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민은 기습적으로 은희를 껴안았다. 그녀가 거부할 것을 염려하여 격하게 껴안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행위가 남자답게 여겨졌고 그녀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줄 것으로 믿었다. 그녀가 비밀한 곳에 동행한 것은 은밀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민은 뜨겁고 깊은 키스를 퍼부었다. 은희도 대담하게 입술을 탐했다. 형민에게 여자는 많을수록 좋은 오락 같은 것이었고, 은희에게 남자는 갈급함을 풀어주는 마약 같은 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여자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세요. 시끄러워지기 전에.”
형민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진중하게 말했다.
“이 나이에 여자는 무슨 여자.”
“당신 이마에 연애한다고 씌어 있거든. 운전하면서도 문자 지우는 이유가 뭐겠어?”
형민은 전율을 느끼며 말했다.
“당신한테 배운 거지.”
“방 안에서도 알 건 다 아니까 좋게 말할 때 끝내셔! 여자는 유부녀고 회사 안에 있어.”
경아가 유부녀라고 추측한 것은 동물적 감각이었다.
--- 본문 중에서
“당신한테 미안한 일이 있어.”
경아는 숨을 죽였다. 수많은 생각이 숨 가쁘게 들락거렸다.
‘여자관계를 털어놓으려는 것일까?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 이혼해 줘.’
꼭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경아는 마른 잎사귀 같은 입술을 다물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출이자랑 지우 학비 보내고 당신한텐 백만 원만 넣었어. 나머지는 곧 넣어줄게.”
경아는 넋 나간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진행 중인 일이 한 건만 성사돼도 평생 먹고살 수 있다고 말한 게 한 달 전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경아는 도깨비장난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전히 그를 쳐다봤다. 침묵은 벌써 두려움이 되어 있었다.
--- 본문 중에서
형민은 한 여자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또 다른 여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스멀거렸다. 8월 말, 헬스장은 창사 기념일이라 문을 닫았고 은희는 목포에 내려가 있었다. 만만한 게 등산이었다. 그는 등산복을 챙겨 입고 가까운 산을 찾았다. 산 중턱에 올랐을 때 두 여자가 앞서가고 있었다. 그중 한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작고 마른, 단발머리 여자는 은희와 체격이 비슷했다. 미모는 아니었지만 귀염성이 있었다. 형민은 천천히 그들 뒤를 따랐다. 그녀의 이름은 유경이었다. 그녀는 간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유경이 형민에게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기회는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다른 여자가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용변이 급한 모양이었다. 형민이 유경에게 다가갔다.
--- 본문 중에서
두 여자를 사귀게 되면서 형민의 손가락은 문자놀이 종이 되어 갔고 몸도 감당이 어려웠다. 그는 은희를 멀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해외 출장을 간다거나 워크숍이 있다거나, 핑계를 대고 만나는 횟수를 줄였다. 문자를 떼어먹는 일도 일어났다.
유경에게 신경 쓰느라 지체하다 보면 잊어버린 경우였다. 그런 때 은희는 회사번호로 전화를 하거나 회사 근처로 찾아왔다. 어느 땐 두 여자를 착각하는 일도 있었다. 바빠서 시간 내기 어렵다는 문자를 은희에게 보낸다는 게 유경에게 가는 일이 발생했다. 유경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고 은희를 따돌린다는 게 둘 다 유경에게 간 것이었다. 사랑한다거나 일상적인 인사는 동시에 보내기도 했다. 두 사람 다 ‘당신’으로 통하고 있어서 여자들이 오해할 일은 없었다. 드물게는 경아 번호를 누를 때도 있었다.
--- 본문 중에서
경아는 편지를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 그 많은 세월을 함께해 온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경아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생각하는 순간에도 여자들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형민은 유혹에 현혹되지 말자며 마음을 사려 먹다가도 전화벨이 울리면 반가웠다. 전화를 받고, 전화를 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그런 날이 계속되었다.
--- 본문 중에서
“그런 여자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게 진심인 줄 알아?”
‘그런 여자’라는 말은 여자의 품행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예사롭지 않게 불륜을 저지른 것은 그의 시각으로도 온당하게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 난리 속에서 전화하고 문자 보낸 게 사랑 아니고 뭔데? 당신 스스로 생각해 봐. 땡전 한 푼 못 벌고 빚만 진 주제에 그런 여자한테 돈 쓴 게 잘한 일인지.”
“선물 사준 적 없어.”
“선물 얘기가 아니잖아. 숙박료는 누가 냈는데?”
“…….”
“아무리 뻔뻔한 년도 숙박업소에서 얼굴 들고 돈 내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건 그렇다 치자, 내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좀 전까지 내통한 게 말이나 돼? 내일도 모레도 계속하겠다는 거 아냐!”
“당신 같으면 하루아침에 무 자르듯이 할 수 있겠어?”
--- 본문 중에서
상대방 목소리는 아직도 차분했지만 경아는 스스로 외도를 하다 발각된 것처럼 떨렸다.
“……사실은 제 남편하고 내연관계인데 그동안 낌새는 없었나요?”
“……전혀 몰랐는데요.”
“변 사장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냥 넘어가면 또 그런 일을 저지를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립니다. 3년 정도 된 거 같은데 두 사람은 반성도 하지 않고 지금도 연락하고 있거든요.”
변 사장은 피가 역류한다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눈앞의 소나무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처럼 사지가 떨렸다. 그런 중에도 아내와 정을 통한 남자의 신분이 궁금했다. 남자의 사회적 지위가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면 더 자존심 상할 것 같았다.
“남편은 뭐하는 사람인데요?”
--- 본문 중에서
경아는 눈물을 훔치며 베란다로 나왔다. 바깥세상은 푸르름이 가득했지만 그곳은 죽음 같은 적막이 흘러내렸다. 윤기가 흐르던 화초는 말라붙었고, 푸른 잎을 무성하게 달았어야 할 나무는 바스스한 이파리를 힘겹게 달고 있었다. 스스로 물 한 모금 마시기도 버거워서 생명체를 돌볼 의지조차 없었던 그녀의 영혼을 닮아 있었다.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많은 빚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그게 가장 두려웠다. 빚만 없으면 입에 풀칠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당장 이자를 내지 못하면 집은 넘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빚마저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었다. 빈털터리가 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식들 몫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두려웠다. 파산선고를 할 생각도 없었고, 자식들에게 재산포기각서를 써서 부모 빚을 면하게 할 생각도 없었다. 남의 것 떼어먹은 놈 자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 본문 중에서
그의 꿈은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다. 믿고 진행해온 중국의 업체가 유령업체였고, 한국의 사무실도 철수해 버렸다는 말에 멍하니 여자 얼굴만 쳐다봤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는 평을 들으며 살아왔는데 왜 그렇게 여자를 믿었던 것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일이 터진 두 달 뒤에야 여자의 치밀한 전말을 알게 되었지만, 조폭들과 연루된 것을 알게 된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방송 날짜까지 잡아 놓고 관계자들과 통화를 했던 여자,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여자와 살림을 차린 지 1년도 되지 않아 처량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 본문 중에서
“아빠가 암 수술했대요. 대장암이 간으로 전이돼서 수술했는데 잘 회복되고 있대.”
경험이 부족한 지우는 걱정 없이 말했다. 그러나 경아는 심각성을 감지했다.
“간까지 전이됐으면 얼마 안 남았다.”
“회복되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겠지.”
“말은 그렇게 하겠지만, 그 정도면 심각한 거야.”
경아는 그가 처한 상황을 짐작했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의 아빠라는 것과 처절하게 죽으라고 저주한 것이 걸렸다. 경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메시지를 보냈다.
--- 본문 중에서
“눈물비 주르르 내리면 내게 우산 같은 한 사람. 세상 아픔들을 대신 맞아주고 나를 지켜주던 한 사람.”
‘사랑하는 내 경아!’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으로 경아를 불렀다.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서로에게 우산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살았던 것일까!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노래를 이어갔다. 음정은 애초에 불안했고, 가사도 분명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시간보다 울먹이는 시간이 더 많은 울부짖음에 불과했지만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