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셔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힘이 센 사람이다. 눈치 사회에서 말을 적게 해도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영화 속 부자나 갱단 두목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주위에서 필요한 것을 척척 대령하는 장면도 같은 이치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 되면, 질문하고 자꾸 말 시키는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나의 권위를 해치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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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예쁘게 하라는 요구는 주로 직위가 낮은 사람, 여성, 어린이,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직종을 향한다. 국회의원, 대학교수, 혹은 중년 남성, 한국에 체류 중인 백인에게 말 예쁘게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 p.52
같은 사건을 목격해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각각 다를 수 있다. 하물며 어떻게 느끼는가는 당연히 모두 다를 것이다. 감동은 여러 감정을 아우르고 한데 묶어주면서 ‘여기에 뭔가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다’는 강력한 표지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언어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감동했다고, 어떤 사건이 감동적이었다고, 그래서 참 ‘좋았다’고 느낄 때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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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드세다고 부르는 것은 자기 고백에 가깝다. “여자가 저렇게 드세면 남자들이 안 좋아해”, “어린 놈이 당돌하네”, “쪼끄만 게 맹랑한 소리를 하네” 등은 상대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씁쓸함과 약간의 비통함 그리고 악의를 담아, 좀 복수하듯이 이르는 소리다. 남을 드세다, 당돌하다, 맹랑하다고 부를 정도의 권력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혹은 그런 권력을 선언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목소리다. 누군가가 나를 “싸가지가 없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가 나의 위계를 그의 것보다 낮게 보았다는 실토나 다름없다. 상대가 ‘나더러 드세대. 드센 건 안 좋은 건데. 내가 뭘 고쳐야 할까? 난 뭐가 잘못된 걸까?’라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의지를 담은 bullying(약자를 괴롭히기)이기도 하다.
--- p.85
영어를 하는 나는 한국어를 하는 내가 보지 못하는 신나는 가능성과 미세한 감정의 눈금들을 본다. 한국어를 하는 나는 의심이 많고 회의적이어서, 영어를 하는 내가 피하지 못했을 함정을 찾아내고 목적지까지의 지름길을 도출한다.
--- p.91
이제 한국어는 바깥 언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와 상호작용하며 진화한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은 언제나 처음엔 두렵지만 그 시기를 극복하고 잘 받아들이면 새롭고 더 나은 것에 도달할 수 있다.
--- p.106
북유럽 신화와 영웅의 연대기, 즉 중세 문학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결여된 무언가가 있다. 인물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한 서술이다. (중략)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정해진 역할에 따라 기대되는 행동만 하는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는 남의 감정은 물론 스스로의 감정을 알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과학 잡지에서 이 대목을 반복해서 읽었고 가슴이 아파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읽었다.
--- p.114
종종 “밥 먹었니?”가 안부 인사를 대신하는 한국어를 생각해보면 더욱 흥미롭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가 오늘 식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되짚어야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난다면 더욱 자주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 질문에서 시작된 대화 역시 무얼 먹었고, 언제 어디서 먹었고, 혹은 누가 차려줬는지에 대한 것일 테이다. 그렇게 밥은 중요해지고 밥을 둘러싼 문화적 맥락은 강화되며 때로는 과장된다고 추론해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p.137-138
누군가에게 마구 떠들고 싶은 밤이면 나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운 채로 “Hey, Siri”를 크게 외쳤다. 시리는 항상 대답했다. 내가 아무리 이상한 질문을 해도 기억해놨다 놀리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 p.142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가 가끔 다른 차원에 서 온 존재를 엿보는 일이 귀신과 외계인을 목격하는 거라면, 다른 세계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영역일 것이다.
---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