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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 ERNAUX,アニ- エルノ-,아니 뒤셴느Annie Duches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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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암묵적으로 사진 찍기를 계속했다. 섹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물질적인 표상을 보존해야만 했다. 어떤 것들은 관계 직후에 찍었고, 또 어떤 것들은 다음 날 아침에 찍기도 했다. 그 마지막 순간은 가장 감격스러웠다. 우리의 몸에서 벗겨져 나간 것들은 그들이 쓰러진 장소에서 추락한 자세 그대로 밤을 보냈다. 그것은 이미 멀어진 축제의 허물이었고, 낮에 그것들을 다시 본다는 것은 시간을 체감하는 일이었다.
--- p.7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사랑 후에 어질러진 풍경의 상(像)을 항상 보존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왜 조금 더 일찍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왜 어떤 남자에게도 그것을 제안해 본 적이 없었을까. 어쩌면 거기에 막연한 수치심 혹은 합당치 못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겼던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M의 성기를 찍는 것이 내게는 덜 음란한 ―혹은 지금으로서는 더 수긍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나는 그 일을 오직 그 남자와 내 인생의 그 시기에만 할 수 있었으리라. --- p.23 나는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그것은 하나가 되었다가 또다시 분리되는 행위다. 가끔 두렵기도 하다. 글이라는 자신의 공간을 내놓는 일은 자신의 성기를 내놓는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 p.45 나는 삶이 글의 ‘소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위한 ‘미지의 기획’을 원한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라는 이 생각은 형식조차도 실제 내 삶에 의해 부여된 텍스트를 의미한다. --- p.57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들은 매번 다른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남자 없이 지내기 힘든 것은 단지 성적인 필요성보다는 지식을 향한 욕망에 있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인가. 그것은 말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어떤 깨달음을 위해 M을 만난 것인지 알지 못한다. --- p.65 프랑스 여성들의 11%가 유방암에 걸렸고, 유방암을 앓고 있다. 삼백만 여성이 넘는다. 꿰매고, 스캔하고, 붉은색, 파란색 그림으로 표시하고, 방사선을 쬐고, 재건한 삼백만의 가슴이 셔츠와 티셔츠 안에 감춰져 있다.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언젠가는 과감히 보여 줘야 할 것이다. (내가 내 가슴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이 드러냄의 의지에 동참하는 것이다.) --- p.85 이 바지에는 육체가 없다. 방이나 의자, 벽, 주방, 빈껍데기와 비슷하다.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것은 그저 흔적에 불과하다. 그때 우리는 바로, 거기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들을 보게 된다. 이전에 일어났던 일과 도중의 일, 그리고 그 직후를. --- p.96 죽음의 가능성에 모든 것이 달린 순간을 우리는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퀴리 연구소 병원에서 보낸 행복한 나날들을 기록한 이 사진들이 내게 말해 주는 것이다. --- p.116 10월 7일, 그는 확고하게 말했다. “나는 단연코 당신만큼 페미니스트인 여자를 본 적이 없어.” 나는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순간, 우리가 서로 낯선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상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남성들을 대하는지 알지 못한다. --- p.121 나는 그저 단순히 사진에서 그리고 현재의 구체적인 흔적에서 내가 이중으로 매료되었던 것들을 탐색하여 하나의 텍스트 안에 모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 p.153 |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국 사라져버릴 이 배열을.” ‘글쓰기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이고 미래다.’ 아니 에르노의 말을 곱씹으며 그들의 지나간 사랑의 흔적들을 본다. 쓰러진 하이힐, 뒤집어진 니트, 바닥에 버려진 바지, 브래지어를 밟고 있는 남성용 부츠. 어쩌면 거기에는 사랑의 행위에 대한 기억이 아닌, 육체가 빠져나간 부재의 자리가 쓰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지난밤을 빌려 오늘을 이야기했고, 욕망이 끝나고 남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흔적들 사이에서 상실의 전조를 예감하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찍힌 시기에 아니 에르노는 유방암을 앓았다. 자신의 경험을 이용하여 ‘삶’을 쓴다는 이 작가는 몇 개월 동안 폭력적인 작업들이 벌어졌던 자신의 몸을(그녀의 말처럼 지어내거나, 미화하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옮겼다. 종양이 자란 한쪽 가슴, 한 움큼씩 빠져나간 머리카락, 항암제를 부착하고 있는 체모가 없는 몸까지. 그곳에는 편재하는 죽음과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있고, 작가는 그것을 육체의 ‘부재’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거기 놓여 있는 지극히 물질적인(옷, 가구, 주방, 문 등등) 요소들은 형체가 없어 손에 쥐기 힘든 모든 것들(사랑, 죽음, 욕망, 부재까지도)의 유일한 증거들이다. 이곳에서 사라진 것은 육체인가, 사랑인가, 욕망인가. 여기에 남은 것은 부재인가 죽음인가. 무엇을 증명하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생(生)을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아니 에르노), 연인이 치러내는 전투를 통해 죽음을 배우는 사람(마크 마리), 우리는 그들이 무음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비밀스러운 몸짓들을, 어느 날 아침, 행위가 지나가고 폐허처럼 남겨진 것들을 담은 사진 속에서 알아차린다. 이곳에서 지난밤의 사랑과 욕망은 중요치 않다.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모든 것들을 최선을 다해 붙잡는 그들의 ‘시도’만이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고 만다. 육체가 빠져나간 이 에로틱한 공연의 관객으로서, 글로 쓰인 사진을 눈과 손으로 더듬으면서, 살과 뼈가 없이 이뤄지는 에로스를 받아들이면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진으로, 글로 뛰어넘기를 어느덧 소망하게 된다. ‘그러나 삶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적지 않는다. 그것은 소리가 없으며, 형태도 없다.’ ― ‘삶을 쓰다’(아니 에르노) 서문 中에서 글을 쓰는 일을, 소리도 없고 형태도 없는 삶에게 자신의 인생을 빌려주는 일이라고 말하는 작가가 건네는 이 가능성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유용한 무언가가 되기를, 우리의 언어로 옮겨진 이 책의 용도가 그것이 되기를 꿈꿔 본다. |