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게는 무엇이 있을까. 단칸방에서 맞이하는 나 혼자만의 밤, 절대 선을 넘지 말자고 정해 둔 350cc 캔맥주 두 개, 5월 중순의 메마른 바람, 닷새 동안 신세 진 부모님, 운동장과 실습실과 열다섯 명의 건축과 학생, 네 명의 교관, 해협과 산. 그리고 잃어버린 것은……. 그러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 p.14~15
봄이 가면 여름이다. 이곳은 여름이 짧다. 짧아도 너무 짧다. 이곳 사람들은 서둘러 바다로 나간다. 한 달도 안 되어 가을 기운이 일어나고 그러다 금방 겨울이 온다. 사람들은 지겹다는 표정으로 겨울용 타이어를 갈아 끼운다. 딸은 아내의 친정에서 첫돌을 맞이할 것이다. 1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 p.49
“아기 사진 없어?”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토시의 눈에서 당혹감이 비쳐났다. 그 눈동자에 내가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그냥 그녀를 안고 싶어졌다.--- p.67
다 지난 일이야. 생각을 하지 마.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면 되는 거야. --- p.83
이어서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뒤에서 아오야마 교관이 짧게 잡아, 하고 외친다. 나는 아무튼 여기까지 와 버렸는데, 하고 타순이 돌아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무슨 일만 있으면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 p.97
나는 볼 수 있었다. 외야 저편에 빛 속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펜스를. 그것은 몇 달 몇 년이 지나지 않으면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만큼 멀고 높고 새롭게 솟아오르는 펜스였다. 어떻게 하면 거기에 이를지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큼 먼 환상의 펜스였다. --- p.98
한창 뜨거울 때는 비둘기도 쉬는 법을 안다. 그 시각이 되면 이 건물에 사는 수많은 비둘기가 모두 움직임을 멈춰 버린다. --- p.102
가만히 방아쇠를 당긴다. 빵. 낮은 소리가 터진다. 총알은 침대에서 곧바로 날아가 햇살 속 허공을 가르며 비둘기를 꿰뚫는다. 수많은 새털이 빛 속에서 튀어 올랐다가 살랑살랑 허공을 난다. 가슴을 관통당한 비둘기가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새빨간 피가 터져 나온다. --- p.102~103
바다에 가고 싶어. 준이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올해는 이렇게 여름을 보내야 하는가 생각하니 넌덜머리가 났다. 보통 여름엔 틈만 나면 수영장에서 헤엄을 쳤다. 풀 사이드에서 여자애한테 말을 걸고 같이 수영도 하면서 즐겁게 노는 계절이었다. 여름이라면 마음껏 땀을 흘리는 계절 아닌가. --- p.116
아침나절에 휴버트 셀비 주니어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30페이지 정도 읽고 방을 나섰다. 갑자기 아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헤엄치고 싶었다. --- p.146
물속으로 뛰어들자 살짝 물보라가 일었다. 아키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갔다. 이혼한 뒤로는 누구에게도 구속되고 싶지 않아. 그 누구라 해도. 그런 일은 이제 지겨워. 그런 말을 했다.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자유의 정체가 진정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수영하는 아키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문득 앞으로도 분방하게 움직이는 아키의 그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다. 마음이 초조하게 흔들렸다. --- p.156
“좋은 밤이야.”
아키는 숨을 헐떡거리는 나를 보고 말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다시금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침까지 같이 있고 싶어.” --- p.180
“취하는 것도 지겨워. 우리는 수영을 안 하면 취하는 것뿐이야.”
헤엄치고 취하고, 헤엄치고 취하고. 아키는 그 말을 노래하듯 반복했다. 헤엄치고 취하고, 헤엄치고 취하고. --- p.182
갑자기 뭔지 모를 불안감이 일어났다. 아키가 나한테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 그녀가 깨어 있을 때와 깊이 잠들었을 때 나는 그녀 안에서 욕망을 충족할 수 있었다. 그 상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p198
몸속에 여름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여름이 잔잔한 파도처럼 몸 안으로 퍼져 나가는 가장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 p.204
나는 우리에게 황금옷 같은 건 없어, 있다 한들 우리가 함께 황금옷을 입을 수는 없어, 하고 생각했다. --- p.206
“더 깊은 바다로 갈까?”
미치오가 제안했다.
“가자.”
즐겁게 헤엄쳤다. 아키를 생각했다. 그녀도 이렇게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