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는 홍콩 영화계가 낳은 스타이자 전 세계가 인정하는 거장입니다. 제작비를 낭비한다거나 제작 기 간을 지연시킨다는 평판들이 그를 괴롭히지는 못합니다. 그는 분명 영화계를 제압할 수 있는 현 시대의 유일한 홍콩 영화감독일 것입니다. [화양연화]를 제작할 때도 그랬듯이, 아마도 그는 한 프로젝트에 2년 이상을 투자하면서 스스로 마감일을 늦출 수 있는 유일한 영화감독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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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옥의 꽉 끼는 청삼은 상하이 여성들의 패션과 멋진 조화를 이룹니다. 왕가위는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입으셨기에 장만옥이 입는 청삼에 대해 특별히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감독으로 데 뷔하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가 영화를 만드는 데 꽤 유용한 역할을 해왔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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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와 소화의 아파트에 잠깐 머무르기 위해 란타우섬에서 온 아화(장만옥) 간의 줄거리는 짐 자무쉬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1984)의 줄거리를 전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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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장학우의 가장 흥미로운 연기인 이 둘의 뜨거운 교류는 홍콩 영화 속 건달 신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합니다. 영웅이 되고자 하는 창파의 열망은 오우삼의 [영웅본색](1986)으로부터 시작된 ‘히어로 무비’의 트렌드로부터 영향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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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열혈남아]에서 그녀의 체념 어린 분위기는 영화 전체에 키를 제공하는 불운한 사랑에 대한 배신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연인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운명을 깨닫습니다. 혹은, 최소한 한쪽 은 다른 한쪽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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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홍콩 주류 영화의 영화감독 중 왕가위처럼 드라마틱하게 그의 두 번째 돌파구 [아비정전]을 찍은 감독은 없었습니다. 왕가위는 [열혈남아] 속 주인공들의 ‘내면의 뒤엉킨 실’을 장국영, 장학우, 장만옥, 유덕화 그리고 유가령으로 확장시켜낸 것입니다.
---p.62 [열혈남아]
오히려 이 시기 갱스터 영화의 변형은 그 당시 매우 인기가 있었던 ‘아비’ 영화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이는 니콜라스 레이의 [이유 없는 반항]에서의 제임스 딘의 성공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p.71 [아비정전]
1970년 초에 광둥 지역 영화가 사라지면서, 아비라는 장르와 용어도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80년대와 90년대에 [열혈남아]가 ‘이단아 영화’의 형태로 다시 떠오르며 환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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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가 있다.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잠이 든다. 평생에 딱 한 번 땅에 착륙하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다.' 새와 비행이라는 은유는 ‘아비’라는 장르가 그의 이야기에 내포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을 연상시키는 발 없는 새의 우화는 아비의 묘비명과 맞아떨어집니다. 나레이션 직후 장국영이 ‘마리나 엘리나’의 노래에 맞추어 추는 차차차는 당대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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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은 주로 밤인데, 풍경은 텅 빈 계단과 출입구, 길쭉한 가로등 그림자가 비치는 골목입니다. 방황하는 수리진과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는 경찰은 안토니오니 영화 같은 외로운 풍경을 거닐고, 차들의 불빛이 그들의 얼굴을 스쳐 지나갑니다. 늦은 밤 등대처럼 홀로 빛나는 빈 공중전화 부스에서는 유덕화 가 수리진의 전화를 기다립니다. 시간은 오지 않을 연인을 기다리며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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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장국영은 유덕화에게 말합니다. ‘인생은 길지 않아’ 1분조차도 평생 기억될 수 있습니다. 시계 초침 소리는 때때로 사운드트랙처럼 들리며 유한한 존재의 우울함을 매 순간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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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는 장국영의 얼굴을 여러 측면에서 클로즈업과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담아낼 뿐만 아니라 몇몇 장 면에서는 장국영이 그의 포마드 머리를 빗으며 거울 속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는 푸익이 첫 번째 소설인 [리타 헤이워드의 배신(Betrayed by Rita Hayworth)]에서 묘사한 한 남자를 떠 올리게 하는데, [아비정전]은 아비의 나르시시즘이 장국영의 아름다운 얼굴을 통해 온전히 드러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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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는 유덕화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을 지우고, 감정을 터트리는 대신 내면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하는 브레송의 연기 방식을 지도하였습니다. 그것은 영화의 톤을 특징짓는 은밀하면서도 내적인 연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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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없이 촬영하는 왕가위의 스타일로 인해 도일은 여러앵글에서 모든 장면을 촬영하였고 이로 인해 담가명은 몇 마일이나 되는 스틸 사진들을 분류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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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정전]에서 양조위의 발견은 재기 넘치고 신비스런 빛을 품은 등대 같습니다. 양조위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3분간, 그는 연기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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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가 진행한 또 다른 프로젝트도 [동사서독]의 마무리를 지연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중경삼림]입니다. [중경삼림]은 그가 [동사서독]을 편집하며 쉬는 두 달 내에 촬영했다는 전설적인 일화로 회자됩니다. 그는 [중경삼림]을 이제 막 영화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간단한 장비들과 자연광을 이용해서 찍는 저예산 다큐멘터리 환경에 의존해서 만든 영화에 비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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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은 전 세계에 배급된 왕가위의 첫 작품으로 특히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매료시켰는데, 그의 영화사 ‘Rolling Thunder’는 이 배급권을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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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의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 중에 왕가위는 [중경삼림]을 제작하여 개봉하는 신기록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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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은 다름 아닌 무협이라는 장르와 김용, 호금전, 존 포드 감독 등 옛 거장들에게 바치는 헌사 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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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중경삼림] 속 양조위의 아파트처럼 왕가위의 홍콩은 타락천사가 발을 딛고 신이 저주를 내린 땅입니다. 홍콩의 구석구석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여기서 비가 시각적인 모티프로 작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타락천사]는 왕가위가 홍콩에게 바치는 가장 뜨거운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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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의 배경은 홍콩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아르헨티나이기 때문에 이는 오히려 먼 곳으로 추방된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왕가위가 홍콩이 아닌 곳에서 촬영한 첫 번째 영화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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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가 정치적인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아마도 [해피투게더]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가장 정치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1997년이라는 세기말의 상황 속에 있으며 이것이 두 홍콩인에게 끼치는 정신적 쇠약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 [해피투게더]는 다가오는 세기말의 시간에 저항하는 영화로 주인공들이 방랑하는 동안 시간은 리셋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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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인물들은 시간의 끝자락에 갇혀 미래가 없는 것처럼 결코 즐겁지 않아 보입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본 이 영화의 힘은 1997년 홍콩 반환에 대한 불안을 기록한 작품이라는 데서 기인합니다. 또한 운명의 장난처럼 장국영이라는 배우를 추억하는 영화로 남았습니다. 영화의 말미에 그는 높은 곳에서 투신하는 것처럼 절망감에 빠져 인도에 주저앉습니다. 장국영의 현실 속 절망을 가장 잘 포착한 감독은 결국 왕가위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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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는 이 영화의 결말을 정해두고 촬영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여요회가 아르헨티나에 남아 있는 것으로마무리를 하려고 했지만 뒤이어 홍콩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촬 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왕가위 본인을 포함해 영화 현장에서 제작진들의 향수병이 커지자 영화의 결 말을 조율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어떠한 스토리 전개의 논리적 단서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개인적 감정들을 바탕으로 영화 결말을 찾아냈습니다. 그 결과로 장국영은 부에 노스아이레스의 더러운 구석에 남아 절망에 빠졌고 장첸은 세상 끝까지 여행했으며 양조위는 홍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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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종정일이 부르는 [Happy Together]를 배경으로 타이페이를 경유한 열차 안에 양조위가 앉아 있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리고는 열차가 고가도로 위를 달려 역에 정차하는장면이 나옵니다. 시간은 마치 움직이는 열차로 변한 듯 여요회를 따라붙어 홍콩까지 도달합니다. 왕가위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로디그리]에서 [해피투게더]는 종착점이며 삶에서 어떤 특정한 시기의 종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만 해도 그의 말은 오늘처럼 가슴 저미게 들리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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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게더] 이후 왕가위는 과거(화양연화)를 거슬러 미래(2046)로 나아갑니다. 시간은 마치 1997년 7월 1일 이후 멈춘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과수 폭포의 이미지는 관객의 가슴속에 남아 끊임없이 출렁 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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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46]에서 [화양연화]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이고, [화양연화]를 볼 때 그 속에 [2046]의 흔적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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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연인은 각자의 바람 피우는 그들 배우자를 흉내내지만 실제로 연인이 되려는 시의적절한 찰나에 뒤로 물러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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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는 구도와 미장센을 통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화양연화]에서 우리는 인물의 뒷모습을 자주 보게되는데, 주모운의 부인과 수리진의 남편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끔 카메라 앞을 스쳐 지나가거나 소리만 낼 뿐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을 보는 방식은 마치 창밖에서 커튼을 통해 집 안을 들여다보거나 방관자가 되어 사적인 대화를 몰래 훔쳐 듣는 것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모퉁이에서 사라지거나 황급히 복도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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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곧 왕가위 미스터리의 미학적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물을 그림 액자 가장자리에 두는 촬영 구도와 과감한 점프 컷을 이어 붙이는 편집 스타일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와 에두아르 뷔야 르(Edouard Vuillard)의 그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왕가위 영화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종종 인물의 단면 만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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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곡이 흘러나오고 우리는 두 사람이 2046호 방 안에 있는 장면을 봅니다. 어쩌면 이때가 그들이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왔다갔다 하며 방정식 등호 뒤에서 끊임없이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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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6]의 제작이 지연되며 영화를 2004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공개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늦춤으로써 왕가위는 확실히 자신의 방식으로 제작을 밀어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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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6]을 지배하는 시간이 1997년부터 50년 후로 정의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확고히 1960년대에 근 간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는 미래부터 과거까지 시간을 탐험하며 1960년대의 어느 적절한 지 점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의 오디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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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시간만큼 감정은 더 깊어지고, 이는 왕페이의 눈물로 전달됩니다. 사실 영화에서 모든 주연 여성 들-장쯔이, 유가령,공리-은 지연된 감정의 모티프를 강화하기 위해 중요한 순간에 아름다운 눈물을 흘 리는데 이것이 감독의 연출에서 가장 황홀한 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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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이 조각난 시간이 과거 저편으로 흘러갑니다. 주모운은 독백처럼 말합니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너무 일러도 너무 늦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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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스코프의 화면비율은 왕가위의 새로운 시각적 특징을 자아냅니다. 가장자리에 인물을 배치한 프레임 속 남은 공간들을 넓은 그림자로 채웁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왕가위는 옛 거장들의 현대미술을 구현 하면서도 단조로움을 피했습니다. 그러므로 왕가위가 오페라 아리아를 반복적인 테마곡으로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어울리는 효과를 낳습니다.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각 등장인물들은 램브란트의 초상이나 블레이크의 ‘밤의 숲속에서 활활 타는 호랑이’처럼 빛이 납니다. 등장인물들은 중앙으로부터 벗어나 명암으로 둘러싸여 어둠 속의 보석처럼 빛이 납니다. 왕가위의 촬영 감독들은 명암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거장 카라바지오 못지 않게 능숙했습니다. 인물의 심리와 그들 간의 관계가 드러나는 미스터 리하고 창의적인 세계를 위해 빛을 능숙하게 다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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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역시 시간을 압축해놓았는데 시간은 바로 왕가위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모티프(그의 영화 속 수 많은 시계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이기도 합니다. 다만 단편의 형식으로 인해 이것을 알아채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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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을 인물의 본능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더 핸드]는 왕가위의 영화 세계를 무르익게 한 작은 진일보로 상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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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미국판 [중경삼림]과 같다는 느낌은 ‘디아스포라’의 은유에서 비롯됩니다. 낯선 환경 속의 이방인이 된 인물은 [중경삼림]을 비롯한 왕가위의 이전 작품에서 나타난 어떤 ‘곤경’ 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곤경’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며 한층 더 절박해 보입니다. 이러한 곤경을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수린은 아르니에게, 레슬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빚을 갚습 니다. 이러한 빚을 다 갚아야지만 그들은 미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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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은 궁얼(장쯔이) 과 순수한 사랑을 하는데 영화는 ‘실현할 수 없는 애욕’이라는 주제를 무림의 컨텍스트 속에 반복적으로 녹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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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의 ‘쿵푸 허무주의’는 세계로 전해지지 않으면 쿵푸는 소멸될 것이라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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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의 빛나는 시각적 표현과 스타일리시한 액션 장면들은 ‘어떤 광기 속에서도 숭고함이 있고 어떤 극단 속에서도 힘이 있다’고 성찰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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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를 마스터한 그의 허무를 유일하게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영춘권을 현대 무술로 새롭게 보급하려는 욕구였습니다. 중국 쿵푸를 세계에 전하려는 대세를 따르며 그는 구시대와 새 시대의 무술의 계보를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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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장에서의 수확이 있었으므로 왕가위는 그 박수갈채 속에서 세계 유명 감독으로서의 명성을 분명히 굳힐 수 있었습니다. 앞선 작품들인 [해피투게더]와 [화양연화]는 칸 국제영화제에서 거둔 성공으로 왕가위를 세계 영화 무대에서 가장 존경 받는 홍콩 감독으로 자리매김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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