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21년 1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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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92쪽 | 276g | 130*195*15mm |
ISBN13 | 9791191859133 |
ISBN10 | 1191859134 |
최승자 중철노트 세트, 타블로이드 증정(각 포인트 차감)
출간일 | 2021년 1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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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92쪽 | 276g | 130*195*15mm |
ISBN13 | 9791191859133 |
ISBN10 | 1191859134 |
MD 한마디
[32년 만에 다시 펴내는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 출간된 지 32년 만에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을 다시 선보인다. 기존 책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쓴 산문이 더해졌다. 스스로를 게으른 시인이라 부르며, 시를 쓰지만 시로부터 멀어지기도 했던, 그러나 다시 문학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의 사색과 문장이 투명하게 빛난다. - 에세이 MD 김태희
“그만 쓰자 끝.” 32년 만에 증보하여 펴내는 시인 최승자의 첫 산문! 난다에서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다시 펴낸다. 1989년 처음 출간된 지 32년 만이다. 3부에 걸쳐 25편의 산문을 엮었던 기존 책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쓰인 산문을 4부로 더해 증보한 개정판이다.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이래 ‘가위눌림’이라 할 시대의 억압에 맞서며 육체의 언어를, 여성의 목소리를,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낸 시인. “경제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사용되는 시적 선회로, 우리 시대에 가장 투명한 말의 거울”(황현산)이 된 시인. 그러나 정작 투고할 시편들을 서랍에 넣어둔 채 몇 달이나 잊어버리고는 그게 다 자신의 지독한 ‘게으름’ 탓이었다 무심히 말하는, 시리도록 투명한 시인. 그가 시집 대신 산문집으로 다시, 32년 전의 첫 산문집으로 다시, 감감했던 날들에서 건져올린 새 산문을 덧대어 다시, 돌아왔다. 새 몸을 입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등단 이전인 1976년에 쓴 산문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로 출발해 2013년의 글 「신비주의적 꿈들」에 이른다. 시인 최승자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그 세월과 그 흐름의 지표로 선 글들이다. 때로는 일기였다가, 때로는 고백이었다가, 시대의 단평이거나 문단의 논평이었다가, 기어이 시론이 되고 마침내 시가 되는 산문집이다. |
1부 배고픔과 꿈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 13 배고픔과 꿈 16 산다는 이 일 20 시를 뭐하러 쓰냐고? 24 도덕 하는 사람들 28 성년成年으로 가는 여행 35 맹희 혹은 다른 눈眼 39 죽음에 대하여 47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56 가수와 시인 61 머물렀던 자리들 66 2부 헤매는 꿈 나의 유신론자 시절 75 호칭에 관하여 79 헤매는 꿈 83 둥글게 무르익은 생명 88 짧은 생각들 92 한 해의 끝에서 97 비어서 빛나는 자리 100 유년기의 고독 연습 103 없는 숲 109 양철북 유감 113 3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폭력을 넘어서 119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124 1980년대의 시에 관하여 130 ‘가위눌림’에 대한 시적 저항 135 4부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여자가 여자에게 145 일중이 아저씨 생각 150 새에 대한 환상 154 H에게─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159 최근의 한 10여 년 172 신비주의적 꿈들 176 시인의 말 183 개정판 시인의 말 187 |
최승자가.
어느 날 시인 최승자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았다. 외삼촌이 보호자로 따라 나온 인터뷰에서 시인은 그 사실을 밝혔다. 오랫동안 시를 썼고 어떤 시는 누구라도 알만한 유명한 시인데도. 시를 써서는 생활이 안 되었다고. 인연이 있는 출판사에서 매달 25만 원씩을 부쳐 주었다. 최승자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고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내가 글을 읽는다기보다 글이 나를 읽어내는 느낌의 책이었다. 문장이 저희들끼리 소곤대면서 현실의 나를 흘깃거렸다. 네가 이걸 읽는단 말이지. 그게 가당키나 할 것 같아 하는 식으로. 시인의 산문은 나를 추궁했다. 1976년과 2021년 사이에 쓰인 글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었을 때나 최승자의 글은 또렷하고 명징했다.
최승자의 시와 시론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글이었다. 결국은 삶이었다. 살아내는 것이었다. 시가 무엇인지 의문하는 일은 삶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되짚는 일이었다. 독일어를 전공한 최승자는 『양철북』을 끝내 읽어내지 못했다. 간첩 혐의로 감옥에서 수감 중인 그가 책장에 쓴 글 때문이었다. 출근길에 엄마를 보고도 끝내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살아 있다는 게 때론 죽어 있는 게 아닐까 헛갈리기도 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도 시를 썼다. 문학을 하고 나중에는 신비주의 사상에 젖어 들어갔다. 한때 나는 시를 읽으며 나 자신이 곧 뭐라도 될 것 같은 기분에 취하기도 했다. 시는 읽는 동안은 그랬다. 그럼 시를 쓸 때는 어땠을까. 겉멋과 허세에 찌든 문장을 쓰며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을 내내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오랫동안 시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잠깐 괴롭고 잠깐 우울해했다. 그렇게 시는 떠났고 아직도 세상 바깥에서 헤매고 있다.
2021년에 최승자는 이렇게 쓴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웃음이 난다고 그게 또 웃을 일인가 자조하면서 그만 쓰자고 정확하게 끝을 외치는 최승자. 존멋이다. 웃을 일이 아닌 건 또 뭔가. 되지도 않는 말에는 재치 있는 말을 하지 못하고 웃어버리는데 자꾸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또 나를 우습게 여긴다. 대학교 4년 동안 문학을 배웠는데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는 시간을 내내 보내고 있다.
괜찮고 다 괜찮을 것.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길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무엇이 시가 되고 시가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 모르겠음이 답답하지 않은 건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을 쓰기만 해도 시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고 자꾸 벅차오르고. 최승자 시인이 밥 먹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뭐든 쓸 테니까.
작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책을 읽었다.
처음엔 남성인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p25 시를 뭐하러 쓰냐고? 글쎄 그럼 시를 뭐하러 안 쓰지?
중략
그래,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나의 내부만을 들여다 보았다, 몇 년간을 한자리에 꼼짝 않고 주저앉아서 썩어가는 웅덩이만을 들여다보았다. (1981)
p158 새해 대한 나의 환상은 그때 깨어졋다 그 이후로 나는 하늘에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로음을 그리기보다는 그들 날갯짓이 중노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1996)
p166 그것은 한마디로 일종의 파열이었어. 찢어져 열린다는 것. 스스로 만들고 갇혔던 감옥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나오게 되었다는 느낌. 그리고 그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는 것.
쓰여진 년도를 보면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뜨문뜨문 작가정보를 보게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었고 번역일도 했던 모양이다. 그냥 괴짜같아서 읽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전혀 세대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잡히지는 않아도 그냥 다 알거 같은 이 마음은 뭔지 최근에 좀 아프신듯한데 건강이 회복되셔서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됩길 바랍니다.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 같다. 최승자를 시로만 만나다 산문은 처음이다. 놀랍도록 진솔하고 정확한 언어 배치다. 이토록 투명하고 명석한 그를 괴롭힌 환청과 정신분열. 그것은 그의 남다른 무의식과 감성을 틈탄 것이었나…. 아무튼 그가 짧은 소설이든 뭐든 생존음을 계속 알려오면 좋겠다.
한숨짓고 세상을 다 잃은 기분에 빠져 있던 나는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통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산문집은 1980년대 유신 치하의 “어두운 시대”를 품고 있다. 그런 폭압과 폭정의 구조 속에서도 시와 비평은 새로운 ‘매체’를 분주히 찾고, 운동이 확산되었던 사실이 위로를 안긴다. 세련되게 대항하고 싶은 바람이 짙었나보다. 구체적으로 의식화하고 활자화하고 공식화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봄이 왔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라 더 불안하고 괴롭다. “사회 전체의 정의와 안녕”을 도둑맞은 더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차라리 선거를 겨울에 치렀더라면 덜 슬프고 아팠을까 별별 생각을 다하는 요즘이다. 국민을 다시 쌀쌀한 거리로 나서게 되감는 시간이 야속하다가도 터져 나오는 건강한 함성에 마음을 달랜다.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치인들이 스멀스멀 나오고, 절대 아니라고 보는 핵관들을 자주 비추고... 기사 속 얼굴들이 폭력 그자체인 안 본 눈을 사고 싶은 시간이다. 어떻게든 “선택적 행복의 실천”을 찾아 “잠재태”의 주문을 거는 밤이로다.
아가들은 저가 싸놓은 똥을 뭉개면서도 즐겁게 노래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즐겁지 못하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입안에서 그 오물이 자꾸만 커져가는 듯하고, 그러한 느낌. 그러한 의식 자체가 우리의 숨통을 짓눌러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퍼질러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일단은 떠나야 한다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58-59)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먼 외국이었던가를 알게 되었고, 내가 나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을, 터무니없는 믿음체계들은 하나씩 벗겨져나갔지...
그러므로 그 용은 환영이며, 따라서 그 용과는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우리가 생각으로 키워낸 것이므로 생각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것이지...
대면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내가 만든 환영임을 알 수 없고, 그런 가운데 그 용의 환상은 점점 더 커지면서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게 되니까.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