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낭가를 두르고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는 장신長身의 전사들. 서구 식민지 시대, 하루에도 수천 명씩 실려나가던 흑인 노예선에서 단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던 불가사의한 부족. 거침없이 밀려드는 현대문명 속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과 생존방식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21세기 최후의 유목민들…….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의 마사이 족은 외부의 무수한 간섭이나 통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초원의 지배자들이다.
이 책 《마사이 전사 레마솔라이》(원제: Facing the Lion)는 바로 이 마사이 족의 아들로 자라난 한 소년이 미국 유학을 거쳐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기까지를 들려주는, 아주 특별한 성장기이다.
저자 조지프 레마솔라이 레쿠톤은 마사이 부족의 한 사람으로 그들의 고유한 생활방식에 따라 자라났다. 태어난 지 사흘 째 되던 날부터 유목민의 생활을 시작한 레마솔라이는 부족의 명망 있는 남자들처럼 ‘사자’와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감한 전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20세기 후반 조국 케냐가 시행한 ‘한 가족 한 아이 학교 보내기’ 운동의 도움으로 용케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지혜로운 어머니의 눈물겨운 뒷바라지에 힘입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있는 명문 카바라크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사실 유목민의 아이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외국 유학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가족들은 레마솔라이의 학비를 대기 위해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소를 여러 마리나 팔아야 했다. 케냐 명문가 출신 친구들과의 문화적 간극도 어린 레마솔라이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벽이었다.
때로는 한밤중 잠에서 깨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이러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매일 사소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내가 주류 계층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소한 표시들. 소 떼를 버려두고 그런 엘리트들이 다니는 학교에 와 있는 것이 분수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일들. 또 나는 사회적으로 그곳에 소속될 수 없다는 듯한 표시들. -본문 107쪽
그럴 때마다 레마솔라이는 어릴 적 마주쳤던 사자를 떠올렸다. 한밤중 야영장에 나타나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소를 먹어치웠던 녀석. 하지만 다음날 아침 사자와 마주섰을 때 레마솔라이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을 쳤었다. “겁쟁이 레마솔라이.” 주변에서 자꾸 놀렸지만, ‘겁쟁이’라는 말이 마사이 전사에게는 무엇보다 치욕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훗날 사자와 마주섰을 때 등을 보이지 않고 당당히 싸워 스스로 용기 있는 전사임을 증명하는 수밖에. 그날 이후 레마솔라이는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눈앞에 사자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이제 다시는 돌아서서 도망치지 않을 거야.”
놀기 좋아하는 개구쟁이였지만 영리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던 소년은 서서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익혀 나갔고 열심히 공부해서 가족과 부족을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0시가 넘어 잠자리에 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덕분에 레마솔라이는 올 A를 받는 우등생이 되었다. 더욱이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학교 축구 대표로 나가 무려 3골을 넣는 바람에 인기 스타로 발돋움하기까지 한다.
방학이 되면 집으로 가야 했다. 마사이 전사로 돌아가 소 떼를 몰고 초원을 누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 문제였다. 초원을 떠도는 가족들이 다행히 학교와 가까운 곳에 머물 때는 서너 시간 걷고 차를 얻어타면 되었으나 때로는 절망적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어머니와 형들 그리고 친구들과 소들을 생각하곤 했다. 집에 있을 때도 가축들을 돌보려면 굶주림과 더위를 견디고 비를 맞으며 밖에서 보냈는데, 뭘…….
끝도 없이 달리는 화물 트럭의 짐칸 꼭대기에서 나는 가끔 거지가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좋은 성적과 긍정적인 업적들을 생각했다. 축구를 잘 하는 것과 나의 장래, 교육을 받은 후 우리 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용기를 얻었다. 마을 어른들은 우리에게 역경을 겪어본 남자가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오랜 기간 공부를 한 후에 이제 와서 그만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당혹스러웠다. -본문 112~113쪽
고등학교를 졸업할 날이 가까워졌다. 레마솔라이에게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마음속으로 그려온 대학생활이 있었다.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 “넌 언젠가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게 될 거야.”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꿈을 심어준 사람은 어린 시절 스승인 선교사였다.
SAT를 보고, 토플 시험을 치르고, 미국의 여러 대학으로부터 초청장도 받았지만 꿈을 실현시키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그를 장학생으로 스카우트하지 않는 한 ‘케냐에 있는 소를 다 판다 해도’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나이로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은 뒤 마르사비트 근처 은행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날 한 무리의 백인들이 여행자 수표를 바꾸러 왔다. 세인트로렌스 대학교 장학 담당관과 그 일행이었다. 그의 추천으로 레마솔라이는 세인트로렌스 대학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지만 미국에 대한 정보라고는 ‘선교사’ 하나밖에 없던 그가 혈혈단신 뉴욕행 비행기를 타는 풍경은 가슴 저린 동정을 넘어 위대한 영혼의 발견으로 이어지게 한다.
세인트로렌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국제 교육정책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미국 버지니아 주 북부에 있는 랭글리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케냐 유목민들이 그들의 언어와 문화, 전통을 보존하는 일을 돕고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늘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에게 미국에서의 교사 생활은 여전히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방학이 되면 여전히 어머니와 형들이 있는 아프리카 사바나로 돌아간다. 붉은 색 낭가를 몸에 두르고 몽둥이를 든 채 소 떼를 모는 레마솔라이는 영락없는 ‘전사’다. 일년 중 반은 미국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나머지 반은 아프리카 초원의 마사이 족으로 살아가는 ‘두 세계 속의 전사’…….
쉽지 않은 길을 헤쳐가는 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담아낸 책 《마사이 전사 레마솔라이》는 초원 위를 내딛는 마사이 전사들의 발걸음만큼이나 경쾌하고 건강하게 읽힌다. 얇은 책자를 읽고 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처럼 소중한 독서 체험’을 하도록 해준 레마솔라이에게 존경과 고마움을 전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진정과 용기와 긍정성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그것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에너지를 전파하는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애초 이 책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출판사에서 아동용 도서로 출간했다. 레마솔라이가 살아온 과정을 보고 들은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책을 쓸 것을 강권했고 겸손한 그는 ‘세상의 아이들이 읽고 용기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대답했다. “목표를 정해서 최선을 다하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Facing the Lion(사자와 마주서서)》라는 제목의 책자가 지난해 가을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을 먼저 읽은 어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향이 일었고 출판사와 주요 서점들은 부랴부랴 성인용 논픽션으로 분류를 다시 했다.
절망과 불확실성의 시대, 《마사이 전사 레마솔라이》는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읽으며 진정한 성취와 행복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하는 소중한 촉매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