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직업적인 친절 이상의 환대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청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베푸는 법을 깨달아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맛볼 수 있는 기쁨, 그리고 베푸는 사람이 맛볼 수 있는 평화. 평범하지만 역설적인 진리가 우리의 몸에 새겨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순대국밥과 막국수, 그 작은 행복」 중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구원자로 다가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그리고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을 내어 주는 것, 그걸로 충분하다.
---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 중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느님께, 그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갚을 수도 없는 빚, 평생을 갚아야 할 빚을 진 셈이지만 그래도 나는 죽을 만큼 행복했다. 길 위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길 위에서 만난 모든 것들이 내게 하느님을 보여 주었다. 아직 모든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길은 행복했다.’
--- 「광야에서의 마지막 밤」 중에서
언제나 그랬지만, 우리가 도움을 받는 것은 부자에게서가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분들에게서였다.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빵집 아저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식당의 아주머니, 성당에서 마주치는 형제자매님들. 이런 분들의 도움이 우리에게 훨씬 따뜻한 감동을 주었다. 부유한 이가 아니라 없는 이들이 더 쉽게 내어 줄 수 있다는 역설. 없는 이들이야말로 없는 이들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보리빵 다섯 개, 옥수수 다섯 개」 중에서
우리의 여행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것도 기꺼운 희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희생을 즐겨 하는 이에게 축복 있으라! 우리는, 희생을 종용함으로써 희생의 의미를 깨달아 가는 것인가. 희생을 종용함으로써 희생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인가. 어쨌거나 스무하루를 길 위에서 보낸 지금, 내게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
--- 「보리빵 다섯 개, 옥수수 다섯 개」 중에서
아마 이래서 '조국’이라는 것이 중요하구나 싶다. '지금 여기의 나’는 역사와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 안에는 분명히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역시 한반도 땅이다. 나는 수직적으로도, 수평적으로도 ' 한민족, 한국인, 한국’과 소통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런 삶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고유한 리얼리티가 우리 안에 자연스레 존재하게 된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유적이나 잉카 아즈텍 문명을 보면서, 우리가 '그들’만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한국인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무언가 충만한 느낌을 안고 박물관을 나왔다.
--- 「과거와 만나다」 중에서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빵’이었다. 비록 보잘것없었지만, 우리에게는 빵집에서 얻은 빵이 있었다. 그랬다. 우리가 가진 무엇, 지켜야 하는 무엇, 남에게 내어 줄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이, 애초부터 그분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볼 수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분들이 혹시나 달라고 할까 봐 마음 졸이며 빵을 먹었던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그분들과 단절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불한당이요, 나의 배낭을 노리는 절도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느낀 순간 나의 마음엔 하느님이 자리하지 않았다. 서글프게도 오직 나와 나의 짐만 있었다. 결국, 내가 가진 '아주 작은 것’이 '더 작은 것’을 가진 그분들과의 만남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 「역에서 노숙한다는 것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