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엄마는 자주 집을 비웠고, 나는 끼니를 자주 걸렀다. 엄마가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는 날에는 다락방에 들어가 생라면을 부숴 먹었다. 창밖 고드름이 다락을 가릴 정도로 크게 자라면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눈의 여왕』을 읽고 또 읽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창밖에서 눈의 여왕이 얼음 마차를 끌고 나를 데리러 와줄 것만 같았다. 거대한 겨울 앞에서 혼자 슬퍼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가난과 눈 속에 남겨진 겨울의 벼랑 끝에서 나는 자주 웅크려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자주 울컥하게 되는 것, 자주 뭉클해지는 것임을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았다.
--- p.15~16, 「빛의 다락방」 중에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백과사전에서 병아리에 관해 찾기 시작했다. “병아리는 따뜻하게 체온을 유지해야 합니다”라는 말에 방바닥을 데우려고 보일러의 온도를 올렸다. … 병아리는 내게 사랑을 가르쳐주었다.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웅덩이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 물속에서 수면 위로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는 것, 그리고 함께 휘청해보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다면 고요히 그 존재를 다치지 않게 안아볼 수 있었을까. 그럼 사랑을 주는 기분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사랑은 알게 되는 것뿐. 사랑은 예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 p.18~19,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중에서
엄마는 모든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뭐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보기 전까지는. 엄마의 일기장을 옮긴다. … 금천 재근중학교에 입학했다. 육 개월 동안 다녔는데 엄마가 공납금 삼천오백 원을 주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통에서 다 찢어진 교복을 주워 입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공납금을 가져오라고 머리를 때렸다. 다음 날 엄마에게 졸랐더니 주워온 교복과 책가방을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나는 그걸 다시 주워 마당에 펼쳐놓았다. 소나기가 내렸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아침, 학교 가려고 기찻길을 지나는데 기차 소리가 너무 커서 내 울음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 p.20~21, 「엄마의 일기 1」 중에서
우리는 씻지도 않은 참외를 한 입씩 깨물면서 사랑과 증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새엄마에게 맞을 때마다 더 크게 울어버리면 덜 맞을 수 있다고 했고, 정미는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아빠가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누나와 엄마, 아버지랑 같이 외식을 나가 돈가스를 썰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나는 평화로운 사랑이 궁금해졌다. 따끈한 크림 스프와 토스트가 있는 그런 화목한 저녁 풍경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나의 산타가 가난한 엄마나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을 생각하면서 나는 바닥에 떨어진 참외들을 이리저리 마구 던졌다. 작은 씨앗들이 바닥에 왈칵하고 여름의 투명한 내장처럼 쏟아졌다. 참외는 힘없이 샛노랗게 터져버렸다.
--- p.44, 「사랑의 뒷면」 중에서
엄마는 어느 것 하나 지나치는 것이 없는 사람이기에 콩잎들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콩잎으로 장을 해 먹겠다며, 짜증이 잔뜩 난 내게 콩잎들을 따게 시켰다. 난 가끔 콩잎에 딸려오는 송충이에 화들짝 놀라면서 유에프오라도 나타나서 내게 초능력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지독한 짠순이 엄마를 고급 주택에 사는 아줌마들처럼 고쳐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 식은 밥에 콩잎 장아찌를 손으로 찢어서 먹는 엄마의 굽은 허리를 보았다. 한 움큼씩 푸른 콩잎처럼 부풀던 엄마의 열여덟 살이 떠올랐다. 엄마도 한때는 흰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이고 싶었을 텐데. 솜사탕처럼 떠 있는 구름들을 떼어 먹기도 하면서. 콩잎들 사이에 핀 유채꽃들처럼 하늘거리고 싶었을 텐데.
--- p.63~64, 「콩잎이 우거지는 밤」 중에서
나는 외로워지고 싶지 않아. 혼자가 된다는 사실을 잊고 또 잊어. 다시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나는 무얼 해야 하는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해. 추억을 오래 견디는 사람이 패자가 되는 법칙이 있지. 바보 같다고 해도 나는 그 아픔들을 견뎌보고 싶어. 그건 울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마음일 거야. 잊지 말아야지, 모두 다.
--- p.79,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한다」 중에서
네가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한 시절 그때의 너는 내게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서로의 순간에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은 끝이 나고야 말겠지. … 조금만 두드려도 깨져버리는 기억은 그런 거야. 그런 순간에도 사랑은 있다가도 없는 거니까. 네가 나의 마지막이 아니라도 쉽게 울고 웃을 수 있는 거야. 사랑은 지나치면 그만이니까. 또다시 올 거니까,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물어도, 너는 나를 혼자 내버려두겠지만. 진심으로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때지. 내가 없는 곳에, 그곳의 나는 무심히 빛나고 있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없는 그대가 더 많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한 시절 나의 가장 찬란한 슬픔, 잘 지내.
--- p.130~131, 「너는 나를 혼자 내버려두겠지만」 중에서
슬픔을 잊는 방식이 더딘 사람도 있고, 성실하게 슬픔을 비워내는 사람도 있다. 멀리서 걸어오는 너의 얼굴이 그립지 않고 첨벙이는 노래들이 이제 들리지 않을 때, 이토록 사소한 하나에 반응하고 더 이상 그 대상을 사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잊는 것 또한 아주 평범해진다. 나도 모르게 닳아버린 칫솔처럼. 잊는다는 건 아주 평범하고 사소하게 휘어진 사랑. 사랑은 습관이 될 수 있으나 이별은 습관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잊는다는 건 성실하게 앓는 것. 우리는 묵묵히 흐른다. 아주 평범하고 성실히.
--- p.137, 「성실한 슬픔」 중에서
우리는 끝없이 애도해야 한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 슬픔과 마주 보며 우리가 인간임을 알기 위해서. 그 사람의 빈집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죽음 또한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른 일부임을 인정하기 위해서. 그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초라하고 위대한 초능력일지도. 나의 모든 것들을 잃는 순간이 오면 나는 알게 되겠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을 이별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에 대해서. 살아 있다는 건 결국 울어야 아는 일이라고.
--- p.164~165, 「애도의 숨」 중에서
아침은 아무렇지 않게 시작된다. 국을 데워 먹고, 유리잔엔 오늘의 날씨. 문득, 거리를 걷다가 그 사람에게 미안했다. 나의 마음이 무뎌져 버린 것에 대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음에 대해.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 나의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완벽히 사랑을 과거형으로 쓸 수 있는 순간에 대해. 일상적이고 아주 사소한 순간 안에서, 모든 것은 한순간 시작된다. 걷다가 지붕 위의 풍향계를 바라본다. 잊히는 것들은 또 다른 시간에 밀려 흘러가고, 그 순간에 매달려 있는 우리들.
--- p.191, 「완벽한 과거형」 중에서
“꽉 잡아, 넘어지면 큰일 나니까.” 눈구름 속에 구멍이 났는지 함박눈이 쏟아졌다. 네 살 아들과 다섯 살 딸을 뒤에 태우고 시장으로 간다. 돌아오는 도중에 눈에 미끄러져 셋이 한꺼번에 엎어져 버렸다. 양쪽에 실어둔 과일들이 길거리에 널브러졌다. 딸이 벌떡 일어나 엎어진 나의 손을 잡는다. 아들은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를 쓴다. 넘어지는 순간 아이들이 다칠까 봐 내 몸을 바닥 쪽으로 던지는 바람에 허벅지 한쪽이 찢어지고 멍이 들었다. 울고 싶었지만 아이들 앞이어서 울음을 삼켰다. 엄마에게 피가 난다며 아들이 울었다. 나는 아이들을 껴안으며 말했다. “뚝, 세상에 울 일이 훨씬 더 많지. 이건 하나도 아픈 일이 아니야.”
--- p.207~208, 「엄마의 일기 5」 중에서
밤마다,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한 사람에게 날아가 그 사람의 슬픔을 생각합니다. 슬픔이 너만의 것이 아니라고, 너는 아직 숨 쉬고 있다고, 혼자 엎드려 있지 말라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고, 모두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고백하건대 글을 적어 내려가면서 제가 사람으로 온 이유를 하나 알았습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약속이라는 것을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은 늘 약속 없이 떠난다는 것을요. 건너온 슬픔과 사랑들은 약속이 없다는 것을요. … 나는 속삭여봅니다. 사람으로 온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 감히 사랑이었노라고. 그러니 당신은 내 곁에 부디 살아 있어달라고.
--- p.236~237, 「나가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