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하는 그의 발음이 꼬여 있어서, 나는 전혀 멀쩡하지 않은 것 같다며 웃어주었다. 거의 멀쩡한 게 아니라 완전히 멀쩡했어야 했다. 거의라는 말은 언제든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니, 사실은 괜찮아진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종종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환청을 이용하곤 했다. 어쩔 수 없어, 환청 때문이야, 그러니 날 이해해야 해. 한때 나는 내가 그를 바꾸어놓았다고 착각했다. 적어도 그에게 숨 돌릴 곳을 마련해주었다고. 그를 가여워했던 게 잘못이었다. 그건 내가 이해해야 할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내 잘못인가.
--- p.18, 「침묵의 벽」
아이가 상황을 납득하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뜻 그 지시를 따를 수가 없었다. 현지의 말이 옳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이해한다는 듯 쳐다보던 현지의 눈을 다시 마주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 눈빛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당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이니까요’. 내가 현지를 설득하려 한다면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는 꼴이 될 터였다. 문제는 그 아이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었다. 막상 아이들이 내 도움을 바란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였다. 현지와의 상담 이후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이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도 내게 도와달라 하지 않는다. 서명 용지에 내 이름을 적을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 pp.49-50, 「우리 모두를 위한 일」
유리창에 비친 지친 얼굴을 들여다보던 정옥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가 아니다. 자신은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좋을 사람이 아니었다. 좀 더 제대로 맞받아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욕을 퍼부었어야 했는데. 다시는 그런 짓들을 못 하도록 따끔하게 혼냈어야 했는데. 너희들이 마음껏 얕잡아보아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일단 케이크를 배달해야 한다. 정옥은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 케이크가 정말 내 가치를 증명하는가? 입안에 들어가면 금방 사라져버릴 설탕 덩어리 따위가?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바람이 그녀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깊은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삶도 저 어둡고 차가운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영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끝맺지 못할 번역처럼 이 배달 역시 끝내 마치지 못할지도. 바람이 지나간 자리가 아려왔다.
--- pp.81-82, 「란딩구바안」
얼마 뒤, 해주는 왠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가위에 눌렸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짓누르는 무게,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촉, 흐릿하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 그러나 그녀는 가위에 눌려본 경험이 있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은 가위에 눌리는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는데, 만약 어떤 반응을 보이면 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그만 몸을 살짝 움츠리고 말았다. 순간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소리 없이 소란스럽던 방에 불안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뒤 그림자는 그녀에게서 물러나 사라져버렸다. 마치 발가락을 까닥거리면 풀려나는 가위처럼, 흔적도 없이.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두운 방에서 나와 복도를 밝히는 형광등 불빛 아래 섰을 때 자신이 겪은 일이 모두 나쁜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기 마련인 악몽과 달리, 그림자에 대한 기억은 점점 그녀를 옥죄어왔다.
--- pp.96-97, 「꾸미로부터」
연주황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날을 기억합니다. 곡 녹음 날짜가 잡히고 사무실을 찾았던 날이었지요.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점심 무렵이 지나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장의 손에 들린 믹스 커피의 달달한 향이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콘셉트와 앞으로의 활동 방향 따위를 설명하던 사장이 툭 던지듯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름말인데, ‘연주황색’할 때 그 연주황 어때? 부르기도 좋고 기억하기도 쉽고.”
연주황요? 하고 되물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고 많은 색 중에 왜 연주황일까, 궁금했을 뿐입니다.
“우리 딸내미가 요즘 연주황색 크레파스만 쓰더라고. 크레파스 통을 보는데 그 크레파스만 짜리몽땅해. 거기서 내가 딱 이거다, 싶었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가수가 되라고 말이야.”
--- p.139, 「나의 이름은」
늦은 오후에는 사보 제작 담당자로부터 문의가 들어왔다. 사진 파일이 잘못 보내진 듯하다고 했다. 확인해보니 원래 보내야 할 A컷 폴더 대신 추후 삭제할 용도로 만든 B컷 모음 폴더가 전송되어 있었다. 다시 제대로 된 파일을 보내려는데 해당 폴더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지통과 다른 하드 드라이브까지 뒤져보았지만 역시나 폴더는 찾을 수 없었다. 폴더를 잘못 지운 걸까. 보통 업무가 완료될 때까지는 필요 없는 파일이라도 모두 보관해두곤 했는데 요 며칠 정신이 없다 보니 습관적으로 삭제를 해버린 건지도 몰랐다. 잠시 뒤 다시 재촉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마침 다른 급한 업무가 들어와 정신이 없었다고 핑계를 대며 지금 폴더를 찾으려 하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퇴근 전까지 꼭 보내놓으라고 당부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열어둔 휴지통 폴더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삭제되어야 할 것들과 삭제되지 말아야 할 것들이 혼재되어 있었을, 그러나 지금은 텅 비어버린 그것을.
--- pp.177-178, 「베스트 컷」
“그 작업 나도 좋아했지. 그리고 그 다음에 했던 게 아마 자화상 작업이었지? 흔적들을 찍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왜 굳이 다른 곳에서 흔적을 찾아야 하나.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머물렀던 장소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흔적은 옅어지겠지만, 결국 그 흔적마저 내 일부가 되니까. 그러니까 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흔적도 계속 남아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
이모의 말은 내게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 같은 건 하지 말걸 그랬어.”
“그런가. 사랑 같은 거 하지 않는 게 좋았나.”
이모는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만 들어가야지. 몇 번이고 중얼거리면서도 좀처럼 움직일 생각이 없는 이모를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모는 진회색 빛 구름으로 뒤덮인 먹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곳에 앉아 있었다.
--- pp.245-246, 「모래의 빛」
스케치를 모두 끝내고, 나는 들고 나갔던 고모부의 사진을 다시 끼워 넣기 위해 그녀의 무릎 위에서 앨범을 조심스럽게 빼내 쇼파로 가져왔다. 사진이 있던 자리를 찾아 끼워 넣은 뒤 앨범을 덮으려다가 한 장씩 넘겨 보았다. 그곳에는 그녀의 가족이 보내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모부는 조금씩 자라났고, 고모의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점점 나이를 먹었다. 종종 그들과 함께 등장하는 마당의 나무는 조금씩 허리가 굽어가고 있었다. 앨범 맨 뒷장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고모가 등장했다. 거실에 앉아 웃고 있는 고모와 고모부의 뒤로, 휘어진 나무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고모의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모두 나무가 되어가고 있구나……. 아직 식지 않은 열기를 느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p.276, 「나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