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유령이 배우 중 한 사람을 골라 몸을 빌려 연기를 한다는 거지. 그렇게 선택된 배우가 공연의 스타가 된다는 거고. 두 사람 다 유령 얘기 몰라?”
유신의 농담에 휘둘리는 건 분명 어리석다. 하지만 그 농담에 지은의 팔에는 소름이 돋았다.
‘그 남자는 분명 순식간에 나타났어.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지.’
지은은 유신이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열연한 배우들이 도취해서 만들어내는 얘기겠지만, 왜 그런 거 있잖아. 무대에 서는 사람이 배역과 혼연일체가 된 나머지 무아지경에 이르는 그런 거. 우종이 넌 알지 않아? 배우니까.”
우종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열연의 대가가 접신이라면 저는 기꺼이.”
“모르지, 또. 유령이 이번 공연에서 너한테 붙을지. 지은씨, 우종이 유령 붙으라고 고사 지낼까? 공연 대박 나게.”
유신은 지은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고, 우종은 양손을 깍지 끼우고는 옆구리 스트레칭을 했다.
“글쎄요. 그 귀한 유령이 한낱 조연일 뿐인 이 몸한테까지 와주실까요?”
--- p.119
지은은 무심히, 적혀있는 시를 중얼거렸다. 시 한 줄을 읽자 다른 곳으로 이동한 듯했다. 현실의 창밖은 도시의 여름밤이지만 순식간에 안개 자욱한 둑길, 별빛 반사하는 강가, 바람이 풀 눕히는 들판에 휩싸여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사랑을 잃고 신음하는 청년이 비척거리며 걷고 있었다. 지은은 감수성에 취한 기분이 싫지 않았다. 적막한 공기 속, 시계의 유리판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마지막 행까지 읽어내렸다. 어느새 지은은 막연한 동경에 흠뻑 젖어들었다. 한유의 시가 가진 힘이었다. 그래서였다. 눈앞의 남자를 보며 환영인 줄 안 것은. 얼마쯤 걸렸을까. 야근으로 피로에 절었던 눈이 휘둥그레지기까지. 눈앞에 있는 존재가 환영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지은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설마, 제가 보입니까?”
--- p.38
인우는 서울 시내가 인민군들로 깔리고 닷새쯤 지났을 때 집으로 왔다. 당 제복을 입은 깔끔한 모습이었다.
“새 세상이 올 거예요, 어머니.”
인우는 연신 눈물을 흘리는 송씨에게 힘주어 말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 인우가 인석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당에서 내려온 지령이 있어서 움직이기가 어려웠어.”
파주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았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인우는 거기까지 말하고 뭔가를 내뱉으려다 그만두었는데, 군사기밀이라도 되는 양 함구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듯했다. 송씨가 숭늉을 떠오겠다며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인우가 엉뚱한 화제를 꺼냈다.
“배우가 될 생각이야?”
인석이 깜짝 놀라 쳐다보자 인우가 재차 물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인석은 당황스러웠다. 극단 활동을 하는 건 비밀이었다. 어머니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송씨는 끼 많은 사람을 경계하는 천생 여염집 여인이었다. 풍류를 즐기던 남편에 질려버린 탓도 있었다.
“아직 몰라.”
인석은 감추려 들었지만 인우는 믿지 않았다.
“원한다면 내가 손을 써볼 수도 있을 거야.”
인우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배우니 성악가들이니 작곡가니 하는 사람들이 지금 다 모여서 인민노동당과 뜻을 같이하고 있어.”
--- p.104
인석은 외투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진을 꺼냈다. 지난 4월, 국립극장 개관 공연을 보러 갔다가 셋이 함께 찍은 것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몇 걸음 앞서가던 영임이 뒤돌아섰던 장면이 눈에 선했다.
“나중에 우리도 이런 큰 무대에 공연을 올릴 수 있을까?”
영임은 들떠 말했고, 뒤따라가던 인석과 수찬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너나 할 것 없이 흥분해 쏟아내던 말들이 절정에 올라 있을 때 영임이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수찬씨네 그 솔숲 부지, 우리가 접수하는 거 맞지?”
수찬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누가 보면 땅 맡겨놓은 줄 알겠네, 이 사람아. 거기다 극장 짓자고 하면 나 집에서 쫓겨난다니까.”
영임은 늘 그렇듯 기도 죽지 않고 능청스럽게 맞섰다.
“그래도 난 어쩐지 그곳에 우리의 극장이 생길 것 같은걸! 수찬씨가 세운 멋진 극장 무대에 인석씨가 서는 거야. 내가 쓴 희곡으로. 두고 봐! 내가 명작을 써낼 테니까. 극장 이름도 내가 벌써 지어놨어!”
수찬과 인석이 동시에 물었다.
“뭐로?”
“소나무극장.”
화물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빛이 사진 위로 떨어졌다. 사진 속에 담긴 영임의 찌푸린 눈살이 마치 지금의 이 빛 때문인 것만 같다. 전쟁을 몰랐던 지난 4월의 햇살과, 사리원행 열차로 스며드는 10월의 햇살이 이토록 다름에도.
---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