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아파트 분양 카탈로그에 가장 많이 쓰였던 표현 중 하나가 ‘유럽풍’이라는 것이었다. 유럽풍 아파트, 유럽풍 디자인, 유럽풍 라이프 같은 말들이 난무했다. 아파트를 분양받는 사람들도 잘 모르고,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도 정확하게 모르던 애매한 단어 ‘유럽풍’! 대략 추정하자면, 왠지 고급스럽고, 왠지 낭만적일 것 같고, 뭔지는 몰라도 하여간 좋을 것만 같은 ‘그 느낌’을 담은 말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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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분양 카탈로그에 수없이 ‘유럽풍’이라는 단어를 적어넣는 걸 보면서, 언젠가 꼭 다시 돌아가 ‘유럽풍’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겪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리움이기도 하고 여전히 동경이기도 한 그런 감정이었던 것 같다. 2007년 겨울, 나는 길고 치열했던 한 프로젝트를 끝낸 후, 직장에 사표를 내고 한국 생활을 정리했다. 오랜 고민 끝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로, 그래서 진짜 유럽을 겪어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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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보수적이고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이 지역에서 유일한 동양인 디자이너였다. 독한 각오를 품지 않느면 버텨내기 어려웠다. 지역 디자이너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런던, 파리, 모나코 등 유럽의 도시들을 떠돌았고, 러시아, 카자흐스탄, 카타르, 두바이 그리고 심지어는 파나마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클라이언트들과 만났다. 방랑 생활에 지칠 법도 한데, 주말이면 프로젝트와 상관없이 저가 항공표를 사 들고 유럽의 다른 도시를 구경하러 떠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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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그간 많은 유럽의 나라들을 여행하고 종종 체류하면서도 크게 느끼지 못했던 나라별 차이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유럽에서 산 것이 아니라, 그저 이탈리아에서 살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럽풍’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보였던 것들이 갑자기 각기 다른 세상의 문물처럼 구분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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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모든 건물이 시에나 색의 벽돌로 지어진, 하늘이 빠끔하게 보이는 중세의 좁은 골목길에서, 나는 도시의 색상과 보색의 대비를 이루는 청명한 파란색 하늘을 보았다. 일부러 채색한 것도 아닌데, 시에나 색의 건물과 푸른 하늘이 만들어내는 대비는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색이 주는 유희에 온전히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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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면, 피렌체 사람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도 그런 하늘빛을 가지고 있었다. 「최후의 심판」보다는 채도가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그 청량함만은 아주 비슷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그때 그들이 바라보았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거장들과 비밀을 공유한 듯 마음이 두근거렸다. “나는 당신들이 무엇을 그렸는지 알고 있어”라고 혼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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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밀라노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환상적인 날씨를 보여준다. 축제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4월이 다가오면 나는 언제나 축제를 준비한다. 올해도 제대로 즐겨보겠노라 설레어 하며 기다린다. 나는 행복한 디자이너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디자인을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축제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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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엑스포를 계기로 다 빈치의 포도밭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전설로 전해지던 다빈치의 포도밭을 되살릴 수 있었던 건 과학의 힘이 컸다. 다 빈치의 포도밭에서 어떤 포도가 자랐을지 알 방법이 없었던 사람들은 우선 그곳의 흙을 채취하였다. 그리고 흙에 스며든 포도나무의 성분, 또 흙 속에 남아 있는 뿌리의 성분들을 분석해 포도나무의 DNA 성분을 밝혀냈다. DNA 성분은 어떤 품종의 포도가 이 땅에서 재배되었는지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도의 품종은 ‘말바시아 디 칸디아 아로마티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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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쇼를 보여준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패션쇼는 쇼를 준비하는 과정의 모든 노력과 열정을 함께 담고 있다. 디자이너가 공들여 만든 옷에 대한 가치를 보여주고, 경제적인 이익을 포함한 피드백을 얻기 위해 열리는 것이 패션쇼이다. 그러니 관객을 부르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이 쏟은 열정과 그에 대한 대가를 과감히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날 아르마니의 결정은 존경받는 어른, 원숙한 노인의 사려 깊은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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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그의 레트로 냉장고를 실제로 보면 또 한 번 놀라는 것 중 하나가 곡선의 정교함과 도장의 섬세한 기술이다. 스메그 레트로 냉장고의 특별한 도장 기술은 평활도와 선명한 컬러로 주목성을 높여 정교하고 미려한 곡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스메그가 위치한 작은 마을 과스텔라는 모데나라는 도시 인근에 있는데, 이 모데나에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대표적 럭셔리 브랜드인 람보르기니와 페라리가 있다. 스메그는 람보르기니와 페라리의 디자인을 만든 모데나의 금속 가공 기술과 도장 기술을 적극 활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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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구조물을 첫눈에 ‘흉측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마도 ‘낯섦’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속한 경제개발 시기에 모던화가 숙명이었던 대한민국 서울에서 온 나에게 파리에서 만난 현란한 장식들은 말 그대로 낯설고 달랐다. 그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했을 것이다. 당시의 내가 혹시 지하철역 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해도, 파리의 지하철역 같은 디자인은 꿈속에서 계시를 받지 않고서야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던 아르누보의 세계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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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나는 모네의 「수련」과의 만남을 얘기한다. 모네의 「수련」에 담긴, 살짝 보랏빛이 감도는 그 공기의 느낌은 그 이전의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물결과 꽃과 식물들에 감도는 빛의 요소, 그리고 그 빛으로 인해 부서지는 색상의 향연. 모네의 그림은 그래서, 실물로 보았을 때와 사진으로 보았을 때가 가장 느낌이 다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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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번 여행에서 찾기로 작심한 것은 고흐의 흔적이었다. 세잔이 남프랑스의 환경에서 자라 남프랑스의 빛과 평생을 함께한 사람이었다면, 고흐는 남프랑스에 이방인으로 들어와 그의 삶을 흔들어버린 이곳만의 빛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 사람의 삶을 뒤흔들어 명작을 남기게 한 남프랑스의 햇살을 만끽했다. 위대한 명작을 탄생시킨 그 햇살이 너무 고마우면서도, 고흐의 고단했던 삶을 떠올리면 또 한편으로는 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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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영국은 여왕의 나라답지 않게 여성의 사회 진출에 인색한 나라였다. 오히려 영국 연방령의 뉴질랜드나 캐나다는 영국보다 더 일찍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고, 북유럽의 국가들도 영국보다 앞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오히려 우리가 민주주의 전통이 일찍 확립된 국가라고 보는 영국, 프랑스, 미국의 경우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하기까지 어려운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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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에는 정원도 꾸며져 있고 힙스터들의 필수품인 자전거도 세워져 있었다. 햇볕이 들면 나와서 쉴 수 있는 의자도 배치되어 있었다. 운하를 따라 올라가다 도중에 정박된 보트 위에서 한 커플이 엎드린 채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자유로운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요트는 영화 속에 자주 나오는, 부자들이 샴페인을 마시고 요트 위의 풀장에서 파티를 하는 그런 고급스러운 배가 아니었다. 버려진 것이 아닐까 의실될 만큼 오래된 요트들은 나름의 개성대로 꾸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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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발이 선포되는 11월 11일 11시는 이들 11인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때부터 시작된 카니발은 프로이센이 아니라 쾰른 시민이 이 땅의 주인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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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마켓은 로마를 계승한 신성로마제국으로서 가톨릭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4주간을 축제의 분위기로 맞이한다는 뜻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현대적인 의미로 변화하면서 종교적인 색채가 다소 옅어진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지금은 겨울철 독일어권의 가장 큰 여행상품 가운데 하나이다. 오직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수공예 문화, 음식 문화 등 로컬의 전통을 경험할 수 있는 행사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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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의 호기심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짧은 시간 불꽃 같은 업적을 남긴 바우하우스에게로 향했다. 왜 바우하우스는 두 번이나 이사를 하고 세 곳에 흔적을 남겼을까? 이십사 년간의 역사, 그 시작과 끝은 어떻게 발생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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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공항까지 이르는 고속도로에는 통제를 하는 경찰과 군대 차량 이외에는 다른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초현실적으로 텅 빈 도로를 달리던 기억은 지금도 코비드 초기의 암울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으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꽤 오랫동안 하늘길이 닫혀버렸다. 그 이전에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나에게 참으로 낯선, 멈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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