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라는 물리적 실체의 역사성은 비교적 가시적으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박물관의 소장품이나 전시 등 내용적 측면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재 모습이 지니는 시간의 나이테는 정체나 성격을 포착해내기가 쉽지 않다. 마치 원래 현재의 모습을 당연히 유지해오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박물관의 소장품, 전시, 조사연구 등 제반 활동은 결코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전통과 경험이 장기간 누적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국립중앙박물관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며, 얼마나 철저하게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에 자리하며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중략)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前史)로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살펴본 것이다. 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내용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재 모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며, 미래의 발전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은 물산공진회 미술관 건물을 활용하여 개관했다. 물산공진회 미술관은 임시 건물로 지어진 물산공진회의 다른 전시관들과는 달리 벽돌로 지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2층 건물이었다. 이는 미술관을 건축한 당초부터 물산공진회가 종료된 다음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것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중략) 물산공진회의 미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전용한 일본의 사례를 식민지 조선에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하여 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카쿠라 덴신이 데라우치 총독에게 건의한 방식이기도 하였다.
---「1장 설립 과정」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은 식민지 문화의 재현과 식민지 문화재의 관리라는 두 축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두 가지 미션의 경중을 따지기는 힘들지만, 소장품을 기반으로 전시,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근대 박물관의 성격보다는 식민지의 문화재 관리와 보존사업의 기능을 지닌 식민권력의 말단 행정기구로서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 박물관 관람이 일상화되지 않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비해 어쩌면 초기에는 후자가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총독부박물관에게 부과된 우선적 책무였는지도 모른다.
---「2장 설립 목적」중에서
고적조사과의 신설은 3·1운동 이후 식민지배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무단통치로 식민지 지배와 동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의 제반 문제에 대한 조사·연구가 부족했음을 통감하였다. 1920년대 초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전통과 관습, 역사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그 보존 혹은 규명을 위해 ‘객관적’ 근거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자료 수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3·1운동 이후 고조된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각과 반일의식에 대해 ‘문화’를 내세우며 조선에 대한 존중감을 부각시킬 수 있었고, 각종 자료의 수집과 정리, 이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자 하였다.
---「3장 조직」중에서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은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새로운 자료의 취득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나 지원이 있어야 했으며, 해석을 위해서는 별도의 수학과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하였다. 일본인이 자료의 획득과 지식의 생산 및 유통을 독점하였으며, 한국인의 접근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중략) 이러한 민족적 배타성과 일본인의 독점으로 인해 해방이 되자 박물관을 인수하여 운영할 만한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조선인은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불가피하게 남한에서는 총독부박물관의 아리미쓰 교이치가, 북한에서는 평양부립박물관의 고이즈미 아키오가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년여 동안 억류된 채 각기 미군정과 소련군정에 박물관을 인계하고 지도하는 곤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4장 인력」중에서
식민지 권력이 조선에 설립한 박물관이라면 조선을 중심으로 하면서 주변 지역과 관련된 물건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것이 상례이다. 구하라가 기증한 중앙아시아 컬렉션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나 문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자료들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박물관의 전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총독부박물관이 중앙아시아 컬렉션을 기증받아서 전시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5장 소장품」중에서
고고유물과 미술공예품을 중심으로 한 총독부박물관의 상설전시는 ‘유물에 의한 역사서술로서의 전시’가 아니라, ‘유물’의 ‘역사적 전시(Historical Display)’였다. 구체적으로 식민사관의 역사 해석에 부합하는 역사서술로서의 유물 전시가 아니라, 고고유물과 미술공예품의 시계열적 배열, 즉 역사적 전시라는 은유적 방식의 문화사적 재현이었다. 이를 통해 (중략) 조선 문화의 유구성, 고유성, 우수성이 아니라, 타율성, 정체성 등의 열등감을 조장하고, 일본과의 친연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식민지 신민으로서의 의식을 고양시킨다는 식민지 박물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였다.
---「6장 상설전시」중에서
도쿄제대 문학부가 발굴한 석암리 205호분의 발굴 유물은 발굴 직후 보고서 출간을 위한 유물 정리를 명분으로 일본 도쿄제대로 반출되었으며, 또 1930년 보고서가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있다.
---「8장 1925년 도쿄제대의 낙랑고분 조사」중에서
조선고적연구회는 설립 당초 민간으로부터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에, 재정의 취약성은 연구회의 운영과 사업 내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자금을 외부로부터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는 평양의 낙랑고분이나 경주의 신라고분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그중에서도 주로 도굴이 되지 않은 고분을 대상으로 하였다.
---「9장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과 활동」중에서
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모습은 아리미쓰 교이치의 회고록에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총독부박물관의 전시실은 폐쇄되었다. 박물관 본관은 지방으로 소개하지 못한 소장품을 한데 모아둔 창고가 되었다. (중략) 용산에 있던 철도국이 박물관의 청사 공간으로 들어오려고 노렸으며, 박물관의 존속이 전쟁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까지 공공연하게 말하는 관리도 있었다. 중앙아시아 벽화가 있던 수정전은 인원이 급증한 부서의 사무실로 바뀌었고, 종래 사무실이 있던 자경전은 총독부 고관들의 관사로 징발되었다. (중략) 이러한 모습은 제국 일본이 자신들의 박물관과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와 그에 따른 정책과 행정 집행과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전시체제의 종말에 패전이 다가오는 급박한 말기적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본질적 모습을 처연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이 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1장 공출과 소개」중에서
경성고고담화회는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고고학 관련 모임이었는데, 총독부박물관과 경성제대 등 대표적인 조사 및 학술기관 중심의 인맥들은 식민지 지배자 중심의 고고학 담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략) 종래 식민지 조선의 고고학에서는 조선인이 배제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런데 경성고고담화회에는 나가타 다네히데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식민지 관료 김병욱을 제외하더라고 몇몇 조선인들이 확인된다. 바로 고유섭, 이규필, 김재원 등이다.
---「12장 식민지 박물관의 주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