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과학기술만으로는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긍정과 비판 사이에 중립적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로는 과학기술이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것도 될 수 있고, 나쁜 것도 될 수 있는 중립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_이한구 (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장)
---「서문」중에서
인류는 현 위기 앞에서,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위기에 앞서 공동의 책무의식을 가지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모든 나라가 개인, 민간, 공공 차원의 협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위기의 시작부터 함께 가져가야 한다. 혼자서, 지역적으로, 한 국가가 전지구적 위기의 규모나 복잡성에 대처할 순 없다. 팬데믹의 또 하나의 교훈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고 더 큰 타격을 받은 사람과 계층, 국가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계 과학에 의하면 ‘우리는 가장 약한 고리만큼 강한 것’이다.
---「과학기술과 인간의 미래」중에서
휴먼의 포스트휴먼화에 대한 사유는, 첨단기술과학에 의한 인간종의 변화나 인간 개체의 심-신 변형을 둘러싼 사이보그화 문제로부터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휴먼의 잠재력을 기술적 변환을 통해 향상시키고자 한 트랜스휴머니즘의 열망은,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킹으로 체현되고 분산된 네오사이버네틱스적 포스트휴먼의 조건을 기반으로, 더 높고 큰 차원에서 인간 이외의 타자들과도 공존-공생-공진화를 모색할 수 있도록, 휴먼의 문턱을 넘어서는 양자적 도약으로 증폭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 주체가 될 수 있는가?」중에서
문제는 모든 정신 과정이 궁극적으로 물리적 기초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윌슨은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통섭’은 결국은 인문학을-그리고 모든 학문을-자연과학으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예컨대, 별의 탄생에서 사회조직의 작동에 이르기까지-들이 비록 길게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연결」중에서
과학기술 문명은-그것이 정보통신 기술이든 첨단화된 IT 분야든 혹은 핵공학 분야든-그 자체로는 중립적이지만,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약도 될 수 있고 또 독도 될 수 있는 그리스어 파르마콘(Pharmakon)과도 같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어떻게 이 문명을 일구어 나가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는 것이다.
---「정보사회, 새로운 유토피아냐 혹은 암울한 디스토피아냐」중에서
기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다고 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전문가는 진공 속에서 일하지 않는다. 최첨단 연구 개발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구축된 사회 구조와 맥락 안에서 사회구성원들이 낸 세금과 투자금으로 수행된다.
나아가, 한 기술 분야의 전문가라 해서 큰 사회적 파장을 예고하는 변화에 대한 모든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질 수는 없다.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담론에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할 뿐 아니라 마땅하다.
---「제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거버넌스」중에서
AI를 (기능적으로) 진정한 윤리 행위자 혹은 도덕 행위자로 간주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답함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율성’이다. 가령 구글의 자율자동차에 대해서 ‘자율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개입이나 판단과는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지금 문제가 되는 AI는 2차 수준의 자유도를 갖는다. 2차 수준의 자유도는 주어진 입력에 대해 어떤 출력을 산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내적 상태로서의 알고리듬 자체가 스스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율적 도덕 행위자로서의 인공지능」중에서
하모니의 경우 얼굴 모양이나 머리 형태, 목소리 등 사용자의 취향대로 여러 특질을 맞출 수 있다. 예컨대, 하모니는 웃거나 윙크를 하거나 찡그릴 수 있으며 농담도 하고 사용자의 생일이나 취향을 기억하며 영화나 음악이나 책 등에 대한 대화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록시는 활발하고, 모험심이 강한 거친 웬디, 당신의 고통과 쾌락의 환상을 함께 나눌 준비가 된 에스앤앰, 이제 겨우 18세밖에 안 되고 당신이 가르쳐주기를 기다리는 어린 요코, 매우 경험이 많아서 당신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농염한 마사 등 다양한 인성을 부여받는다.
---「섹스로봇의 현황과 그 규제에 대한 세 가지 입장」중에서
하이데거도 테크놀로지 안에서 위기와 동시에 새로운 희망을 본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운명이 되어버린 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려는 의지는 그에게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는 제1 미디어인 텔레비전과 라디오 매체를 염두에 두고 테크놀로지를 바라보았다.
오늘날 소위 제2 미디어, 즉 뉴미디어인 초고속 정보망, 인터넷, 휴대전화, 전자미디어, 화상통신 등의 매체는 경험하지 못했다. 뉴미디어가 갖는 탈중심적 상호성과 쌍방향 소통에 대해서 그는 알지 못했다.
---「하이데거의 과학기술 문명 비판」중에서
통섭 프로그램의 원칙적 불가능성을 앞서 개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윌슨의 통섭에 포괄되는 지식의 근본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윌슨의 통섭에 포괄되는 지식은 모두 물리적 인과관계의 망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한 지식들이다. …따라서 어떤 지식이 자연적 인과관계 혹은 물리적 인과관계의 망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지식일 경우 그러한 지식은 윌슨이 제시하는 통섭에 포괄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이러한 유형의 지식이 존재한다면 통섭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기술 문명 시대 학문의 위기」중에서
첨단기술들이 우리의 삶을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풍요롭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있다. 인간이 단순한 물질적인 존재도 동물도 아니고 인간 특유의 욕망을 갖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기술 역시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삶을 기쁨과 의미로 충만한 삶으로 만들려는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을 보조하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제4차 산업혁명과 인간의 행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