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를 시작으로 철학/과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잘못 인식되고 알려진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싶은 작은 소망이 생겨 팩션 형식의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는 백제 멸망과 일본 건국의 비밀을 밝힌 《태양의 제국》이 있다. 이번 소설을 통해 ‘묘청의 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길 바라고 있다. 과거와 미래가 시공으로 얽혀 있음을 확신하며 어느 곳, 어느 시간이든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과 ‘우리’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하길 희망한다.
왕업이 다시 빛을 볼 수 있을까? 이제 잿더미에 잠긴 개경을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까? 서경으로 가야 할까? 남경일까? 동경일까? 서경이 아니라도 좋다. 그 어디라도 좋다. 이자겸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척준경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래도 어둠의 잿빛을 뚫고 희망이 자라고 있었다. 새싹이 파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인종이 허리를 굽혀 검은 재로 뒤덮인 땅을 비집고 올라온 새싹을 바라봤다. ---p.88, 「반전」 중에서
만남은 짧았으나 의미는 깊고 깊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앞날을 걱정만 하고 있던 묘청과 정지상, 윤언이가 만나서 뜻을 합쳤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누군가에 의해 사라진 서책들이 세 사람을 서경으로 불러 모았다. 최악이라 생각했던 상황에서 세 사람은 뜻을 하나로 모았다. 묘청은 서경에 남았다. 분노한 서경인들의 뜻을 모으기 위해서였고 정지상은 인종이 있는 개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p.149, 「낭도들의 결집」 중에서
한참 동안 정지상을 바라보던 김부식은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조용했지만 싸늘한 목소리가 김부식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옛 영광이 있었다고 오늘날 다시 그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송을 중심으로 오랑캐인 여진의 금을 타도하여 질서를 확립한 뒤 예와 법이 살아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저도 남들 못지않게 공맹의 예와 법을 공부했다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공맹의 예가 유일한 예이고 법이라고는 생각하질 않습니다. 백성이 평안한 길이 있으면 그걸 따르면 될 일이지 어찌 공맹의 예와 법만 언급하십니까? 어사대부와 제 사이엔 현실인식에 대한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정지상의 반론을 들은 김부식의 얼굴이 파랗게 변해갔다. ---p.270, 「적지에서 시를 읊다」 중에서
김부식 일파의 공격 속에서 인종은 말없이 눈을 감고 앉아만 있었다. 돌연한 군사들의 등장으로 수세로 몰린 묘청파와 함께한 인종 자신이었다. 어가를 돌려 개경으로 가자고 한 것은 수세를 피하고자 함이었지 뜻까지 굽히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묘청 일파를 벌하라 하는 것은 자신을 벌하라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병장기를 거두라!” 한마디를 뱉어놓은 채 한참을 침묵하던 인종이 울부짖듯 외쳤다. “더 이상 피를 원치 않는다. 짐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짐과 고려의 적으로 간주하겠다. 창칼을 거두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p.369, 「천도의 좌절」 중에서
김부식은 2년을 기다려 서경성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들이 끝나가고 있었다. 병장기를 든 어느 누구라도 목숨을 보전치 못할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의 이유는 서경성이 아니었다. 김부식이 바란 것은 그들의 멸절이었다. 김부식은 2년 동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서경성으로 들어가는지, 그들이 왜 서경성으로 들어갔는지를. 그들이 무엇을 지니고 서경성으로 들어갔는지, 그들이 무엇을 지키려고 저항하는지. 김부식은 병사들을 보내 서경성의 모든 성문을 걸어 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