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우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 세월의 흔적만큼 소중한 추억들이 쌓여 있고, 진실로 행복했습니다. 연극의 공동체 정신은 세상살이를 축소해 놓은 것과 같으니 사회의 등불이 되기에 충분했고, 그 속에서 50여 년을 지나고 보니 어느덧 황혼에 선 피에로가 되었습니다.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실낱같은 한 줄기 빛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빛은 극장으로 이어졌고, 그곳에는 또 하나의 빛이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 빛 속에서 광대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고 무언가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내 그 속으로 빠져들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었지요. 그 빛 속의 황홀함은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보름달 속의 계수나무와 토끼가 보이지 않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달 속에 사람을 올려놓는 순간 상상의 세계가 무너지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도깨비의 장난이었고, 그것들이 만들어 낸 공해는 별빛마저 가려 버렸습니다.
모든 빛의 세계에 어둠이 드리워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물질의 공해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영혼의 빛을 가리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으로 눈을 부릅뜨게 됩니다. 물질이 지배하는 영혼, 그것은 순수함까지 점점 희미해지게 할 것이니 그 앞에 선 존재들은 초라해지고 왜소해져 빛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진실의 빛이 가리어지는 세상, 유년 시절 빛을 따라온 소년은 지나온 얘기를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잃어버린 빛의 방향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빛, 물질에 가려진 순수의 빛, 영혼이 살아 있던 그 빛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변의 빛이기에 그 빛을 쫓아 동행하고자 합니다.
빛을 가리는 공해와 물질은 순수한 영혼을 가진 광대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저항의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까지 배우로 성장시켜 주신 김정옥 선생님, 연극의 역사와 인물사를 남기시는 유민영 선생님, 평화의 사도 조헌정 목사님, 같은 무대에서 수십 년을 함께해 온 배우 오영수 형의 격려의 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충청도 알프스’라고 일컫는 칠갑산 자락에 ‘청양’이란 곳이 있다. 일찍이 기독교가 들어오고 천년 고찰 장곡사가 자리하여 선각자들의 구국의 일념이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의 큰형님이 문화원장과 극장장을 겸하고 있을 때 악극단을 초대하고 영화를 들여오곤 했다.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바뀌던 시절이었으니 아주 옛날 얘기지만 바로 엊그제같이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극장과의 인연이 내 배우의 길의 출발선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추와 구기자가 유명한 청양 읍내엔 길게 개천이 흐르고 그 위 둑방 오른쪽엔 넓은 공마당이 있었다. 석양이 물들 무렵 둑방에서 나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것은 오늘 밤 공연을 알리는 소리였다. 나는 악극이나 영화나 서커스를 기어이 봐야만 했다. 적막한 시골에 신문화를 알리는 소리는 나의 예능적 정서를 자극했다.
날이 어두어지면 넓은 공터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댔다. 동네 아가씨들은 수줍은 듯 얼굴을 가리고, 극장 앞에는 전등을 밝히는 발전기 소리가 요란했다. 여름엔 모기들이 입장객을 호위하듯 모여들었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면 악사들은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내 가슴은 더욱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나팔 소리가 극장 안에서 들려오면 나는 발을 동동거렸다. 서커스는 잡히더라도 포장을 뚫고 들어가지만 극장 출입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극장에 들어서면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악단 뒤에 앉아서 연극과 버라이어티 쇼를 보았다. 50년대 구닥다리 소도시는 서양 문화가 속속 들어와 분위기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지금 배우 윤문식, 최주봉, 박인환 씨의 악극 연기는 그때 내가 본 그 모습을 재연하는 것이다.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이 흔들어대는 선정적인 몸짓, 그리고 가수들이 분장을 하고 멋지게 유행가를 뽑아 대면 극장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악극의 1부는 연극이다. 연극은 나를 사로잡았다. 1막이 끝나면 무대를 전환하는 망치 소리가 크게 울리고, 조명이 들어오면 징소리와 함께 다시 조명이 바뀌고 연극이 시작됐다. 콧날을 세우고 짙은 화장을 한 배우들은 약간 과장된 목소리로 대사를 하다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구슬픈 노래로 감정을 더욱 북돋웠다. 그때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사나흘에 한 번 프로그램이 바뀌는 것은 영화다. 대부분 흑백 영화이고 어떤 필름은 비가 내리듯 하다가 뚝 끊어지기도 했다. 그러면 입장료를 돌려 달라는 야유 소리가 터져 나오고, 상태가 아주 안 좋은 영화는 변사가 대신 구슬프게 일인다역을 하면서 감정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그때 본 영화 중에 지금 생각하면 희귀 작품들이 많다. 신상옥 감독의 초기 영화이자 최은희의 남장 영화 〈젊은 그들〉,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 권영순 감독의 〈옥단춘〉, 〈처녀별〉, 〈망나니 비서〉,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이규환 감독에 이민, 조미령 주연의 〈춘향전〉, 장동휘 주연의 〈아리랑〉, 〈봉이 김선달〉, 엄앵란의 데뷔작 〈단종애사〉, 〈뚱뚱이와 홀쭉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 〈오부자〉, 〈며느리 설움〉,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 영화를 보는 날은 어린 마음이지만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 「나팔 소리 들린다」 중에서
인생의 목표에는 늘 갈림길이 있다. 연극 인생도 마찬가지다. 출발선에 서서 누구를 만나고 어느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같이 활동하느냐에 따라 미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특히 배우들에게는 데뷔 시기인 처음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혼자 시작했고 특별한 스승을 만날 길이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연극부에 들어가 요절한 지용환 선배님을 잠시 만났고, 백전교 방송드라마 연출가에게 배운 화술 공부는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 후 몸이 쇠약해져 휴학의 길을 걷다가 건강이 회복되어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동료들과 함께 관객을 만나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배우 흉내를 내기도 하고 교회 성극도 하고 학예회 때 단막극도 하면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방황하던 나는 중요한 시기에 조민, 신국(당시 현대극회), 김진구(동랑레퍼토리) 등을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효과의 박달재(CBS), 극작의 차정룡 교수,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희곡을 선정하고 공연을 시도하였다.
그 열정으로 김석야 작, 조민 연출로 〈즐거운 수난기〉를 명동에 있는 어느 다방에 무대를 꾸며 공연했다. 영화 〈잊혀진 여인〉의 김미영과 〈바보들의 행진〉의 이영옥과 함께였다. 당시는 연극이 끝난 후 뒷풀이 자리에서의 열정적인 토론만으로도 공부가 되었다.
나에겐 스승과 단체가 절실했는데,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이해랑 선생님이 만든 극단 신협에서 출연 제의를 받은 것이다. 연출가 최현민 선생과 존경해 오던 김동원 선생을 비롯하여 영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박암, 최남현, 주선태, 박상익 선생과 이주실, 김을동, 정진, 윤병훈, 문숙, 김종결, 송환규 등의 배우들과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극단 신협은 역사와 전통은 있었으나 저무는 극단이었다. 아직 20대였던 나에겐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그때 충무로5가 연극인회관에 늘 나가 연극인들과 만나던 시절, 극단 자유에서 〈파우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많은 배우가 나오는 작품인데 조명남 씨가 나에게 인연의 끈을 이어주었다. 극단 자유의 첫 작품에 이윤영 연출이 일인다역을 주문했다. 배역에 목마른 나는 원숭이, 천사, 동네사람 등의 배역을 맡아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윤영 연출가가 극단 선생님들이 나의 열정을 보고 좋아하셨다며 입단을 권유했다. 그것은 또 한 번 새로 만나는 연극 인생이 되었다.
극단 자유는 1966년에 창단되었는데 연극 3세대인 나옥주, 최불암, 김혜자, 박정자, 윤소정, 이성웅으로 출발하여 후에 김금지, 추송웅, 함현진, 채진희, 박웅, 구문회, 오영수, 권병길, 손봉숙, 한영애로 이어지는 의욕적인 극단이었다. 나는 동경해오던 극단의 말단으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 극단 식구들 중 연출가 이윤영, 배우 추송웅, 함현진, 장건일, 도윤주, 구문회, LA로 이주한 양진웅 형님이 세상을 떠났다. 창단 50년을 넘긴 자유 대표 이병복 선생님도 떠나시고, 김정옥 선생님이 아직 극단을 지키고 계시지만 최치림 대표 체제로 이어가고 있다. 인생이 연극인지 연극이 인생인지, 극단 식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극단을 선택하고 열심히 연극 포스터를 붙이며 연습하던 때가 어제인데, 지금 칠십 중반의 연극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연극의 시작과 종점의 길 위에 선 나는 서글픈 피에로의 모습이 되어 있다.
--- 「연극의 시작」 중에서
연극배우의 길을 걸어온 지 50년이 넘었다. 그러나 나를 진정 배우로 인정하는 건 나 혼자만의 만족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 때가 있다. 아무튼 객관적 평가는 잘 들리지 않고 아직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는 자괴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분을 바르고 무대 위에 서 있었으니 몰라보는 것은 당연하고 한편 자유스럽기도 하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나는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고 떠나야 할 사람인가?’ 생각해 봤다. 한길을 쉼없이 걸어온 사람에겐 분명 신념이 작용했을 것이다. 배우가 선 무대의 기록은 조각처럼 필름에 남는 정도일까? 그러나 공기처럼 역사에 살아 움직일 거라는 믿음은 있다.
문화의 가치는 유구하다. 그 길을 걸어간 인생은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어느 노 사진작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배우의 길은 시대 변형의 독립운동”이라고 말했다. 연극은 종합예술로 가는 기초이고 중심이다. 그런데 연극은 공적 도움을 받는 데는 인색하다. 예인들 스스로 살아 남았고, 그것을 보고도 느끼지 못하는 문화 풍토가 문제다.
순수 고급 문화가 그 나라 위상의 기준이 된다. 외롭고 그늘진 연극의 길을 선택한 이들은 “자유의 포만감을 안고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그 자유가 배를 채워 준다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색내기 정책보다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예술인이 주인이 되는 행정을 말한다.
앞으로 나의 현역 생활은 십여 년 안에 끝날 수도 있다. 그래서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지난 세월을 보상받고 싶다. 다만 그 세월은 종이 인쇄물 속 사진 몇 장이 다일 것이고, 신문 한쪽에 박힌 기사가 전부일 것이다.
연극배우는 방송에 왜 안 나오느냐고 묻는다. 그 세계는 순수함이 없기도 하고 나름의 높은 기득권이 있다. 광고 스폰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런 인물이 만들어진다. 거기엔 상업적 계산이 깔려 있다.
공기가 눈에 보이느냐고 묻는다면 선명한 대답을 할 것이다. “눈엔 안 보이지만 없으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문화라는 것을 모른다. 물질 만능의 욕망의 세계, 그들이 주도하는 세계는 인간화라는 대의에서 벗어나도 물질이 모든 걸 해결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비인간화의 촉진일 뿐이다. 옛날엔 우선순위가 바뀌어 감동을 주는 시대가 있었다. 비록 물질의 보답은 약해도.
유년 시절 고향 언덕에 석양이 물들면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광대들이 왔다는 신호였다. 그들이 보고 싶어 달려가던 시절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그들을 따라 광대의 길에 들어선 세월이 50년이 넘었으니 어찌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이제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바쳐 꿈틀대던 영혼의 소리가 끝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외쳐 보련다.
--- 「연극의 길에 들어선 지 50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