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시’를 읽어내는 ‘패러다임론’으로서의 ‘고고학’ |
“인간과학의 모든 연구는 고고학적 신중함을 지녀야만 할 것이다. 즉,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감추지 않고 끊임없이 그것을 다시 붙들어 발전시키는 사유만이 경우에 따라서 독창성을 주장할 수 있다.”
“여기에 모은 세 편의 연구에는 방법과 관련된 특정한 세 가지 물음에 대한 저자의 성찰이 담겨 있다. 패러다임 개념, 표시론, 역사와 고고학의 관계가 그것이다.” 얼핏 보면 이 말은 ‘패러다임,’ ‘표시,’ ‘고고학’이라는 개념이 서로 엄밀히 독립된 별개의 대상으로 다뤄지는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 책의 곳곳에서 패러다임, 표시, 고고학의 상호관계를 되풀이해 표현한다. 따라서 『사물의 표시』를 읽는 한 가지 방법 중의 하나는 이 ‘상호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먼저 고고학. 고고학은 본디 archaios와 logos의 합성어(‘옛 이야기’)이지만 아감벤은 그것을 아르케(arch?)에 대한 학(學/logos)으로 이해한다. 아르케란 무엇인가? 아감벤에게 아르케란 단순히 시간적으로 모든 것/사태의 앞에 존재하는 어떤 근본 원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통시태와 공시태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는 어떤 벽개면(균열, 틈)(46쪽)이다.
이렇듯 ‘옛,’ ‘오랜’이 ‘아르케’로 바뀜으로써 아감벤의 ‘철학적’ 고고학은 과거의 지정 가능한 어느 시점(時點/始點)에 대한 탐사이기를 그친다. 그보다는 통시태와 공시태의 교차점에 존재하는 예기치 않은 균열,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역사(혹은 세계)라는 문서고의 문서를 탐색하는 작업이다(162쪽). 이를 통해 다양한 역사 현상들의 변화와 일관성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적 고고학이다.
다음으로 패러다임. 흔히 패러다임은 “한 시대 특정 분야의 학자들이나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이나 법칙, 지식, 가치”(토머스 쿤)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감벤에게 패러다임이란 “동일한 부류의 다른 모든 것에 들어맞으며, 그것이 부분이자 구성 요소가 되는 전체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정의하는 독특한 대상”(25쪽)으로서, “귀납적 인식도 연역적 인식도 아닌 유비적 인식의 형태”(45쪽)이다.
아감벤은 판옵티콘으로 이를 설명한다. 원형감옥인 판옵티콘의 작동 방식은 근대 권력의 다른 장치들인 공장, 병원, 학교 등에도 적용 가능하다. 이 각각의 시설들은 개별 사례이지만 그것들 사이에는 유비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옵티콘은 근대 규율 권력의 본질 자체를 이해 가능하게 해준다. 요컨대 ‘패러다임’으로서의 판옵티콘이 개별 사례이면서 그것이 속한 전체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어주듯이, 철학적 고고학은 역사 속의 어떤 벽개면ㆍ균열ㆍ틈을 통해 역사 전체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마지막으로 표시론. 아감벤에게 패러다임론으로서의 철학적 고고학은 표시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아감벤에게 ‘표시’란 징표나 기호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표시란 징표나 기호에 달라붙어 그것을 유효하게 만들고 작용할 수 있게 만드는 무엇, 즉 징표나 기호를 권력 관계 속에 놓이게 만드는 무엇이다. 예컨대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이 수감복에 단 표지는 그들을 상대하는 이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규정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표시란 징표나 기호에 속할 때 전제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 그렇기 때문에 징표나 기호를 둘러싼 권력 관계를 드러내 보여주는 무엇이다. 이런 표시의 인식론적 기능은 철학적 고고학에서의 아르케나 패러다임의 인식론적 기능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렇게 보면 아감벤의 여러 개념들(특히 ‘호모 사케르’나 ‘예외상태’)은 일종의 아르케, 패러다임, 표시이다. 이렇게 볼 때에야 우리는 아감벤의 작업이 단순한 역사서술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현재’를 만든 역사의 단절지점ㆍ시퀀스를 분석해 새로운 미래를 사유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