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 너, 분명히 얘기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30만 원이면 우리한텐 큰돈이야.”
“그래! 내가 보니 오늘 점심때도 넘기지 못할 게 분명해. 잘된 거지 뭐!”
엄마도 아빠 편이었다. 동생 은혁이도 마찬가지였다. 은혁이는 아주 한 술 더 떠 아예 미리 죽이자는 말까지 내뱉었다. 은비가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흘겨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 죽여야 한다며 대들었다.
“그런 거 살려주면 안 되는 거잖아?”
“안 되긴 뭐가 안 돼?”
“죽이라고 허락해준대! 그치, 아빠?”
“맞아! 죽이라고 허락해줘.”
아빠와 장단이 척척 맞았다. 아주 잘 어울리는 부전자전 붕어빵이었다. --- p.21
“올봄에 태어났을 테니 아직 6개월이 되기 전이여. 요만헐 띠가 젤루 좋아! 닭으루 치면 약병아리여, 약병아리! 쩝쩝!”
다른 아저씨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면서 그들도 군침을 연신 삼켜댔다. 어른들은 모두 한통속이었다. 단 한 명도 중상을 입은 슬픈눈을 불쌍해하거나 가엽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한 끼의 먹을거리나 몇 푼의 돈벌이로 여길 뿐이었다. 은비는 그런 어른들이 하나같이 싫었다. 이맛살을 찡그리고 그들을 차례차례 쏘아보며 두 눈을 부라렸다. 특히, 눈알이 뻐근하도록 아빠와 엄마 그리고 김 씨 할아버지를 노려봤다. 손톱으로 한 번씩 얼굴을 할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은비야, 이제 어서 내드려!”
아빠가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 p.29
“4년 전 봄이었어. 아마 5월 중순이었을 거야. 장연면에 있는 박달산에서 커다란 멧돼지를 발견했지. 거리가 대략 50미터쯤 됐을 거야. 내게 등을 보인 자세로 덤불 속에 누워 있었는데, 그렇게 큰 놈은 내 평생 처음이었어. 가슴이 설레더군!”
기름걸레로 다시 엽총을 문지르며 털보 아저씨는 뒷말을 이었다. 그 당시의 장면을 회상하느라 얼굴빛이 다소 상기되었고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30미터까지 접근한 다음 떡갈나무 밑에 엎드려서 녀석을 겨냥했지. 단 한 방에 잡으려고 목덜미 급소를 정확히 겨눴어! 그리고 곧 방아쇠를 당겼지. 단 한 방에 즉사를 시킨 거지!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글쎄……. 어미젖을 물고 있는 새끼가 일곱 마리나 있는 거야. 태어난 지 열흘이 채 안 됐더라고 아저씨가 마른침을 한 차례 꿀꺽 삼켰다. 은비와 진석이도 따라서 삼켰다.
“이게 웬 떡이야 하고 다 잡아와서 충주 건강원에 몽땅 팔아넘겼지! 꽤 많은 돈을 받고서 말이야. 그랬더니 그 건강원 주인이 여기저기 사장들에게 전화를 해서 오라고 하는 거야! 방금 귀중한 보약이 들어왔다면서. 건장한 사장들 다섯 명이 금방 모이더군! 그 자리에서 어린 새끼 일곱 마리를 통째로 솥에……. 그 장면을 보고서 아,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 그동안 스포츠라는 미명하에 내가 애꿎은 생명들을 너무 많이 죽여왔구나!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며칠 동안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설치고…….” --- p.52~53
“너, 어느 고등학교 갈지 결정했어?”
“아니요. 아직…….”
“아직이라니? 내일모레면 10월이야. 이제 두 달도 채 안 남았어! 얼른 정해야지. 부모님이랑은 상의해봤어?”
“아직 안 했어요.”
저번에 담임이 부모님과 잘 상의해서 무슨 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인지 정해오라고 그랬었다. 하지만 은비는 엄마 아빠에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진학 얘기를 꺼낼 집안 분위기가 아니었다. 꺼낸다고 해도 서로 상의를 하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으로 가라고 또 윽박지를 게 뻔했다. 먼데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엄마 아빠 말에 따를까도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너는 어느 고등학교를 생각하고 있는데?”
“저도 아직…….”
“너 대체 요즘 왜 그러는 거야? 많이 변한 것 같아! 1학기 때는 열심이더니.”
담임이 목소리를 높이며 굳은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은비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이 둘씩 셋씩 어울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부모님과 상의해서 월요일까지 결정해와!” --- p.103~104
회원들과 헤어진 은비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든든한 후배들이 많이 참여해주어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발걸음이 새털보다 가벼웠다. 첩첩산중의 시골 학교 아이들이라고 얕잡아보고 스스로도 늘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생각할수록 마음이 흐뭇했다. 천군만마의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그 말이 쉽게 이해가 되었다. 여럿이 힘을 합하고 생각을 모아 함께 같은 일을 한다는 게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은비는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 p.187
“4초, 3초, 2초, 1초! 땡!”
“네, 그만입니다. 멈춰주세요. 세 분 그대로 이리 오세요.”
사회자 겸 심판이 세 선수를 불러 모았다. 셋이 나란히 섰다. 은비는 인삼이 넘어오려고 해 입을 꾹 다물고 가만가만 숨을 쉬었다. 윗배가 볼록 튀어나와 옷 속에 큼지막한 바가지를 엎어놓은 형상이었다.
“여러분! 조용히 해주세요. 판정을 내리겠습니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세 선수 다 바구니에는 인삼이 한 개도 없습니다. 텅텅 비었습니다. 먼저 11번 아저씨, 마지막 스무 번째 인삼을 다 드시지 못하고 아직도 입에 반을 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3등이십니다. 상금 10만 원과 고급 인삼 한 바구니를 드리겠습니다.”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이제 관중들의 시선은 8번 아주머니와 14번 은비에게 집중되었다. 서로들 8번이 우승이다, 14번이 우승이다, 떠드느라 장내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사회자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습니다. 두 분이 똑같이 스물한 개를 먹어치우셔서 공동 우승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개씩 더 먹게 하는 일대일 데드매치를 해서 우승자를 확실히 가릴까요? 아니면 그냥 공동 우승으로 할까요?” --- p.198~199
드디어 먼데이에게 특별히 제작된 특수 의족이 끼워졌다. 박 실장님의 말대로 왼쪽다리보다 6센티미터 정도 길었다.
“멋지다, 먼데이!”
“학생이 저기 가서 먹이로 유인해봐요.”
“먼데이, 이리 와봐!”
은비가 배추 잎을 하나 들고 저만치 걸어가서 부르자 먼데이가 절룩절룩 걸어왔다. 그렇게 먼데이를 먹이로 유인하며 뒷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기는 해도 넘어지지는 않았다. 거부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됐습니다. 이 의족은 한번 착용하면 일부러 잡아 빼지 않는한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재질도 특수재질이라 반영구적입니다. 먼데이가 거부하지 않는 걸 보니 한 4, 5일 걷기훈련을 시키면 잘 적응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의족 기술이 여기까지 와 있군요?” --- p.206~207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 모임이 상처 입은 동물은 무슨 동물이든 데리고 와서 치료를 해주고 일정 기간만 보살핀 다음에,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렇게 이중, 삼중의 그물이 쳐진 비좁고 답답한 우리에 가둬두고 늙어 죽을 때까지 데리고 있는 게 아니라요. 저런 감옥 생활은 먼데이도 원치 않을 겁니다. 비록 몇 달을 살다가 죽더라도 산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다가 죽기를 원할 겁니다.”
매우 조리 있는 설명이었다. 일리도 있었다. 먼데이도 철망이 쳐진 비좁은 우리 속보다는 자유로운 산골짜기를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