데다가 우울증까지 앓았지만 10년간 호텔을 전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이탈리아에서 여름에는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지내며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다. 그러던 중 1889년 초부터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인간에게 참회, 속죄 등을 요구하는 기독교적 윤리를 거부했다. 본인을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르며 규범과 사상을 깨려고 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한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주체와 세계의 지배자인 초인(超人)에 이를 존재로 보았다. 초인은 전통적인 규범과 신앙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의 이런 철학은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집대성됐고 철학은 철학 분야를 넘어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 등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고찰했으며, 『반시대적 고찰』(1873~1876)에서는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고,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에서 더 한층 명백해져, 새로운 이상에의 가치전환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여명』(1881) 『즐거운 지혜』(1882)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를 펴냈는데 ‘신은 죽었다’라고 함으로써 신의 사망에서 지상의 의의를 말하고, 영원회귀에 의하여 긍정적인 생의 최고 형식을 보임은 물론 초인의 이상을 설파했다. 이 외에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에 이어 『권력에의 의지』를 장기간 준비했으나 정신이상이 일어나 미완으로 끝났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다른 상품

왜 너는 편하게 살고자 하는가

왜 너는 편하게 살고자 하는가

16,020 (10%)

'왜 너는 편하게 살고자 하는가' 상세페이지 이동

원서발췌 도덕의 계보학 : 하나의 논박서

원서발췌 도덕의 계보학 : 하나의 논박서

14,800

'원서발췌 도덕의 계보학 : 하나의 논박서' 상세페이지 이동

원서발췌 도덕의 계보학 : 하나의 논박서 (큰글자책)

원서발췌 도덕의 계보학 : 하나의 논박서 (큰글자책)

30,000

'원서발췌 도덕의 계보학 : 하나의 논박서 (큰글자책)' 상세페이지 이동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15,750 (10%)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상세페이지 이동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16,920 (10%)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상세페이지 이동

하루 한 장 니체 아포리즘

하루 한 장 니체 아포리즘

15,300 (10%)

'하루 한 장 니체 아포리즘' 상세페이지 이동

죽을 것 같은 오늘 니체를 만나다

죽을 것 같은 오늘 니체를 만나다

15,300 (10%)

'죽을 것 같은 오늘 니체를 만나다' 상세페이지 이동

비극의 탄생 세트

비극의 탄생 세트

144,000 (10%)

'비극의 탄생 세트' 상세페이지 이동

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관심작가 알림신청
Rainer Maria Rilke
20세기의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작가.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 등 문학사에 남을 걸작을 내놓았다. 10대 초반이던 발튀스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화가의 길을 권했으며, 이후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부친은 군인이었으나 병으로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근무하였다. 릴케의 어머니는 릴케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르네Rene라 짓고, 여섯 살까지 딸처럼 키웠다. 양친은 성격의 차이로 해서 릴케가 9세 때 헤어지고 말았다. 열한 살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로베르트 무질의 첫 장편『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의 배경이 되는 육군고등사관학교로 옮기나 결국 자퇴한다.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하고서 1896년 뮌헨으로 대학을 옮기는데, 뮌헨에서 릴케는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독일식 이름인 라이너로 바꿔 필명으로 사용한다.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나 결혼한다. 그녀가 로댕의 제자였으므로 그 자신도 로댕을 만나게 되어 예술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02년 파리에서 로댕을 만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는다. 클라라와 헤어진 릴케는 로마에 머무르며『말테의 수기』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1911년에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호엔로에 후작 부인의 호의로 두이노 성에서 겨울을 보낸다. 이곳에서 바로 전 세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릴케 만년의 대작이며 10년이 걸려 완성할『두이노 비가』의 집필을 시작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릴케는 스위스의 뮈조트 성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그는 폴 발레리 등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낸다. 발레리의 작품을 독어로 번역하고 또 직접 프랑스어로 시를 쓰던 시인은 1926년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죽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다른 상품

미츄

미츄

13,500 (10%)

'미츄' 상세페이지 이동

매일, 시 한 잔

매일, 시 한 잔

15,120 (10%)

'매일, 시 한 잔' 상세페이지 이동

말테의 수기

말테의 수기

13,500 (10%)

'말테의 수기' 상세페이지 이동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11,700 (10%)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상세페이지 이동

두이노의 비가

두이노의 비가

13,500 (10%)

'두이노의 비가' 상세페이지 이동

시를 잊은 나에게

시를 잊은 나에게

15,120 (10%)

'시를 잊은 나에게' 상세페이지 이동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15,300 (10%)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상세페이지 이동

한 가슴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다면

한 가슴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다면

9,900 (10%)

'한 가슴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다면' 상세페이지 이동

저 : 헤르만 헤세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헤르만 헤세
관심작가 알림신청
Hermann Hesse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1892년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으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쳐 나왔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하여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을 출간했다.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정을 받았고 문단에서도 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1904년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면서 문학적 지위도 확고해졌다. 같은 해 아홉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나 1923년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1906년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고, 1919년에는 자기 인식 과정을 고찰한 《데미안》과 《동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출간했다. 인도 여행을 통한 체험은 1922년 출간된 《싯다르타》에 투영되었으며,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2년 8월 9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실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헤르만 헤세의 다른 상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13,500 (10%)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상세페이지 이동

데미안

데미안

14,400 (10%)

'데미안' 상세페이지 이동

필사의 힘 : 헤르만 헤세처럼, 데미안 따라쓰기

필사의 힘 : 헤르만 헤세처럼, 데미안 따라쓰기

17,820 (10%)

'필사의 힘 : 헤르만 헤세처럼, 데미안 따라쓰기 ' 상세페이지 이동

수레바퀴 아래서

수레바퀴 아래서

14,400 (10%)

'수레바퀴 아래서' 상세페이지 이동

데미안 (큰글자책)

데미안 (큰글자책)

18,000

'데미안 (큰글자책)' 상세페이지 이동

헤르만 헤세 인생의 말

헤르만 헤세 인생의 말

17,820 (10%)

'헤르만 헤세 인생의 말' 상세페이지 이동

데미안

데미안

11,520 (10%)

'데미안' 상세페이지 이동

데미안

데미안

11,700 (10%)

'데미안' 상세페이지 이동

그림 : 빈센트 반 고흐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빈센트 반 고흐
관심작가 알림신청
Vincent Van Gogh
네덜란드의 화가. 불꽃같은 정열과 격렬한 필치로 눈부신 색채를 표현했으며,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생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서른일곱 해의 짧은 생을 살면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고독했던 그는 주로 브뤼셀, 헤이그, 앙베르 등지에서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의 모습과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1881년, 고흐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유일한 네덜란드 친구이자 동료 화가인 라파르트와 주고받은 편지들은 고흐의 초기 작품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의 치열한 열정과 예술가로서의 확고한 태도를 전하는 의미 있는 기록이다.

종교적인 신념,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고흐의 삶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독과 가난 속에서 온전히 예술을 위해 바쳐졌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야 그의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고, 삶은 신화로 남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다른 상품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3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3

49,500 (10%)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3' 상세페이지 이동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1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1

49,500 (10%)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1' 상세페이지 이동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2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2

49,500 (10%)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2' 상세페이지 이동

초판본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초판본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148,500 (10%)

'초판본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들' 상세페이지 이동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그림과 편지들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그림과 편지들

22,500 (10%)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그림과 편지들' 상세페이지 이동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미니 아트포스터북 (A4)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미니 아트포스터북 (A4)

14,220 (10%)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미니 아트포스터북 (A4)' 상세페이지 이동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아트포스터북 (A3)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아트포스터북 (A3)

23,220 (10%)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아트포스터북 (A3)' 상세페이지 이동

동주와 빈센트

동주와 빈센트

14,220 (10%)

'동주와 빈센트' 상세페이지 이동

그림 : 클로드 모네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클로드 모네
관심작가 알림신청
Claude Monet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인상파 양식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 인상, 일출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파리 출생.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18세 때 그곳에서 화가 로댕을 만나, 외광(外光) 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1862년부터는 전통주의 화가 샤를 글레르 밑에서 쿠르베나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지만 2년 후 화실이 문을 닫게 되자, 친구 프리데리크 바지유와 함께 인상주의의 고향이라 불리는 노르망디 옹플뢰르에 머물며 자연을 주제로 한 인상주의 화풍을 갖춰나갔다.

1874년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바지유와 함께 작업실을 마련하여,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출품된 작품 중「인상·일출(soleil levant Impression)」이라는 작품의 제목에서, ‘인상파’라는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이후 18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 위치를 굳혔다.

한편 1878년에는 센 강변의 베퇴유, 18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外光)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 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그려내려는 그의 의도는「루앙대성당」「수련(睡蓮)」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 낮, 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밖에「소풍」「강」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다가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클로드 모네의 다른 상품

마리갤 1-2, 인상주의-클로드 모네

마리갤 1-2, 인상주의-클로드 모네

38,700 (10%)

'마리갤 1-2, 인상주의-클로드 모네' 상세페이지 이동

동주, 소월, 용운, 영랑의 글

동주, 소월, 용운, 영랑의 글

13,500 (10%)

'동주, 소월, 용운, 영랑의 글' 상세페이지 이동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16,920 (10%)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상세페이지 이동

시가 지나간 자리에 명화가 남아

시가 지나간 자리에 명화가 남아

13,500 (10%)

'시가 지나간 자리에 명화가 남아' 상세페이지 이동

현진건 단편소설 : 명화와 소설의 만남

현진건 단편소설 : 명화와 소설의 만남

14,600

'현진건 단편소설 : 명화와 소설의 만남' 상세페이지 이동

우리가 시간이 없지 시가 없냐?

우리가 시간이 없지 시가 없냐?

13,500 (10%)

'우리가 시간이 없지 시가 없냐? ' 상세페이지 이동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8,820 (10%)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상세페이지 이동

그림 : 폴 세잔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폴 세잔
관심작가 알림신청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 화가. 1839년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으며,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는 사물의 구조를 탐색하기 위해 평생 동안 드로잉에 몰두하였다.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였지만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해 큐비즘을 비롯한 20세기 미술의 문을 열었다. 1906년 그림을 그리다가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