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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산문집

[ 양장, 개정판 ]
최승자 | 난다 | 2021년 11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4 리뷰 18건 | 판매지수 3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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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21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92쪽 | 276g | 130*195*15mm
ISBN13 9791191859133
ISBN10 1191859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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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MD 한마디

[32년 만에 다시 펴내는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 출간된 지 32년 만에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을 다시 선보인다. 기존 책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쓴 산문이 더해졌다. 스스로를 게으른 시인이라 부르며, 시를 쓰지만 시로부터 멀어지기도 했던, 그러나 다시 문학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의 사색과 문장이 투명하게 빛난다. - 에세이 MD 김태희

“그만 쓰자 끝.”
32년 만에 증보하여 펴내는
시인 최승자의 첫 산문!


난다에서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다시 펴낸다. 1989년 처음 출간된 지 32년 만이다. 3부에 걸쳐 25편의 산문을 엮었던 기존 책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쓰인 산문을 4부로 더해 증보한 개정판이다.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이래 ‘가위눌림’이라 할 시대의 억압에 맞서며 육체의 언어를, 여성의 목소리를,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낸 시인. “경제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사용되는 시적 선회로, 우리 시대에 가장 투명한 말의 거울”(황현산)이 된 시인. 그러나 정작 투고할 시편들을 서랍에 넣어둔 채 몇 달이나 잊어버리고는 그게 다 자신의 지독한 ‘게으름’ 탓이었다 무심히 말하는, 시리도록 투명한 시인.

그가 시집 대신 산문집으로 다시, 32년 전의 첫 산문집으로 다시, 감감했던 날들에서 건져올린 새 산문을 덧대어 다시, 돌아왔다. 새 몸을 입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등단 이전인 1976년에 쓴 산문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로 출발해 2013년의 글 「신비주의적 꿈들」에 이른다. 시인 최승자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그 세월과 그 흐름의 지표로 선 글들이다. 때로는 일기였다가, 때로는 고백이었다가, 시대의 단평이거나 문단의 논평이었다가, 기어이 시론이 되고 마침내 시가 되는 산문집이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1부 배고픔과 꿈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 13
배고픔과 꿈 16
산다는 이 일 20
시를 뭐하러 쓰냐고? 24
도덕 하는 사람들 28
성년成年으로 가는 여행 35
맹희 혹은 다른 눈眼 39
죽음에 대하여 47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56
가수와 시인 61
머물렀던 자리들 66

2부 헤매는 꿈
나의 유신론자 시절 75
호칭에 관하여 79
헤매는 꿈 83
둥글게 무르익은 생명 88
짧은 생각들 92
한 해의 끝에서 97
비어서 빛나는 자리 100
유년기의 고독 연습 103
없는 숲 109
양철북 유감 113

3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폭력을 넘어서 119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124
1980년대의 시에 관하여 130
‘가위눌림’에 대한 시적 저항 135

4부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여자가 여자에게 145
일중이 아저씨 생각 150
새에 대한 환상 154
H에게─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159
최근의 한 10여 년 172
신비주의적 꿈들 176

시인의 말 183
개정판 시인의 말 187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그러나 나는 이제 이 자리를 뜨고 싶다. 눈길을 돌리고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어서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펴고서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가고 싶다. 움직이고 싶다. 다른 많은 것을 보고 싶다. 내가 아닌 다른 아름다운 것들을. 썩은 웅덩이로부터 눈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저 들판과 길에 나도는 수많은 아름다운 것이 내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어느 순간 나는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나 걷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순간을 꿈꾸고 있다. 내가 첫발을 떼어놓는 그 순간을.
그러니까, 언제나 내 꿈을 짓밟아오기만 한 인생아, 마지막으로 한판만 재미있게 잘 풀려줄래? 그러면 그다음에 내가 고이 죽어줄게. 꽃처럼 피어나는 모가지는 아니지만, 고이 꺾어 네 발밑에 바칠게. 이번에도 네가 잘 풀려주지 않으면 도중에 내가 먼저 깽판 쳐버릴 거야. 신발짝을 벗어서 네 면상을 딱 때려줄 거야. 그리고 절대로 고이 죽어주지 않을 거야.
--- p.26~27, 「시를 뭐하러 쓰냐고?」 중에서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끝과 시작처럼 떠난다는 것과 되돌아온다는 것은 하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무수히 떠나고 무수히 되돌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그것도 대부분 괴로움과 불행의 시간을 바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어쩌면, 행복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행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는, 조금은 쓴, 그러나 넉넉한 인식뿐일는지도 모른다. (……) 인간은 강하되, 그러나 그 삶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아주 떠나지는 못한 채, 그러나 수시로 떠나 수시로 되돌아오는 것일진대,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한번 물으면 어느새 비가 내리고,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두 번 물으면 어느새 눈이 내리고, 그사이로 빠르게 혹은 느릿느릿 캘린더가 한 장씩 넘어가버리고, 그 지나간 괴로움의 혹은 무기력의 세월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 띄워놓고 보면, 사랑인가, 작은 회한들인가, 벌써 잎 다 떨어진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한 해가 이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나 그 헐벗음 속에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할 차례일지도 모른다.
--- p.59~60,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중에서

시에 대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믿음과 환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하더라도, 그러나 최소한 데뷔 시기를 전후하여 시를 쓰고 싶다는 열정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갖고 있었던 한 시인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시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없고, 시를 쓰고 나면 다시 읽어보기도 싫고, 시를 쓰고 나서도 마뜩지가 않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뭔가 미진하고 뭔가 아쉬워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인, 메마른 불모의 시인. 그런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할 가치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는 비난의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듯도 하다. 그런데도 시를 쓰는 한 나는 시인인 것일까? 어쩌면 내 시를 읽는 독자들 중에서, “무슨 시가 이래? 맛있는 살코기는 하나도 달려 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뼈다귀만 남았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영양분이 담뿍 들어 있는 맛있는 살코기를 제공하지 못하는 시인.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불모의 딱딱한 뼈다귀만을 내놓는 시인(혹시나 그 뼈다귀를 푹푹 고아 맛있는 국물이라도 우러나온다면. 제발 그럴 수라도 있다면).
--- p.127~128,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한번 생긴 공포는 무수한 세포분열을 하며 뚱뚱하게 살찌고, 그렇게 해서 우리 존재의 바탕에 자리잡은 공포는 우리의 저 깊은 안쪽에서 보이지 않게 우리를 조종하면서 우리 삶을 이끌어가고, 그 궁극적인 목적지는 죽음이며, 거기까지 가는 동안 많은 죽음의 형식을 실험하고 시연하지.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공포가 꽃수레에 올라타고 자신의 목적지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인지도 몰라. 공포가 자신의 파괴성을 못 이겨 죽음으로써 자신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지. 한번 생겨나 확장하면서 힘을 얻은 감정은 그 자신의 힘과 무게를 주체 못해 바깥으로 쏟아져나올 수밖에 없어. 그렇게 바깥으로 쏟아져나옴으로써 생기는 갖가지 사건과 관계와 상황으로 이루어진 감옥 같은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condition’의 정체일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마지막, 최후의 ‘condition’이 한 사건으로서의 죽음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나는 공포와 더불어 그것의 목적지인 죽음에 대해서 얼마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면서, 끊임없이 죽음과 불행과 절망을 토해내던 쥐, 그 쥐의 울음, 그것이 내 시들이었을까?
--- p.162~163, 「H에게─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중에서

나를 병에 지치게 한 것들에서 손을 뗀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시는 그대로 쓸 것이고, 그러나 문학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나는 이미 옛날의 내가 아니어서 다른 꿈을 슬쩍 품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시원성始原性에 젖줄을 대고 있는 푸근하고 아름답고 신비하고 이상하고 슬픈 설화 형식의 아주 짧은 소설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 p.175, 「최근의 한 10여 년」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비어서 빛나는 자리,
최승자의 40여 년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오랜 묵힘’을 지난 최승자 시인의 기별이다. 출간 소식으로는 2016년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이후 5년 만이다. 지난 시집과 전작 『물 위에 씌어진』 사이에도 5년의 침묵이 있었다.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시집의 간격은 11년으로 더 길었다. 좀처럼 자주 기별하지 않는 시인. “내가 살아 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 말했던 시인.

4부로 추가된 근작 중에는 아예 「최근의 한 10여 년」이라 머리를 달았다. 어떠한 욕심도 없으므로 꾸밈은 더 없는 근황이다. 1998년 시집 『연인들』을 펴내던 중 발병한 조현병으로 정신과 병동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서양 점성술과 신비 체계, 지나서는 노자와 장자 사이 “어떤 비밀스러운 다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그러나 해체는커녕 구조를 보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는 그 다리 위에서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고, 시인은 무심히 말한다. 나를 병에 지치게 한 것들에서 이제 그만 손을 떼야겠다고, 다만 ‘letting go’ 해버렸다고.

그리하여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물으면 시인의 대답은 그저 무심하다. “문학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나”, 그러므로 “시는 그대로 쓸 것”이라고. 이미 예전의 자신과는 돌이킬 수 없이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그 돌아올 곳이 문학임에는 의심이 없다. “어떤 시원성(始原性)에 젖줄을 대고 있는 푸근하고 아름답고 신비하고 이상하고 슬픈 설화 형식의 아주 짧은 소설들을 써보고 싶다”는 비전을 슬며시 내비치기도 했다. 다시금 문학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다짐으로, “그래서 요즈음은 문학책들도 부지런히 읽고 있다”고, 무심하여 의심 없는 맑은 언어로(「신비주의적 꿈들」).
그렇게 ‘최근의 한 10여 년’을 돌아본 때로부터 다시 10여 년이 흘렀다. 그사이 2014년에 출판사가 시인에게 이 산문집의 재출간을 요청했고 2019년 허락을 받았다. 2021년 11월 11일, 재출간을 앞두고 병원으로 거처를 옮긴 시인에게 새 ‘시인의 말’을 받아적었다. 수화기 너머 또박또박, 섞박지용 순무 써는 듯한 큼지막한 발음이었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 「개정판 시인의 말」 전문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이 책을 말할 때, 아니 최승자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죽음’일 것이다. 시인이 문득 과거를 돌아볼 때 죽음은 태연히 거기에 있다. 아예 책 속에 「죽음에 대하여」라는 글도 있다. 외할머니댁 머슴 일중이 아저씨의 ‘스스로 나선’ 죽음, 첫 하숙집 주인아저씨의 ‘농담 같은’ 죽음, 슬픔 가운데 ‘위안이 된’ 할머니의 죽음.

그러나 그리하여, 최승자는 죽음을 넘어, 죽음의 다음으로, ‘죽음의 죽음’에까지 나아간다. 그저 덤덤히 “죽음은 깊고 짙고 강렬하며 무르익은 관능과 연결된 것”이었다 고백하며, 그것이 “내가 나의 삶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곧이 반성하는 것이다. 마침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관능이라 믿었던 ‘죽음’의 실체마저 죽임을 당할 때, 시인은 자신의 네번째 시집 『내 무덤, 푸르고』의 제목을 다르게 읽어본다. “하긴, 그것은 내 죽음을 담은 무덤이었는지도 모르겠다.”(「H에게」)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던 시인. 그러나 최승자는 끝내 절망으로, 죽음으로 들어가는 대신 번번이 삶으로 돌아나온다. 홀연히 삶이라는 루머 속으로 되돌아온다. “어차피 한판 놀러 나왔으니까, 신명 풀리는 대로 놀 수밖에” 없다고(「산다는 이 일」) 선언하며, 한판 인생 재미있게 풀려주지 않을 바에야 먼저 “깽판” 쳐버리겠다고, 절대로 고이 죽어주지 않겠노라고(「시를 뭐하러 쓰냐고?」) 다짐하며.

시인은 죽음 쪽으로 꺾인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직시하여 너머를 본다. 거기서 성큼 더 나아가 우주와 신비, 정신의 세계로 훌쩍 떠나버린 듯도 보인다. “세계를 관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는”(황현산) 시도라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를 절망하게 하더라도, 시인이 끝까지 붙잡고 있는 ‘오직 그것’이란 결국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이곳, 다시 삶의 자리다. “눈 가린 절망과 눈 가린 희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습성”으로, 삶과 맞서면서도 삶을 아주 벗지는 않고,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단단해지는 삶의 기록을 써내려갔다.

인간은 강하되, 그러나 그 삶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아주 떠나지는 못한 채, 그러나 수시로 떠나 수시로 되돌아오는 것일진대,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한번 물으면 어느새 비가 내리고,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두 번 물으면 어느새 눈이 내리고, 그사이로 빠르게 혹은 느릿느릿 캘린더가 한 장씩 넘어가버리고, 그 지나간 괴로움의 혹은 무기력의 세월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 띄워놓고 보면, 사랑인가, 작은 회한들인가, 벌써 잎 다 떨어진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한 해가 이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나 그 헐벗음 속에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할 차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 결국,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발음해야만 한다’.
─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중에서


나는 지금 그 순간을 꿈꾸고 있다.
내가 첫발을 떼어놓는 그 순간을.


시원에의 그리움으로 “시원병(始源病)”을 앓고 있다는 시인(『물 위에 씌어진』 시인의 말).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성으로서 출생신고를 한, 우리 시대의 첫번째 시인”(김소연). 그는 시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고, 문 뒤의 문을, 문 너머의 문을 거듭 열어젖히며 나아왔다. 살아짐으로 살아남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사라지지 않을 이름이 되었다. 그 이름대로, “최승자가 어디에 있건 그는 이기는 자이다. 그는 한 번도 항복한 적이 없다”(황현산).

25세에 자신이 썼던 “다시 나는 젊음이라는 열차를 타려 한다”라는 문장을 마주하고 웃음이 나올 뿐이라던 38세의 시인. 다시 32년 만에 돌아보게 된 자신의 말을 앞에 두고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는 70세의 시인. “웃을 일인가” 스스로 물으며 “그만 쓰자” 스스로 답하는 시인. “끝”, 그렇게 말하고 이렇게 마침표를 두는, 한 게으른 시인. 최승자라는, 부단히도 게으른 한 시인의 이야기.

시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없고, 시를 쓰고 나면 다시 읽어보기도 싫고, 시를 쓰고 나서도 마뜩지가 않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뭔가 미진하고 뭔가 아쉬워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인, 메마른 불모의 시인. (……)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게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보자면 나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러나 그 단 한 가지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온다.
─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 개정판 시인의 말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2021년 11월 11일
최승자

회원리뷰 (18건) 리뷰 총점9.4

혜택 및 유의사항?
파워문화리뷰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최승자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돼**스 | 2022.05.14 | 추천1 | 댓글1 리뷰제목
  최승자가.   어느 날 시인 최승자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았다. 외삼촌이 보호자로 따라 나온 인터뷰에서 시인은 그 사실을 밝혔다. 오랫동안 시를 썼고 어떤 시는 누구라도 알만한 유명한 시인데도. 시를 써서는 생활이 안 되었다고. 인연이 있는 출판사에서 매달 25만 원씩을 부쳐 주었다. 최승자는 기초생활수;
리뷰제목




 

최승자가.

 

어느 날 시인 최승자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았다. 외삼촌이 보호자로 따라 나온 인터뷰에서 시인은 그 사실을 밝혔다. 오랫동안 시를 썼고 어떤 시는 누구라도 알만한 유명한 시인데도. 시를 써서는 생활이 안 되었다고. 인연이 있는 출판사에서 매달 25만 원씩을 부쳐 주었다. 최승자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고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내가 글을 읽는다기보다 글이 나를 읽어내는 느낌의 책이었다. 문장이 저희들끼리 소곤대면서 현실의 나를 흘깃거렸다. 네가 이걸 읽는단 말이지. 그게 가당키나 할 것 같아 하는 식으로. 시인의 산문은 나를 추궁했다. 1976년과 2021년 사이에 쓰인 글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었을 때나 최승자의 글은 또렷하고 명징했다.

 

최승자의 시와 시론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글이었다. 결국은 삶이었다. 살아내는 것이었다. 시가 무엇인지 의문하는 일은 삶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되짚는 일이었다. 독일어를 전공한 최승자는 『양철북』을 끝내 읽어내지 못했다. 간첩 혐의로 감옥에서 수감 중인 그가 책장에 쓴 글 때문이었다. 출근길에 엄마를 보고도 끝내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살아 있다는 게 때론 죽어 있는 게 아닐까 헛갈리기도 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도 시를 썼다. 문학을 하고 나중에는 신비주의 사상에 젖어 들어갔다. 한때 나는 시를 읽으며 나 자신이 곧 뭐라도 될 것 같은 기분에 취하기도 했다. 시는 읽는 동안은 그랬다. 그럼 시를 쓸 때는 어땠을까. 겉멋과 허세에 찌든 문장을 쓰며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을 내내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오랫동안 시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잠깐 괴롭고 잠깐 우울해했다. 그렇게 시는 떠났고 아직도 세상 바깥에서 헤매고 있다.

 

2021년에 최승자는 이렇게 쓴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웃음이 난다고 그게 또 웃을 일인가 자조하면서 그만 쓰자고 정확하게 끝을 외치는 최승자. 존멋이다. 웃을 일이 아닌 건 또 뭔가. 되지도 않는 말에는 재치 있는 말을 하지 못하고 웃어버리는데 자꾸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또 나를 우습게 여긴다. 대학교 4년 동안 문학을 배웠는데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는 시간을 내내 보내고 있다.

 

괜찮고 다 괜찮을 것.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길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무엇이 시가 되고 시가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 모르겠음이 답답하지 않은 건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을 쓰기만 해도 시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고 자꾸 벅차오르고. 최승자 시인이 밥 먹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뭐든 쓸 테니까.

 

 

댓글 1 1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
구매 한 게으른 독자의 리뷰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허************S | 2022.04.03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작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책을 읽었다. 처음엔 남성인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p25  시를 뭐하러 쓰냐고?  글쎄 그럼 시를 뭐하러 안 쓰지?  중략 그래,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나의 내부만을 들여다 보았다, 몇 년간을 한자리에 꼼짝 않고 주저앉아서 썩어가는 웅덩이만을 들여다보았다. (1981) p158 새해 대한 나의 환상은 그때 깨어졋다 그 이후로 나;
리뷰제목

작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책을 읽었다.

처음엔 남성인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p25  시를 뭐하러 쓰냐고?  글쎄 그럼 시를 뭐하러 안 쓰지? 

중략

그래,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나의 내부만을 들여다 보았다, 몇 년간을 한자리에 꼼짝 않고 주저앉아서 썩어가는 웅덩이만을 들여다보았다. (1981)

p158 새해 대한 나의 환상은 그때 깨어졋다 그 이후로 나는 하늘에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로음을 그리기보다는 그들 날갯짓이 중노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1996)

p166 그것은 한마디로 일종의 파열이었어. 찢어져 열린다는 것. 스스로 만들고 갇혔던 감옥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나오게 되었다는 느낌. 그리고 그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는 것.

쓰여진 년도를 보면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뜨문뜨문 작가정보를 보게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었고 번역일도 했던 모양이다. 그냥 괴짜같아서 읽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전혀 세대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잡히지는 않아도 그냥 다 알거 같은 이 마음은 뭔지  최근에 좀 아프신듯한데 건강이 회복되셔서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됩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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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싱* | 2022.04.02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 같다. 최승자를 시로만 만나다 산문은 처음이다. 놀랍도록 진솔하고 정확한 언어 배치다. 이토록 투명하고 명석한 그를 괴롭힌 환청과 정신분열. 그것은 그의 남다른 무의식과 감성을 틈탄 것이었나…. 아무튼 그가 짧은 소설이든 뭐든 생존음을 계속 알려오면 좋겠다.  한숨짓고 세상을 다 잃은 기분에 빠져 있던 나는 ‘한 게으;
리뷰제목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 같다. 최승자를 시로만 만나다 산문은 처음이다. 놀랍도록 진솔하고 정확한 언어 배치다. 이토록 투명하고 명석한 그를 괴롭힌 환청과 정신분열. 그것은 그의 남다른 무의식과 감성을 틈탄 것이었나. 아무튼 그가 짧은 소설이든 뭐든 생존음을 계속 알려오면 좋겠다.

 한숨짓고 세상을 다 잃은 기분에 빠져 있던 나는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통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산문집은 1980년대 유신 치하의 어두운 시대를 품고 있다. 그런 폭압과 폭정의 구조 속에서도 시와 비평은 새로운 매체를 분주히 찾고, 운동이 확산되었던 사실이 위로를 안긴다. 세련되게 대항하고 싶은 바람이 짙었나보다. 구체적으로 의식화하고 활자화하고 공식화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봄이 왔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라 더 불안하고 괴롭다. “사회 전체의 정의와 안녕을 도둑맞은 더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차라리 선거를 겨울에 치렀더라면 덜 슬프고 아팠을까 별별 생각을 다하는 요즘이다. 국민을 다시 쌀쌀한 거리로 나서게 되감는 시간이 야속하다가도 터져 나오는 건강한 함성에 마음을 달랜다.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치인들이 스멀스멀 나오고, 절대 아니라고 보는 핵관들을 자주 비추고... 기사 속 얼굴들이 폭력 그자체인 안 본 눈을 사고 싶은 시간이다. 어떻게든 “선택적 행복의 실천을 찾아 잠재태의 주문을 거는 밤이로다.

 

 아가들은 저가 싸놓은 똥을 뭉개면서도 즐겁게 노래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즐겁지 못하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입안에서 그 오물이 자꾸만 커져가는 듯하고, 그러한 느낌. 그러한 의식 자체가 우리의 숨통을 짓눌러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퍼질러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일단은 떠나야 한다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58-59)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먼 외국이었던가를 알게 되었고, 내가 나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을, 터무니없는 믿음체계들은 하나씩 벗겨져나갔지...

 그러므로 그 용은 환영이며, 따라서 그 용과는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우리가 생각으로 키워낸 것이므로 생각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것이지...

 대면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내가 만든 환영임을 알 수 없고, 그런 가운데 그 용의 환상은 점점 더 커지면서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게 되니까.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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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35건) 한줄평 총점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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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평점5점
잘 몰랐던 분인데 지금 궁금하게 만드는 이력
1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1
YES마니아 : 로얄 x**o | 2022.05.19
평점4점
간결, 시크한 문체속에 녹아 있는 삶의 통찰력! 멋진 최승자 시인!
1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1
YES마니아 : 골드 아****빛 | 2022.05.18
구매 평점5점
여유와 통찰력이 느껴지는 글들.
1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1
YES마니아 : 골드 l******2 |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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