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발한 해국이 덮인 둔덕을 내려와 해변을 걷다 보면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가 그린 한 폭의 동양화를 보게 된다. '해변에 웬 동양화?'라고 하겠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면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그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의 돌들은 화산암으로 검가나 붉은데다 기공이 많아서 가볍다. 그 돌들이 조그맣게 부서져 빗물을 타고 바다로 떠내려 와 파도에 밀려 해변에 동양화를 그린다. 인간이 그린 의도된 그림이 아니라 자연이 그리고, 다시 지우고, 다시 그리는 그림인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만이 마음속에 잔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그림이다. --- p.38
주상절리는 서귀포 해안 일대에 많이 형성되어 있지만, 그중에서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 육각형의 거북등자락 같은 나지막한 절리는 파도와 숨바꼭질을 하고,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같은 절리는 천인단애의 수직 절벽을 만들고 있다. 절리의 정교함과 미려함은 화산작용이라는 과학적 설명보다는 오히려 신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저거 사람들이 만들어 바다에 넣어 논 거 아녀?"라고 말하는 어느 촌부의 말이 내 귀에 들여온다. 이곳 주상절리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리라. --- p.123
들녘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이 여기저기 솟아 있는 크고 작은 오름의 잠을 깨운다. 숲에서는 5월의 아침을 찬미하는 향기 가득한 감미로운 음악회가 열린다. 새벽을 알리는 닭의 노랫소리에 뻐꾸기, 꾀꼬리, 꿩, 산비둘기와 이름 모를 새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동참하면 개들이 화답하고, 이어 누렁소가 굵직한 베이스를 넣는다. 그리고 찔레꽃과 아카시아꽃, 구실잣밤꽃 등이 내는 향기 속에 연초록 새 옷을 입은 나무들이 객석에서 행복한 호흡을 한다.
오늘 나는 그 길을 걷는다. 이미 황금빛으로 갈아입은 보리는 농익은 냄새를 풍기고, 스프링클러에서 나오는 물은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대지를 적신다. --- p.182
필자는 남들이 좋다니까 나도 한 번 가보자는 생각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한 코스, 한 코스를 걷다 보니 경관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자연이 가르쳐 주는 우주의 질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는 누군가에 의해 일구어진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내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올레가 내게 준 크나 큰 선물이다. --- p.220
동산 아래로 펼쳐지는 평원의 억새는 이미 하얀 백발을 하고 있다. 아직 중산간 지역의 억새는 윤기 나는 댕기머리지만, 이곳은 이미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햇살에 하늘거리는 억세의 향연을 카메라에 담아보지만, 그 느낌까지 담을 수는 없다. 사제비동산을 곱게 물들인 단풍과 솜사탕 같은 억새꽃을 보면서 만세동산으로 가는 길의 양옆에는 꽝꽝나무들이 까맣게 익은 열매로 새들을 유혹한다. 사제비동산 전망대에서 애월 방향으로 보면 바로 코앞에 쳇망오름의 움푹 파인 분화구가 보이고 그 뒤로 붉은오름이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노로오름과 바리메오름, 노꼬메오름이 아스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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