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꽃은 언제부터 안개꽃이고, 장미는 언제부터 장미였을까? 그 전엔 뭐라고 불렸을까?”
“그러게, 이름을 붙여준 순간부터는 특별해지는 거잖아. 그 전에는 그냥 이름이 없었겠지. 워낙 특별하니까 장미의 종류는 2만 5천 개의 다른 이름이 있어.”
“2만 5천 개? 진짜 엄청나.”
“달도 가까이서 보면 그냥 돌 같은데 지구에서 보면 저렇게 빛나잖아. 멀리서 보면 다 빛나는 건가?”
안나가 혼잣말 하듯 내뱉었다.
“누구에게나 빛이 있어. 안 보려고 해서 그렇지. 자기도 그래, 멀리서보든 가까이서 보든 빛이 나”
“에이…”
“나한테는 보여. 나한테만 보이면 좋겠다. 그 빛. 잠깐 가만히 있어봐. 눈에 비친 별이 보여. 진짜야. 더 가까이 와 봐.”
“자기 말고 이름 불러줘. 이름 불러주는 게 좋단 말이야.”
“안나. 몇 번이고 불러도 좋은 이름. 이름 부르는 입술 모양도 맘에 들어. 이름을 말할 때 혀끝이 살짝 입천장을 두드리는 것도 좋아. 안나, 안나, 안나!”
“여기서는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되니까 더 좋다. 특히 숨소리가 좋아, 입 맞출 때 아주 옅은 신음소리도 좋고. 음악 같아.”
“내가 그랬어? 몰랐어…”
“큰 악기가 내는 가냘픈 음악소리 같거든. 나만 들을 수 있는 음악. 난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을 볼 때, 자기가 내 사람 같아.”
“근데 왜? 동정 하는 거야?”
“왜, 동정에서부터 시작하면 안 돼? 사랑의 시작이 동정이든 첫 눈에 반함이든 뭐가 중요해. 잠깐 불쌍하고 가엾다고 생각하면 그게 나쁜 건가. 길게 보면 결국 사랑뿐이야. 이번에 더 확실히 알았어, 내가 지켜줄 때 행복하다는 걸.”
“누구에게나 예뻐 보이는 건 아무 의미 없어. 내 눈에만 예쁜 게 좋아.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속살을 보는 것보다 더 좋잖아.”
“자기 눈에만 예뻐 보여. 걱정 하지 마.”
“근데 난 좋은 아빠보다 좋은 남편이 되고 싶은데…”
“좋은 아빠가 좋은 남편도 되는 거야.”
“그래도 좋은 남편이 더 되고 싶어. 아이는 성인되면 떠나지만. 와이프는 평생이니까.”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 요즘 웃을 때도 안 불안해.”
수지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노아를 쳐다봤다.
“다행이네. 일 하는 게 힘들어서 남몰래 울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근데 웃을 때도 안 불안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내가 기쁘거나 웃으면 순간 불안이 찾아와. 그래서 잘 안 웃게 되더라. 내가 행복하거나 웃어도 될 자격이 있냐고 물으면서 말이야. 내가 웃으면 누군가가 질투해서 그걸 빼앗아갈 거 같았어. 그래서 조금 무서웠어.”
“그래? 어쨌든 이혼을 결심한 이후부터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싫어졌어. 결혼 후엔 1년에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변한 내 모습에 실망할까봐. 행복함을 경쟁하는 사이에서 거짓 행복이 들통 날까봐, 그게 두려웠어. 요즘은 행복이 강요되잖아.”
“행복 경쟁 시대지.”
“누가 더 행복한지 경쟁하는 거, 진짜 피곤한 일이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았어. 안정된 삶 속에서 편할 줄 알았는데, 꿈도 욕망도 없더라.”
“꿈, 욕망은 꼭 이루어지지 못할 때도 가치 있어. 그냥 꿈이나 욕망이 있는 자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잖아. 막상 욕망이 충족되면 공허함이 찾아올 거 같기도 해.”
“무슨 말인지는 알아. 언젠가 내가 명품 가방을 가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 한정판이어서 백화점 오픈하자마자 사왔지. 근데 내 욕망이었던 명품 가방을 손에 쥐니까 다 이뤄졌다는 생각에 허무함이 나를 감쌌어.”
“맞아. 그 마음 잘 알지. 어쩌면 욕망은 가지지 않을 때 더 빛날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못 가져서 합리화할 수도 있어.”
“웃긴 건 내가 가졌던 욕망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었냐는 거야. 아마 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던 거야. ‘아마’라는 말을 하는 것만 봐도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모른다는 거잖아. 다른 사람들의 욕망에 내가 맞춰져 있다고 생각하니까 바보로 살아온 느낌이었어.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는 바보.”
“내 과거는 실패뿐이었지만 난 안 지울 거야. 실패와 후유증으로 누더기가 됐지만 그게 지금의 나니까. 개 같은 실패의 추억뿐이지만 난 못 지워. 어차피 시간 지나면 잊혀져. 그게 우주가 준 선물이야. 무시무시한 시간의 힘과 불완전한 인간의 두뇌는 망각을 가져다주니까.”
“불 꺼진 방에 있는 거 같아. 천장에 별 스티커 붙인 것처럼. 여기는 시간도 멈춰버린 것 같아.”
“난 내가 더러운 놈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별을 볼 때만큼은 아니야. 순수해지고 별 볼일 없는 놈 같아서 좋아. 버러지 같아서. 그저 본능으로 살아가는 버러지.”
“마음이 씻기는 기분이 좋다. 더럽게 묻은 얼룩이 깨끗이 씻기는 거 같아. 별이 나를 씻어주는 거 같아.”
“노아 네가 질서를 만들겠다고 했던 말이 좋았어. 실패해도 족적을 남기는 삶. 그게 좋아. 잊혀지는 것과 기억되는 것의 차이는 하나야. 순응하든지 자신의 질서를 만들던지. 넌 우리 사이에 질서를 만들었고, 그 때문에 난 너를 기억하는 거야.”
“비이성, 비상식, 비정상. 난 이게 좋아서 한 것뿐인데… 좋게 포장해줘서 고마워. 나도 어쩌면 네가 싫어했던 그 질서에 순응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인지도 몰라.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갈수록 모르겠어. 어려워. 그냥 버러지처럼 살 뿐이야. 버러지한테 질서 같은 게 어디 있겠어.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본능이잖아.”
“근데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절대 안 보여. 더 짙고, 더 진하고, 더 깊은 어둠으로 보이거든. 네가 빛으로 오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어둠에서는 어둠도 잘 보이고, 빛도 잘 보인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어둠에서 나오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어둠에서는 어둠과 빛이 같이 보인다… 정말 좋다. 쉼의 마침표를 찍는 말이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부족함 없이 무탈하게 회사를 키웠다면 거기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잘 되려면 결핍, 핸디캡이 필수야. 그래야 이야기가 만들어져. 이야기가 없는 밋밋한 사람이었다면 나부터 너한테 관심 안 줬을 거야.”
“……”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한 사람이 만든 휴대폰, 트럭운전사가 최고의 영화감독이 되는 걸 봐. 사람들은 결핍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끌림이 있어. 인간은 원래 그렇게 디자인된 거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