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 있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뇌전증에 걸렸는데, 그 병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페트라솁스키 협회의 동료들을 말 그대로 정신 나가게 했던 가짜 처형식과 무덤으로부터의 갑작스런 귀환이 몰고 온 심리적 충격이 그 고통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병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었는데, 영적인 깨달음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발작이 일어나기 전, 도스토옙스키는 동료들이나 주변 환경과 완전히 융합된 느낌, 열정적인 연민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는 황홀한 아우라를 경험하곤 했다. 그 융합된 느낌은 그의 소설에서 초월성을 보여주는 보편적인 조화에 대한 비전으로 작용했다. 작가의 가장 깊은 영적 신념은 그의 소설 〈백치〉에 나오는 미슈킨 왕자를 포함하여 뇌전증에 걸린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통해 구현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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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는 딴 돈을 호주머니 깊숙이 넣고 방으로 달려가 큰 여행 가방에 넣었다. 그는 룰렛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고 다음 날 비스바덴을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단호하게 이 약속을 지키려 했지만 날이 저물자 기다림을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돈의 일부를 꺼내서 다시 한번 룰렛판을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서둘러 카지노로 돌아갔다. 예전처럼 이번에도 실수가 나왔고, 그는 돈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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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의 행복에 젖어서, 그들은 〈죄와 벌〉에 대해 거의 잊어버렸다. 도스토옙스키는 1865년 여름부터 1866년까지 1년 넘게 이 소설을 써서 〈러시아 메신저〉에 연재 중이었다. 그는 카트코프에게 11월 말까지 남은 두 편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잡지 발간이 지연되면서 몇 주 동안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11월 말,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방문객을 받지 말고 매일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연속으로 소설 작업을 한 다음, 저녁에 그녀의 집으로 와서 원고를 구술하게 했다. 그는 안나의 계획에 정확히 따랐다. 매일 저녁 안나와 한 시간 정도 수다를 떨고 나서, 안나가 앉아서 받아쓰기하는 동안 그는 방안을 서성거렸다. 〈도박꾼〉을 작업하던 시절처럼 느껴졌다. 아니, 더 좋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때 소설가는 글을 쓰는 동안 지금처럼 쾌활함을 유지한 적이 거의 없었고 글의 진행이 그렇게 순조롭게 되는 경우도 드물었다. 약 4주 후, 〈죄와 벌〉의 마지막 편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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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간단한 식사를 하거나 우체국에서 안나가 보낸 편지를 확인하는 시간만 빼고, 매일 하루 열 시간씩 도박을 했다. 저녁이 되면 그는 화려한 루이엔 거리를 따라 빅토리아 호텔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도 도시의 경계선 바로 너머에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카지노를 제외한 다른 장소를 감상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이틀은 사흘이 되었고, 나흘, 닷새, 엿새가 되었다. 안나에게 보내는 편지 속 그는 외로움과 자기 혐오로 가득 차서 제 정신이 아니었다.
--- p.198
전당포에 가는 일이 일상사가 되어 갔다. 도스토옙스키 부부에게는 값나가는 물건도 없었고 가지고 있는 옷도 별로 없었다. 속옷 몇 벌은 남겨두기로 했다. 바덴바덴에 머무는 동안 속옷만은 저당 잡히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의 결혼 반지도 저당 잡혔는데, 몇 시간 만에 그 돈을 도박으로 날렸다. 그날 늦게 반지를 되찾았지만 안나는 반지를 다시 잃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그런 일이 빈번해지자 도스토옙스키를 전당포에 혼자 보내는 게 불안해졌다. 말려줄 이가 없는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잘못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리한 거래를 할 수도 있고, 필요 이상 많이 저당 잡힐 수도 있으며,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쿠르하우스로 가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그녀는 전당포에서 돈을 받으면 곧장 집으로 오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면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그에게 경고했다.
--- p.223
“당신만이 나의 구세주입니다.”
그는 그 정신없이 쓴 편지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하고, 그의 명성을 살렸으며, 그가 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그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그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그와 바닥 사이에 자신의 몸을 끼워 넣어 돌보면서 그의 목숨을 구했다. 그가 인정했듯이 “당신은 지난 4년 동안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저당 잡혔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나를 따라 헤매었소.” 그녀는 사랑하는 아이를 잃고 도중에 자신의 건강을 위태롭게 하면서도 그와 함께 했다. 인정받으려는 광적인 몸부림을 그만 멈추라고 도스토옙스키에게 말한 사람도, 룰렛 테이블을 떠나라고 한 사람도 안나였다. 룰렛은 안나의 사랑이 갑자기 마르는 그날에 대비해 그가 매달렸던 심리적 안전 장치로 그의 마지막 연인에 다름 없었다. 그런 지속적인 사랑은 그의 인생에서 완전히 새로웠고, 이로 인해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위험도 감수할 만큼 대담해졌다.
“아니, 이제 난 당신 거요. 당신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온전히 당신 거요.”
그는 비스바덴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녀에게 썼다. 그는 그녀의 사람이 되었다.
--- p.329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사업가는 아니었지만 아내의 실질적인 재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1875년 여름, “모든 일에서 당신의 도움에 의지하오”라고 안나에게 썼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의 저작권 관련 사항을 안나가 처리하도록 허락하는 문서뿐만 아니라 안나에게 은행에서 우편환을 받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문서에도 서명했다. 1914년까지 러시아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확실한 허락 없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351
그를 지옥까지 따라가 데리고 나온 사람이 안나였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그의 명성과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결정을 내렸다. 그의 창조적인 궤적과 인생 여정의 필수적인 부분인 안나에 대한 생각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예술적 영감에 너무 깊게 스며들어 있어, 어디서 그녀가 끝나고 어디서 그가 시작하는지 작가 자신도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의 역할은 도스토옙스키의 창작을 가능하게 한 것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안나는 그의 창작물 뒤에 있는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기억될 그의 푸시킨 연설에서 그가 찬양하고 그의 세계관의 중심이 된 러시아인의 용기, 도덕적 청렴과 실천적인 사랑의 원칙을 구현하는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 p.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