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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고 고요한

바람 불고 고요한

문학동네시인선-179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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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9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64g | 130*224*20mm
ISBN13 9788954680172
ISBN10 895468017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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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지대가 제법 높아
바람 거세고 비가 잦은 편이다
밤이면 인기척이 없어도
현관의 센서 등이 갑자기 켜질 때가 있는데
센서를 가동하여 등을 켜는 놈들은
대개가 무당벌레들이다
거기가 사랑을 나누는 최적의 장소인 듯
불이 들어올 때의 이 녀석들은
암수 한 쌍이 바짝 들붙어 있다
잊혀진 기억들 문득 되살아나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때도
저렇듯 작은 기미들이
영혼과 신체의 재봉선,
그 어스름 내린 불수의근에 가만가만
황홀한 센서 등을 켜는 것은 아니겠는지!
---「저렇듯 작은 기미들이」중에서

해질녘, 저 박명의 시간
여름꽃 향기 더없이 짙어지는 블루 아워에
물골안 파위교로 날아드는 뭇 새들은
봄꽃 나무 텅 빈 가지 흔든다
매화말발도리, 매화말발도리……
납작한 부리 뱃바닥 붉은 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방꽃차례로 운다
저녁해의 불꽃 이내 흩어지고
서둘러 잎 내고 꽃 피우던 여름꽃 진다
체로금풍의 시절이 머지않았으니
여름의 핏자국들 이내 희미해지리
우리도 끝내 자욱이 돌아서리라
대오를 벗어난 새 한 마리 안 보이는
적막한 하늘 아래
어느 꽃의 붉은 꽃잎 푸른 꽃받침이
저다지 낮게 고요히 덜컹거리는지
슬픔이 서로 다른 빛깔로 마중 와 있는 파위교
---「파위교」중에서

잎 진 목련나무
텅 빈 가지 속으로부터 시작되는 포무(苞茂)의 세계

밤의 베갯잇 속에는
손바닥만한 초소형 제설차 한 대
지금은 검은빛 흰빛으로 흩어진 나의 어머니

연푸른 종소리 울리는 산들바람 소리도 가득 들앉았으리
---「포무의 세계」중에서

흘러가면서 완성되는 당신이면서 고양이
처음부터 잿빛
털복숭이 고양이였던 나는
사이의 그물코를
끝없이 벗어나면서
사랑의 본질을 뜨개질하는 중인지도 몰라

물 머금었을 때의 은목서, 금목서
진저리치는 초록 잎사귀들의 세계

흩어질 때일수록 강고해지는
반짝이는 그물코를
---「혹은 당신 혹은 고양이」중에서

물 없이 삼킨다
이 땅엔 처방전이 없는 삶이라는 극약
내 마음 단 한 번도
안으로부터 열린 적 없는 창문과도 같아
어둠이 상처가 분노가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아니라고
스스로를 도리질하는 순간이 있다
오줌 누려고 일어났으리라
갓 돌 지나 입양한
아스퍼거 앓는
스무 살 어린 아들의 나뭇잎 같은 손이
숯덩이 같은 나의 잠 위로
가만가만 이불을 덮어주고 있으니
너에게로부터 내 안으로
끝없이 흘러내리는 물방울… 저 물의 방울들
오늘만은 눈부시리, 눈꺼풀 속까지
아마포처럼 감겨오는 저 새벽빛!
---「삶이라는 극약」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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