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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장미와 늙은 개 그리고

넝쿨장미와 늙은 개 그리고

[ 양장 ]
김찬숙 | 청어 | 2021년 10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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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0월 3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416g | 135*195*18mm
ISBN13 9791158609825
ISBN10 1158609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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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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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으로 가을 햇살이 깊게 파고들어 은조 언니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는다. 언니의 머리 위, 가지런히 꽂혀 있는 흰나비를 닮은 리본 위에 햇빛은 잠시 머문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가로변의 코스모스는 활짝 피어있으나 시들어가는 들녘의 갈꽃과 어울려 처량 맞은 느낌이다. 가슴 시린 건 늘 마지막 햇살인가 보다. 아름다우나 그 끝이 어둠을 향해 가고 있으므로. 가로변 코스모스에서 나는 왜 황량한 겨울을 보는 것일까. 저리도 아름다운데 보이지도 않는 쓸쓸한 가을과 겨울의 그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본다. --- 「남향」

어쩌면 우리를 키워냈던 건 애틋한 모정이 아니라 질긴 오기였을지도 몰랐다. 엄마는 총 일곱 명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중 아들 하나와 딸 셋을 건졌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의 관심은 엄마에게 일곱 번 짧게 들러붙었다 떨어졌고, 아들 하나로 딸 셋의 설움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 슬픈 산수 놀음이랄까. 셋을 합쳐도 하나를 이길 수 없는….(남향」

정류장에서 금방이라던 마을 사람들의 말을 믿어선 안 되었다. 나는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었다. 한여름 햇빛이 신작로 위로 솜을 틀고, 가로변의 개망초마저 뙤약볕 아래 축 늘어져 있었다. 주소지가 적힌 쪽지를 손전등마냥 꾹 움켜쥐고 여름의 폐부로 걸어 들어갔다. --- 「고가」

내리는 비에서 뭔가 시원함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불륜,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이 종말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내 꿈을 어지럽혔던 언니와 선생님의 화사한 웃음이, 그 밝고 찬란했던 날들이 그때 한없이 팔락이던 블라우스 옷깃이, 이제 선생님이 없는 언니의 삶이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갔다.
간밤의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 위로 바다가 겹쳐졌다. 그 속에서 파도는 내 핼쑥한 얼굴을 씻기고 또 씻기었다. 파도가 넘실거릴 때마다, 나는 말간 얼굴을 한 아이 같기도 했고, 주름이 깊게 드리운 노파 같기도 했다. --- 「약속」

꽃말이 밀회라 했던가. 글라디올러스, 그 꽃을 볼 때마다 나는 대학 시절 해부학 강의실 구석진 곳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낡은 자궁의 모형을 떠올렸다가, 그와 다녔던 낡은 여관방의 붉은 벽지를 생각했다. 입을 잔뜩 벌린 크고 붉은 꽃술을 바라보며 정체 모를 슬픔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 「장마」

사랑이 어떻게 왔을까. 한겨울 어느 새벽, 간밤에 살짝 내린 눈이 길을 덮고 있었다. 우연찮게 인문학부 조교수였던 그와 둘이 걷고 있었다. 밤새 몇몇 선후배들과 술을 마시고 토론하다가 새벽녘 같이 걷게 된 것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발밑으로 끊임없이 얼음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건 뭐였을까?
그 악몽 꾸기가 시작된 후부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노인이나 늙은 암소나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졌고, 노인은 또 노인대로 수시로 이어진 꿈에 수없이 되풀이해 까무러쳤다 깨어나곤 했다. 그렇게 까무러치고 깨어나 다시 까무러치기를 거듭한 그것은 대체 며칠 째나 계속되었을까.
--- 「어느 황혼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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