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오니의 위증을 추동한 것이 질투 이면의 계급적 편견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브라이오니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장면을 자주 연출하는데, 물론 그 창문은 고색창연한 영국식 저택의 창문이다. (곱게 자란 탓에 정리 강박증자이기도 한) 브라이오니는 저택의 눈으로만 세계를 본다.
--- p.32, 「사유 없이 죽을 자」 중에서
그러니까 저 민영화된 신자유주의 공적 서비스 시스템은 댄을 살릴 수 있었다. 그것도 간단하게…… 신청서 몇 장만 출력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하나의 인격체이자 주체로서의 ‘그,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들의 서류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유한 한 인간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을 생물학적 수준으로 환원시켜 ‘인구’로 셈하는 것이 또한 생명권력의 통치 기술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권력에게 그저 실업률과 질병 인구 비율, 그리고 그들에게 소용될 예산의 효율성에 관여하는 하나의 숫자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게 내버려 두었다.
--- p.55~57, 「나는 보험번호 숫자가 아닙니다」 중에서
수간호사 래치드는 그 사회를 보호해야 하는 생명권력의 수장, 그녀가 부여한 온갖 규율들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규율은 (강제된 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복종을 통해 범법과 비정상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때문이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한 정신병동을 모델로 삼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규율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이다. 마치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영화적 오마주라도 되는 것처럼 카메라는 기꺼이 규율권력의 작동 방식을 면밀히 관찰하는 현미경이 된다.
--- p.63, 「맥머피의 사인, 추장의 행방」 중에서
그러나 김군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감독이 만난 많은 인터뷰이들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이미 들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말하고자 했으나 말하지 못한 것들, 말의 ‘잉여’로서의 표정과 침묵과 경련, 그것들로부터 더 많은 5·18을 들어버렸다. 우리가 들은 그 말의 요지는 이렇다. 5·18은 아직 진행 중이다. 김군을 찾기 전까지 5·18은 끝난 것이 아니고, 양심 있는 자들은 그를 찾기 위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리라.
--- p.79, 「김군의 행방」 중에서
아우슈비츠와 관련된 최악의 영화적 재현은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1993)와 〈인생은 아름다워〉(로베르토 베니니, 1997)였을 것이다. 전자는 아우슈비츠를 스펙터클로 만들어버렸고(참혹함에 치를 떨 때조차 우리는 그 참혹함을 상품으로 소비하곤 한다), 후자는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일을 코미디(제아무리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포장되었다 할지라도)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아우슈비츠에 대한 근래 ‘최선의’ 영화적 재현, 바로 〈사울의 아들〉이 있다.
--- p.83~84, 「죽은 나를 묻으러」 중에서
감탄할 만큼 잘 연출된 영화 결말부, 정교하고도 충격적인 몽타주와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진 ‘커츠 살해/소 희생제의’ 장면은 코폴라 감독이 명백히 커츠를 노쇠한 숲의 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숙소 입구에 역광으로 서 있는 커츠, 그 앞에 소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커츠는 소다. 결국 교차편집된 부락민들의 축제 장면에서 소가 사지를 난도질당할 때, 커츠도 윌라드에 의해서 난도질당하는 것은 신화적으로 당연하다. 게다가 어둠과 빛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조명 속에서 윌라드는 커츠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역시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가 숲의 왕, 2대 커츠가 될 테니……
--- p.117, 「숲의 왕」 중에서
그 밤이 지난 후 새벽이 올 때, 잇지는 빅 조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지 이제 돼지를 삶을 시간이에요.” 그리고 다음 날 형사가 먹은 바비큐는 유난히 맛있었고, 그 겨울에 미시시피강의 메기들은 배라도 부른 듯 미끼를 잘 물지 않았다. 혹시 법(가부장적이고 남근 중심적인)이 뭔가 자신이 찾고 있던 것(역시 가부장적이고 남근 중심적인)을 먹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 p.128~29, 「옛날 옛적 버밍햄에서」 중에서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지상에 기식자가 아닌 (무)생명체가 있을까? 혹자는 대지에서 노동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생산자라고 말하지만, 농사란 식물에 기생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고 식물이야말로 아무런 대가 없이 증여하는 주인이라고 하자니, 식물은 땅에 기생하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땅의 영양은 어디서 오나? 비는 왜 내리나? 최종적으로 태양계 내에서 기식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오로지 태양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식하지 않는 주인이다. 그마저 태양계 내에서만 그렇다는 얘기다.
--- p.175, 「주인hote과 기식자parasite」 중에서
휴양지에 별장을 가지고 있고, 맘만 먹으면 충동적으로 보트 하나쯤은 구입할 수 있고, 산타크루스에서 며칠 정도 휴가를 즐길 수도 있는 부르주아 가족의 눈을 따라오던 관객들의 시선은 이제 그 안온한 삶 아래에 있는 가혹한 진실과 대면해야 한다. 복제 토끼의 날고기로 연명하면서 좀비처럼 어슬렁어슬렁 위의 삶을 흉내 내며 살아야 했던 저 아래의 사람들…… 그런 점에서 애디의 남편 게이브가 정체를 물었을 때, 레드가 한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우린 미국인들이야.” 조던 필이 보기에 미국은 그렇게 위와 아래로 양분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지상의 안온한 삶에 대해 지하의 비참한 삶은 구성적이다. 아래의 비참이 위의 안온의 조건이다.
--- p.183~84, 「(n)……1111:1111……(n)」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