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면에서 슬로다운은 대가속 시대 이전의 정상상태로 우리를 돌려놓을 것이다. 일단 전 세계적으로 물가가 안정될 것이다. 안정된 미래에서는 인플레이션이 필요 없다. 아마도 우리 손자 손녀들은 예순 살이 되어서도 스물한 살에 처음 사 마셨던 가격으로 맥주를 구입하게 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선 단지 ‘투자’로는 큰돈을 벌기가 어렵다. 과거에 투자를 통해 이익을 본다는 것은 대부분 미래에 더 커질 인구를 대상으로 돈을 번다는 것을 의미했다.
--- pp.22~23
판매기법이라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인구학적으로 변화가 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또 시장이 계속 커져야지만 가능하다. 슬로다운이 진행되는 동안, 특히 그 이후에는 딱히 성과를 내기 힘들다. 지금 많은 기술 기업들이 매일같이 광고를 쏟아내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다. 딱히 필요하지 않지만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는 제품들, 사실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제품을 파는 사람들은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다.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더 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 p.23
이 책에서 보여 주는 위상궤적이나 시간선에서 가로축은 속도, 그러니까 측정된 것의 변화 정도를 표시한다. 매년 인구수가 얼마나 급격히 증가하거나 감소했는지, 매달 특정 정당의 지지자가 얼마나 늘거나 줄었는지, 매일 금값의 증감이 얼마나 됐는지 등을 나타낸다. 찍힌 점이 오른편에 위치할수록 그 값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점이 수직축 바로 위에 찍혔다면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점이 왼편으로 찍혔으면 빠르게 줄고 있다는 뜻이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끝 쪽에 찍혔다면 변화가 빠르다는 것이고, 가운데 쪽에 몰렸으면 변화가 느린 것이다.
--- p.69
슬로다운은 감속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감소가 아니다. 그래서 슬로다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감지하기 쉽지 않다. 슬로다운은 느긋하게 일어난다. 어떤 경우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새롭고 신나는, 뭔가 좀 더 다른 것에 시선을 고정한다. 또 우리 사회에서 위험과 예상치 못한 변화를 동반하는 급격한 진보가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계절이 바뀌기 전까지는, 앞으로 몇 주 동안의 날씨가 오늘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단 계절이 바뀌고 나면 날씨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 pp.74~75
2010년 말에 주택시장이 회복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났지만 2011년에 다시 무너졌다. 2012년 초에 두 번째 회복이 있었지만 역시 무너졌다. 2013년에 나타난 세 번째 회복은 좀 더 오래갔는데, 그래도 2014년 다시 붕괴됐다. 2015년에 나타난 네 번째 회복은 약간 더 강해 보였다. 2018년 3분기에 이르러서 대출액은 다시 9조 달러 선을 회복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분기별 평균 증가량은 예전 평소 때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분기에 500억 달러에서 1,000억 달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그나마도 언제 또 더 크게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2019년에 이르러 미국의 모기지 중개업자들은 지금 이런 상황이 자신들의 산업을 추락시킬 반영구적인 함정이 되는 것은 아닌지, 앞으로 대탈출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질문을 던지게 됐다.
--- p.101
오늘날 우리는 빚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 채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빚은 지난 두 세기 동안 0에서부터 지금 수준까지 왔다. 따라서 다시 0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야 한다. 빚은 어떤 자연 현상이 아니다. 미래에는 빚의 규모가 떨어질 수 있다는 첫 번째 신호가 우리 시대에 나올 수도 있다. 최근 10년 동안 빚이 줄어드는 모습은 그 이전 50년 동안보다 더 많이 목격됐다. 오늘날 어떤 형태의 빚도 속도를 내며 증가하고 있지 않다. 많은 빚들이 여전히 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전보다 천천히 증가하고 있다. 빚이 앞으로도 꾸준히 떨어지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적 믿음을 바꿔야 한다.
--- p.106
위키피디아의 성장세에 슬로다운이 닥친 것에 대한 다른 설명도 있다. 2007년쯤에 이미 다룰 만한 주제어들은 다 등록됐고 사소한 것을 다룬 문서들만 증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증가하다가 곧 서서히 감속하는 완만한 추세를 보면 그런 설명이 맞는 것 같다. 아마도 전 세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어는 100만 개에서 200만 개 사이일 수 있다. 일단 이 숫자에 이르고 나면 나머지 추가로 올라오는 100만 개의 주제어는 이전 100만 개에 비해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의 백과사전들이 다룬 주제어는 100만 개에 훨씬 못 미친다.
--- p.123
우리가 인구 증가를 걱정한다고 할 때 정작 걱정을 하는 대목은 성장이 아니라 죽음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기근이 생길 것이라는 걱정이다. 이런 걱정은 기근이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정치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인구 증가가 대규모 이민을 촉발할까 봐 걱정한다. 이 역시 앞으로 이주민의 수요가 엄청나게 커질 것이며, 이주자가 너무 많아질 것보다는 오히려 너무 적어지는 것을 근심해야 한다는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걱정이다. 또 ‘너무 사람들이 많아지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아주 소수의 남자들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전쟁을 멈추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 새로운 질병이 퍼질 수 있다고도 걱정한다. 이것은 인구가 아주 적었을 때도 얼마나 치명적인 질병이 존재했는지 잊고 하는 말이다.
--- p.278
2019년 상위 1,000가구의 재산 총액이 480억 파운드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여전히 기사 제목은 이랬다. “페라리와 푸드뱅크의 나라 ― 지난 5년간 영국 부유층의 재산 2,530억 파운드 증가.” 하지만 이렇게 기사를 썼어야 했을 것이다. “부자들의 재산 증가는 2017년 정점을 찍으며 820억 파운드 늘었다. 그러다 점차 줄기 시작해 2018년 660억파운드 증가에 그친 뒤, 2019년에는 증가 폭이 불과 480억 파운드까지 떨어졌다.” 물론 영국의 재산 증가 추이와 불평등 정도가 다시 방향을 바꿔 상승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만 보면 최고 부유층의 재산 증가 속도는 분명히 슬로다운하고 있다. 가장 최근 영국 상위 1,000가구에 새로 진입한 이들의 총 재산 규모 역시 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pp.460~461
어째서 지난 130년 동안 인류는 이렇다 할 새로운 ‘~주의(이즘, ism)’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까?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조차도 이미 오래된 개념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게 1880년대이다. ... 1880년대 이후로 이렇다 할 새 ‘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지금 사람들은 몇 가지 ‘주의’를 적절히 섞어 변종으로 만든 아이디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에겐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는 상태다. 지금의 사회주의는 예전보다 순화됐고, 좀 불분명해진 면도 있다. 자본주의 역시 예전만큼 혹독하지 않다.
--- pp.472~428
젊은 층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데도 부동산 인플레이션이 큰 한국의 경우, 조금씩 다가오는 슬로다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현상이 불안정을 가속화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좀 더 안정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집값 상승이 경제적 성공의 신호라는 일부 서구 정치학자들의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체득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장년층은 자신의 삶의 질이 엄청난 속도로 개선되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배경을 감안하면 부동산 불패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신봉해 온 상황이 납득되기도 합니다. 다만 앞으로 더 느려진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젊은 세대들은 다릅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밀어붙이지 말고 서로 더 많이 나누고 협력해야 합니다. 탐욕은 나쁜 것입니다.
--- p.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