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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 웅진백제 발굴 이야기

공주가 좋다-01이동
리뷰 총점9.9 리뷰 22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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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448g | 147*217*15mm
ISBN13 9791157068500
ISBN10 1157068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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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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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만 해도 고고학계는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식민사관’이 영향을 미친 탓이다. 일제는 자신들의 역사보다 한반도의 역사가 앞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사학자들은 한반도 내 구석기시대 유무에 관심이 없었고, 구석기시대를 입증할 유물이 나와도 애써 무시하려 했다. 실제로 1930년대에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진(현 온성군 강안리)에서 구석기시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일본 사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렇게 한반도의 장구한 역사를 없던 것으로 묻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안타까운 점은 광복 이후에도 식민사관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정 탓에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다.’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손보기 교수팀은 이처럼 학계가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발굴을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 p.17~18,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공주 석장리 유적」 중에서

첫 번째 발굴에서부터 선사 인류의 생활상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흔적을 발견했다. 석장리 유적(사적 제334호)이 발견된 언덕은 무려 27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중 13개의 지층에서 유물을 수습했다. 그곳에서는 한반도 구석기시대 초기와 중기, 후기의 도구들이 골고루 발견되어 옛날 사람들이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생활했음이 드러났다. 그럴 만한 것이 석장리 지역은 금강의 지류가 본류와 만나는 곳이어서 식수를 구하기 쉽고 물고기와 조개류를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게다가 금강의 거센 물살이 끊임없이 깎고 나른 토사가 시간 순서에 따라 쌓인 덕분에 구석기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퇴적 지층이 잘 발달되어 남아 있던 것도 발굴에 큰 도움이 됐다.
--- p.20,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공주 석장리 유적」 중에서

이처럼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부부가 살았다는 점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반으로 가른 유리옥이 공주 수촌리 고분 중 두 곳에 각각 묻힌 채로 무려 1,500여 년 이상 보존됐다가 지난 2003년에 발견됐다. 물론 처음에는 무덤별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불가능했다. 먼저 발굴조사를 시행했던 무덤에서 시신의 머리맡에 놓인 부러진 유리옥을 발견했을 때는 이 옥이 대체 어떤 용도였는지, 무슨 이유로 머리맡에 놓았는지, 그리고 나머지 반쪽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른 무덤에서 나머지 반쪽을 찾으면서 의문은 싱겁게 풀렸다. 덩달아 두 개의 무덤이 부부의 무덤이라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밝혀졌다.
--- p.55, 「수촌리 유물이 전하는 사랑 이야기」 중에서

무령왕과 성왕은 동성왕이 닦아놓은 국가 중흥의 토대에 기초하여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한때 왕이 처형되는 치욕을 감수하며 급히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야 했던 백제는 무령왕 대에 이르면 다시 한강 유역을 공략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갖췄다. 또한 중국과 일본 등 국제 교류도 다시 활발해져 두 지역을 잇는 문화적 가교 역할도 했다. 무령왕이 자신의 재위 기간에 양梁나라에 국서를 보내 주창했던 ‘갱위강국’은 바로 웅진을 기반으로 쌓은 힘과 자신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 p.77, 「웅진백제의 심장, 공산성」 중에서

궁궐을 지을 때는 왕과 관련된 건물만 달랑 짓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건물이 필요하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의 생활공간과 더불어 시중을 드는 사람들의 공간 등 왕궁과 가까운 곳에 오늘날로 치면 각종 관청들이 들어서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추정 왕궁터와 더불어 공산성 전체에 넓게 분포한 백제 건물터와 저장 구덩이, 연못 등의 다양한 시설에 관해서 유기적인 관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p.91~92, 「왕궁은 정말 공산성 안에 있었을까?」 중에서

발굴조사팀장의 ‘그만 파자.’라는 수신호가 너무 커서 ‘깊이 파라.’라는 수신호처럼 전달되었다. 수신호를 잘못 이해한 굴삭기 기사는 1미터가량 깊이의 흙을 단번에 훅 파내고 말았다. 그 순간, 바닥 깊숙이 파낸 흙 속에서 다수의 백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철기류, 밤 껍데기와 당시의 주요 먹거리인 탄화미, 소라, 굴, 조개껍데기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모두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다고 포기하려던 찰나에 백제 문화층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어긋난 수신호가 깊이 잠든 백제를 일깨우는 신호가 됐다.
--- p.98, 「백제의 최후를 함께한 공간, 공산성」 중에서

의자왕은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처럼 향락에만 심취한 암군暗君이 아니었다. 오히려 초창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기록될 정도로 인품 있는 왕이었다. 재위 기간에 몇 가지 중대한 실책을 저지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스스로 나라를 망쳐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나·당 연합군의 막강한 침공에 군사력으로 중과부적이어서 멸망기의 왕으로 기록됐을 뿐이다. 게다가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올 때 공산성으로 옮겨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혔다. 이는 사비성보다 공산성이 적군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전략적으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 p.105, 「백제의 최후를 함께한 공간, 공산성」 중에서

고고학자에게 무덤은 그야말로 매력이 넘치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문헌으로 결코 알 수 없는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무덤과 껴묻거리 등을 통해 밝혀낸 예는 그야말로 차고 넘친다. 무덤의 축조 양식과 사용된 재료는 당시 기술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또한 무덤 속의 껴묻거리를 통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누렸던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사회적 배경, 그 나라의 문화, 더 나아가서는 외국과 교류 관계까지도 유추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그 시대의 제례 풍습과 종교, 가치관 같은 정신세계까지 엿볼 수 있다.
--- p.127~128, 「경주에 비견할 백제의 역사문화지구, 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에서

김원룡 단장과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 겉에 얹힌 벽돌 몇 장을 거두고 무덤을 막고 있던 벽돌 한 장을 들어냈다. 깊은 잠에 빠졌던 무령왕릉을 깨우는 첫 손길이었다. 그때 조사원들과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사람 가운데 몇 명은 무덤 속에서 하얀 김이 빠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입구를 모두 열고 맨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김원룡 단장과 김영배 관장이었다. 이들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멧돼지인 듯 유니콘인 듯한 돌짐승 조각이 문 앞을 당당하게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1,500년 동안 무령왕릉을 지켜온 진묘수였다. 당시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은 자신의 꿈에서 봤던 멧돼지를 닮은 조각상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고 했다.
--- p.150, 「무령왕릉 발굴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 중에서

무령왕릉은 당시 백제가 중국, 일본과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무령왕릉의 축조 양식인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시대의 무덤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무덤 안에서 수습된 도자기와 동전인 오수전 등도 중국에서 건너온 수입품이었다. 또한 관의 재료로 사용된 일본산 금송에 관해서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 p.156, 「무령왕릉 발굴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 중에서

무령왕릉을 축조하는 데는 많은 벽돌이 필요했다. 그것도 위치마다 서로 다른 모양의 벽돌을 사용해서 전부 28종류나 된다. 주로 연꽃무늬를 그려 넣은 벽돌을 사용했으며, 문자를 새긴 벽돌과 아무 무늬도 없는 민무늬벽돌도 사용했다. 문자를 새긴 벽돌에는 대방大方, 중방中方, 중中, 급사急使, 복재?才 등과 같은 글자가 박혀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 해당 벽돌이 놓일 위치를 나타내는 글자였다. 다시 말해서, 무령왕릉에 들어간 벽돌들은 정확한 설계에 의해서 생산됐고, 정해진 곳에 순서대로 쌓았다는 의미다. 각 글자들은 해당 글자의 틀을 만들어 꾹 누르는 방식인 압출기법으로 문자를 새겨 넣었다.
--- p.163~164, 「무덤에 잠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중에서

무령왕릉을 발굴할 때 사람들을 가장 먼저 당황하게 했던 것이 바로 무덤 입구 앞쪽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던 돌로 만들어진 진묘수였다. 얼굴은 멧돼지처럼 생겼지만, 머리에 철로 만든 뿔이 달렸고, 목덜미에 갈기가 있으며, 어깻죽지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도무지 어떤 동물이라고 특정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는 상상 속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 동물은 무덤을 지키고 악귀를 막아내며 무덤에 묻힌 사람의 영혼을 신이 사는 곳으로 안내하는 저승사자 역할도 한다고 믿었다. 물론 진묘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빨도 없고 입을 헤 벌리고 있어서 온순하고 친근한 느낌이 먼저 들지만 말이다. 그래도 무령왕릉이 1,500년 동안 온전한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진묘수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가볍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 p.174, 「아시아의 문화 가교 역할을 했던 백제」 중에서

지방이나 외국에서 소식을 듣고 왕비의 장례에 조문하기 위해 직접 방문하거나 대신해 누군가를 보내는 데 기본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는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조문객들도 예를 갖추기 위해서는 조의 선물도 정성스레 준비해 와야 하고 예를 올리는 시간도 오래 걸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령왕비를 사후에 바로 무덤에 매장하지 않고 오랫동안 가매장 상태로 뒀던 것이 이해가 된다.
사람이 죽은 뒤에 바로 묻지 않는 풍습은 사료에도 명확히 드러나 있다.
“부여에서는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채워둔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시신의 아래에 얼음을 담은 접시를 두어 시신의 부패를 방지했다.”-《후한서》 〈의례지〉
이렇듯 옛 기록에 나타난 장례 풍습에서 얼음의 사용 방법까지 상세하게 기술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백제가 부여의 유민이 세운 나라였고 백제 왕실의 성씨가 부여 씨였던 걸 감안하면, 이러한 장례 풍습이 당시까지 남아 있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 p.215~216, 「27개월이 걸린 무령왕비의 장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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