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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역 : 베르나르딘 쉘렌베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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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군디 디죵 근교 폰텐느 레디죵에서 일곱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난 베르나르도(1091-1153)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1111년 20세로 집을 떠났는데, 그의 다섯 형제와 두 삼촌, 30명의 친구들이 그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갔다. 성을 떠날 때 막내 니발도에게 “우리는 수도원에 들어가므로 이 성이나 영토,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네 것이야 !”라고 말하자 “형들은 천국 재산의 상속자가 되는데, 난 다만 이 세상 재산의 상속자 밖에 못되니 생각할수록 분한 노릇이야.” 하고 답했다 한다. 1115년 랑그레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파견되었다. 이때 그 수도원 이름을 바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명랑한 골짜기, 빛의 골짜기)로 바꾸었고, 700여 명의 수도자가 생활하기까지 늘어났으며, 당시 68개 시토회의 모원母院이 되었다. 클레르보 성모 마리아 제단 앞에 묻힌 그는 시토회의 둘째 창설자로서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ifluus)로 불리며, 교황 비오 8세가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아르마그의 성 말라키의 생애, 신애론, 아가서 주해, 성모 찬가 등 다양한 저술을 묵상에서 퍼올렸다.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Ac quid venisti)?”라는 물음을 눈 앞에 두고 생활했던 그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였으며, 제국의 왕들과 교황의 자문을 담당했고, 도움을 주기 위해 보낸 500여 통의 서한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온다. 유럽의 제2십자군에게 설교하여 대부대가 모였으나, 군인과 지도자들의 이상은 베르나르도의 이상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므로 십자군은 완전한 군사적 파멸과 윤리적 타락으로 끝났다. 십자군 타락에 대해 여러 면에서 책임과 고독을 느껴야했던 무거운 부담이 죽음을 재촉하여 1153년 8월 20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